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52
152화. 떠오르거나 가라앉은 진실 (1)
그날 던전에서 겪었던 일들은 던전을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되풀이되었다. 두 손으로 검을 쥐고 활보했던 순간의 열기 또한 잊을 만하면 손바닥 안에 피어오르는 듯했다.
다행히 첫 훈련을 통해 검을 다루는 방법은 어느 정도 터득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따금 발생하는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몇 번의 훈련을 더 거듭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즈음에서 생각을 마무리한 나는 눈을 깊이 감았다가 뜨면서 숨을 길게 내뱉었다. 한쪽에 쌓여 있던 파일철을 가져와 서류를 마저 확인했다.
백이현을 시작으로 이름값 있는 헌터를 영입하는 일은 처음에 구상했던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설연호가 따로 정리한 그들의 프로필과 계약서를 꼼꼼하게 살펴본 뒤에는 함께 놓여 있던 다른 파일철을 들여다보았다.
규모가 작은 길드와의 인수 합병 관련 사안 또한 예정대로 진행 중이었다. 이천 게이트 사고 이후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된 것이 무색하게 우리 길드와의 협업, 더 나아가 인수 합병을 바라는 길드들이 꾸준히 소식을 전해 오는 중이었다.
한동안 소란스럽게 굴던 언론 또한 어느새 잠잠해진 상태였다. 강효서가 사망한 뒤에도 그에게 불거졌던 의혹을 엄중하게 수사할 것을 약속했던 검찰은 강효서보다도 효신 그룹을 집요하게 파고들기만 할 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강효서가 대량의 마석을 국가의 허가 없이 불법으로 보관했다는 사실을 뉴스에서 리포트하던 기자들 또한 그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잉―
자연스레 오한빈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즈음 휴대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발신인은 오한빈이었다.
“네, 도해월입니다.”
―예, 오한빈 기자입니다. 다른 건 아니고 조심스럽게 전달할 사안이 있어서요. 지금 시간 괜찮으시죠?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기자님께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대답이 없던 오한빈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운을 뗐다.
―예전에 제가 효신 그룹 주가 조작 뉴스의 후속 리포트로 얼마 전에 사망한 강효서 헌터에 다루려고 했던 건 전해 드렸습니다만……. 방송국 내부 사정으로 인해 뉴스 진행이 어렵게 됐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자세히는 저와 저희 취재 팀에게 윗선의 직접적인 제지가 들어와서 더 이상의 취재는 어렵게 되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그보다 강효서 헌터의 죽음 말인데요. 저 같은 방송국 사람들 사이에서 도는 풍문으로는 건강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수도 있다던데…….
나는 그의 말에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다른 방송국 기자들한테 연락을 돌려 보니 그쪽도 저희랑 비슷한 상황인 것 같더군요. 당장은 취재를 그만두라는 압력이 들어왔으니 멈춰 있겠지만, 이대로 그 헌터가 보관했던 마석 얘기는 싹 묻혀 버리게 되면 그건 그것대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요.
이어서 그는 나에게 관련하여 알고 있는 정보가 있는지, 그가 대량으로 보유한 마석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부분에 관한 건 저도 짐작하는 바가 전무한 상태입니다.”
그런 내 대답을 듣던 오한빈은 우선 알겠다고 대답한 뒤 혹여 알게 되는 것이 있거나 다시 도움이 필요해진다면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통화를 종료했다.
귓가를 맴돌던 오한빈의 음성이 완전히 사라질 즈음 또 다른 서류를 들춰 보면서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이전에 살피던 것들보다 확인이 비교적 수월한 사안을 살피고 있으니 강효서에 관한 것들이 계속 떠올랐다.
유가족의 뜻에 따라 국가의 지원을 받아 조촐하게 장례를 치른 강효서는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서애란이 스치듯 언급했던 것처럼 그의 죽음과 관련한 의혹은 완전히 덮이지 않은 상태였다.
