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55
155화. 새롭게 돋아난 가지 (2)
주말 아침, 정건후를 만나기 위해 내가 향한 곳은 남산 팔각공원이었다. 인적이 비교적 드문 오전 시간의 산책로는 오가는 길목마다 서늘한 바람이 감돌았다.
학교나 사무실이 아닌 공간에서 만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밝힌 건 정건후였다. 그의 제안에 선선히 동의한 나는 약속 시간보다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먼 길을 빠른 속도로 가로지르는 동안 은연중에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약속 장소인 전망대까지 단숨에 다다른 나는 편안하게 호흡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정건후였기 때문일까. 오늘 그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상상하면서 걷다 보니 과거로 처음 회귀한 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때는 기숙사에서 수업이 진행되는 건물로 달리는 것만 해도 조금 버거웠는데.
하지만 오늘은 경사를 타고 오르는 동안 몸이 가볍게 느껴지는 것으로 모자라 속력을 붙일수록 활력이 붙는 느낌이었다. 기준을 정해 두고 비교해 본다면 전생의 내가 일정하게 유지하던 컨디션과 훨씬 가까운 상태였다.
나는 팔각정에 오르는 낮은 계단 앞에 서서 손을 쥐었다가 펼쳐 보면서 상념에 빠져들었다. 은연중에 계획했던 대로 삼월에 이르러 길드의 입지는 어느 정도 확보되었고 지금은 입지를 굳히는 단계에 들어와 있었다.
물론 여기서 안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는 급속도로 성장한 우리 길드를 견제하거나 암암리에 노리는 세력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시점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회귀한 직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전생의 내가 이맘때 등급이 어떻게 됐었는지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졸업한 뒤 일 년의 시간이 지났을 때면, 한참 차진명 밑에서 던전을 구르고 있었을 시기다. 대충 A급을 노리고 있었을 때인가. 차정주가 총선에 출마한다는 뜻을 주위에 밝힌 시기는 전생과 같았다. 총선 일정은 그들이 멋대로 조정할 수 없고 반드시 예정된 시기에 진행될 테니 그 시기에 맞춰 목표를 달성하면 될 터였다.
“남은 시간은 일 년 하고 두 달 정도야. 그때까지 A급으로 올라가자.”
머릿속에 또렷하게 각인시키고자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린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전생에 지나왔던 그 길을 다시 걸어가려니 다소간 막막해졌다. 성장하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고비였던 것이 B급에서 A급으로 올라가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해 봐야지. 별수 있나.”
문득 중얼거리다가 전날 미팅 룸에서 마주했던 문제혁과 지선일을 떠올렸다. 그들의 수상한 차림새나 어색한 연기 같은 것들을 떠올리면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비슷한 기억을 연이어 떠올리고 있으니 아무렴 내가 해내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제야 땅에 붙박여 있던 두 발을 움직여 전망대 쪽으로 향했다.
* * *
“이제 학생 티는 완전히 벗은 것 같네. 졸업한 지 얼마 안 지난 것 같은데.”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전망대 난간에 걸쳐 있던 나를 돌아보게 만든 건 정건후의 목소리였다. 그는 내 옆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는지 멈춰 있던 자리에서 손을 흔들면서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나요.”
“그럭저럭.”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 나에게 다시 한번 손을 흔든 정건후가 금세 곁으로 다가왔다.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살갑게 손을 내밀던 한도일과 다르게 그는 나의 행색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너희 소식은 안팎으로 꾸준히 전해 들었다. 마스터로 지내는 게 쉽지 않지?”
평소처럼 간결하게 묻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맥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정건후가 등을 두어 차례 두드려 주었다.
“준비한 질문이 적지 않을 것 같은데. 뭐든 떠오르는 대로 편하게 물어봐라.”
그렇게 말한 그는 자세를 틀고 난간 너머를 내다보면서 바람을 마주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기복 없이 단단해 보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느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차정주 이사장의 행보와 관련해서 학교가 소란스러워진 상황이라고 들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마 선언을 한다고 들었어요. 관련해서 선생님은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학교 상황이 어떻게 될지도 짐작하는 바가 있으신가요.”
어느 순간부터 난간에 손 하나를 얹고 있던 그는 말없이 몸을 틀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에도 허공을 바라보며 음, 하는 소리를 내던 정건후가 대답한 건 한참 지나서였다.
“학교가 소란해진 건 이사장이 출마한다는 소식을 학생들이 접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거다. 나를 비롯한 교사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기도 했고, 재단에서도 다음 이사장으로 세울 인물을 진작 물색하고 있었으니 곧 소식이 전해지겠지.”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덧붙여 묻지 않고 기다리고 있으니 정건후가 마저 말했다.
“학생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건 단순히 이사장이 학교를 떠나서 그런 것만은 아닐 거다. 그 양반이 학교에 관심이 없는 거랑 별개로 S급 헌터로서 심정적인 기둥 역할을 도맡았던 건 사실이니까.”
그 정도는 나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윽고 사실상 내가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 중 하나를 꺼내 놓았다.
“선생님도 내년에는 학교를 떠나시는 건가요?”