무의식적으로 창가를 내다보려던 나는 사방이 막힌 벽면에서 시선을 틀어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강효서의 죽음과 그가 남긴 여러 가지 의문들을 집요하게 쫓는 건 서애란도 마찬가지였다. 범람에서의 여론전이 마무리된 뒤 서애란은 며칠 동안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고 한국마력연구소와 관련한 것들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녀가 그동안 수집한 사안을 보고받기로 한 날이었다. 약속했던 시간까지 십여 분 정도 남아 있는 걸 확인한 뒤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를 느릿하게 정리했다.
* * *
체감상 오랜만에 마주하는 듯한 서애란은 안색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녀는 집무실에 놓인 회의용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뒤 직원이 준비해 준 음료를 마시면서 침묵을 유지했다.
“지난겨울에 지시했던 건 한마연과 그 안에 보관되어 있을지 모르는 물건에 대한 거였지만, 한동안 강효서 선배에 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어.”
얼마 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서애란이 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래서 검찰 쪽을 더 파고들어 볼까 했는데 그쪽은 내가 접근할 방도가 없는 터라 별다른 소득은 없었고. 그 뒤로 강효서 선배랑 얽혀 있던 걸 하나씩 떠올려 보다가 한마연 쪽으로 방향을 잡고 알아보니 몇 가지 집히는 것들이 있더라.”
이어서 서애란이 가장 먼저 언급한 건 강효서가 사망한 뒤 한국마력연구소 내부의 분위기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관한 지점이었다.
“내가 제일 먼저 접했던 건 강효서 선배가 사망한 이후에 한마연 내부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는 거였어. 살아생전에 그 선배가 속했던 건 이관부였는데 막상 소란해진 건 한마연이라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러네. 검찰 발표 이후에 이관부에서 내놓은 공식 입장에서도 자기들은 강효서 선배의 사생활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면서 곧장 선부터 그었잖아. 그것만 보면 내부에서도 쉬쉬하는 쪽으로 몰고 가는 것 같던데.”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미간을 슬며시 찌푸린 채로 대답했다. 그러자 서애란은 맞은편에 앉은 내 어깨 너머로 닫힌 문가를 재차 확인하고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서 계속 파고들어 보니 금방 답이 나왔어. 성민주 선배가 한마연에 입사한 뒤로 차진명 선배랑 강효서 선배랑 둘이서 연구소에 다녀가는 일이 잦았다고 하더라. 어느 순간부터는 강효서 선배가 차진명 선배를 대신해서 연구소에 방문하는 횟수가 늘어났고. 연구소 사람들이 동요했던 것도 그래서였나 봐.”
“단순히 연구소를 드나드는 걸로 내부 분위기에 큰 영향을 주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 선배가 거기서 뭘 했는지도 알아봤어?”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음료를 한 모금 마신 서애란은 고개를 돌린 뒤 잠시 침묵했다. 머지않아 이어진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마력연구소 내부에는 수석연구원들과 지정된 관계자들만 출입할 수 있는 특수한 공간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강효서가 생전에 계속해서 드나든 것 또한 그 공간이었다고 한다.
“연구원들도 눈치가 있으니 닫힌 공간 안에서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나 봐. 그런 곳을 원하는 대로 드나드는 강효서 선배를 보면서 내부에서도 그 선배가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겠지.”
“그것까지 듣고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네. 그럼 말단 연구원들 말고 박호재 연구소장이나 그 주변 사람들 반응은 어땠는지도 들었어?”
서애란의 말에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면서 경청하던 나는 그녀에게 대답하면서 등허리를 세워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어서 떠오른 질문까지 자연스럽게 전달하자 잠시 고민하던 서애란이 답을 들려주었다.
“박호재 연구소장도 이관부에서 내놓은 공식 입장이랑 비슷한 반응인 것 같아. 풍문으로 들어 보니 차정주 이사장의 선거를 본격적으로 도울 계획인 것 같다고 했어.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한마연이랑 관련된 업무는 성민주 선배한테 조금씩 위임할 생각인가 봐. 박호재 연구소장 밑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수석연구원이 그 선배 옆에 계속 붙어 있다고 들었어.”
그 말을 끝으로 한국마력연구소와 관련한 정황 설명이 마무리되었다. 차가운 음료를 몇 모금 마시면서 목을 축이던 서애란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무쪼록 그 안에서 무슨 짓을 벌이는 건지, 네가 짐작하는 대로 성물이 거기 있는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수확이 없었던 건 아니야.”
그 말을 끝으로 근처에 놓았던 가방을 뒤적이던 서애란이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가운데 내려놓았다. 자세히 보니 그건 손가락 두어 마디 정도 되는 크기의 흰색 약통이었다. 나는 그것을 섣불러 열어 보지 않고 서애란에게 먼저 물었다.
“이게 뭐야?”
“불법 마석 가공물. 먹지만 않으면 큰 문제는 없을 거니까 열어 봐도 돼.”
서애란은 흰 약통에 눈길을 두고 가볍게 고갯짓했다. 그제야 약통을 집어 든 나는 뚜껑을 열고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불투명한 알약 형태의 캡슐 안쪽에 잘게 갠 검푸른색 가루가 담겨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희찬 선배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불법 마석 가공물도 한마연에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거, 너도 기억하지. 그때 선배가 예상했던 게 맞았더라고.”
“이런 게 존재한다는 건 학교 다닐 때부터 알고 있기는 했지만, 직접 보니 기분이 묘해지네. 이건 어디서 구했어?”
엄지와 검지로 쥔 약통을 느릿하게 돌리면서 캡슐을 전등에 비춰 보았다. 그러자 캡슐 안쪽에 담긴 가루가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불투명한 막 너머로 희미한 빛을 냈다.
“헌터 아카데미 학생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던 걸 중간에서 가로챈 거야.”
“거래라고? 우리가 학교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걸 거래한다는 얘기는 못 들었던 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거래가 시작된 건 얼마 안 된 일인 것 같아. 문제는 이 거래를 주도하는 게 누구인지에 관한 건데…….”
그즈음에서 말끝을 흐린 서애란은 나에게 향하던 시선을 거두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강효서 선배가 그렇게 되기 전에 그 선배는 들불의 이름을 바꿔서 새로운 커뮤니티로 개편하려고 했던 것 같아. 그러면서 학교에 아직 남아 있는 후배 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새로운 관리자로 세웠고. 지금은 그 관리자가 거래를 주도하고 있다고 추정 중이야.”
이때까지 잠자코 서애란의 말을 듣던 나는 그 순간 눈을 깊이 감으면서 탄식했다. 이내 손끝으로 이마를 문지르면서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 선배도 참……. 많은 걸 남겨 두고 떠났네.”
말을 내뱉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차오른 한숨이 함께 쏟아졌다. 그녀 또한 같은 심정인 건지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걸 먹고 나면 어떻게 되는 건지 알고 있어? 우리가 졸업하고 나서 거래를 주도하는 사람까지 생긴 거면 뭔가 알려진 게 있는 것 같은데.”
“재작년 겨울에 학교에서 돌았던 소문이랑 비슷해.”
“그때 돌았던 소문이라면 내가 이걸 먹고 등급 상승을 꾀했다는 것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맞아, 그거야. 이걸 하루에 두 번씩 꾸준히 먹으면 각성자 등급이 상승하거나 신체 능력이 월등하게 향상한다고 알려져 있대.”
나는 손끝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에 옮겨 얹었다. 과거의 어느 날 문제혁과 함께 있던 나에게 찾아와 불법 마석 가공물을 먹고 등급을 올린 것이냐며 비꼬던 누군가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듣고 보니 기억난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그런 헛소문으로 취급하던 사람이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정말 효력이 있긴 한 거야?”
“그것까지는 확실하지 않아. 대신 이걸 장기적으로 복용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 어떤 건지는 알아냈어.”
“부작용? 어떤 건데?”
“온몸의 피부가 창백해진대.”
서애란이 마지막으로 전한 말을 듣는 순간 헌터 아카데미에서 지냈던 세월의 기억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오래된 기억 속에 묻혀 있던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현욱?”
이윽고 그를 호명하는 순간 안개처럼 흐릿하던 것이 걷히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던 그의 얼굴은 언제나 기이할 만큼 창백했던 것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