그는 소리 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뒤 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학교를 떠나는 건 한참 전부터 계획된 일이었어. 그저 여러 변수가 생겨서 조금 더 머물렀을 뿐이었으니 이제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전생의 그에게 가장 큰 변수는 자신의 사망이었을 것이다. 이번 생의 그에게 닥친 가장 큰 변수는 다름 아닌 나였을 테고.
“학교에 머무르는 동안 궁금하셨던 건 전부 알아내셨나요?”
“차정주 이사장에 관해 묻는 건가?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는.”
넌지시 물어본 질문에 정건후가 서울의 전경을 내다보면서 대답했다. 이번 생의 내가 노리는 건 차진명이지만, 그의 부친인 차정주의 행보 또한 등한시할 수 없었다.
그와 더불어 새로운 변수 중 하나인 정수희에 관해서도 알아봐야 했었다. 김수호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정건후에게 묻는 것이 가장 적합할 듯한데.
“표정을 보아하니 이사장과 관련해서 묻고 싶은 게 많은가 보네. 어서 말해 봐.”
그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는 것이 좋을지 망설이고 있을 즈음 나를 바라보던 그가 먼저 질문했다. 나는 기회를 마다하지 않고 같은 S급 헌터로서 바라보는 차정주는 어떤 사람인지를 시작으로 그의 대학 동기였던 사양의 정수희 마스터에 관한 것까지 차근차근 질문했다.
“차정주 이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려면 내가 헌터 아카데미에 오게 된 이유부터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듯하군.”
질문하는 내내 중간에서 말을 가로막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던 정건후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느새 아침이 환하게 밝아오면서 전망대 근처에도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건후는 그들의 움직임을 돌아보다가 금세 시선을 거두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정건후의 설명에 따르면 성물 도난 사건 이후 헌터 아카데미에 교사로 투입되려고 했던 사람은 정건후가 아닌 한도일이었다고 한다. 의견을 먼저 제시한 건 한도일이었으나 결국 정건후가 오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차정주와 같은 S급 헌터인 자신이 그를 대적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차정주는 B급 이하의 헌터는 자신과 같은 헌터라고 취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건후가 그의 세력에 포섭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은 S급 헌터였기 때문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휘말렸을 거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한도일 마스터를 만나서 나눴던 대화에 관한 건 이미 전해 들었다. 그 당시 한도일 마스터를 고생하게 만든 건 여전히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난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정건후는 머릿속으로 한도일의 모습을 떠올리는 듯 허공으로 시선을 틀었다. 머지않아 그의 표정에서 단번에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읽히는 듯했다.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정수희 마스터와 차정주 이사장의 관계에 대해 얘기해 볼까.”
정건후의 설명을 듣고 차정주와 차진명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되짚어 보던 나는 상념을 거두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던 정건후는 높게 뻗은 나뭇가지 쪽으로 시선을 틀면서 다시금 입을 열었다.
* * *
나는 아침나절에 모습을 드러낸 해가 정오에 이르러 하늘의 한가운데 떠오를 때까지 전망대에 머물렀다. 먼저 돌아가겠다던 정건후에게 배웅을 마친 뒤에도 그가 했던 말을 계속해서 곱씹어 보았다.
차정주와 정수희는 한때 헌터 아카데미를 설립하겠다는 공동의 목표를 가졌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교육 이념이 서로 다른 나머지 끝까지 함께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두 사람이 틀어진 계기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했다. 정확한 계기는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라던 정건후는 자연스럽게 사라진 성물에 관한 이야기로 화두를 돌렸다.
‘차정주 이사장이 그 창을 노리는 건 그 사람조차도 제 뜻대로 이루지 못한 목표가 있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건 말 그대로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성물이 지닌 능력에까지 손을 뻗으려는 거겠지.’
그때 방금까지 곁에 있었던 정건후의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금 울려 퍼졌다. 차정주가 그 창으로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이룰 수 없는 뜻을 이루기 위해 성물을 노렸다는 목적은 차진명과 일치했다. 그 사실을 정건후에게 에둘러 전하면서 나의 목적 또한 성물의 남용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것까지 밝히고 나자 그는 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같은 물건을 찾기 위해 각자 다른 사람을 추적한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평행선을 그리는 것 같네.’
나는 정건후의 목소리를 귓가에 되새기면서 언젠가 그와 맞닥뜨릴 소실점을 상상했다. 만약 그곳에 내가 먼저 도달하여 잃어버렸던 창을 되찾는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게 될까.
“돌려줘야지. 그 두 사람한테.”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순간 스스로 질문한 것이 무색하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잉―
지잉―
지잉―
그때 코트 주머니에 담겨 있던 휴대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곧장 꺼내서 확인해 보니 고예성이 남겨 놓은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용산 소재 길드 관련해서 지시했던 거 알아봤어] [자세한 보고는 사무실에서 할게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일정 정해서 알려 줘 그리고 혹시 에덴 길드라고 알고 있어?]마지막 메시지에 언급된 에덴 길드라면 물론 알고 있었다. 고예성이 벌써 언급하는 걸 보면 그곳에서도 이번 경쟁에 뛰어들 작정인 듯한데……. 대체 왜지?
기억 속에서 그들의 행보를 되짚어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고예성을 서둘러 만나는 것이 좋을 듯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다음 주 일정을 점검한 뒤 고예성에게 답장을 전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