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57
157화. 새롭게 돋아난 가지 (4)
같은 시각, 헌터 아카데미 기숙사 옥상.
“네, 네.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어요. 아직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아요.”
난간과 두어 걸음 떨어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던 누군가 휴대전화에 대고 말했다. 그녀는 손끝으로 창백하게 질린 목덜미를 마구 긁어 대면서 상대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생각보다 눈치가 훨씬 빠른 애들이야. 꼬투리 잡히면 전부 들통나는 건 한순간이니까 제대로 처리해. 관리자 권한으로 접속해서 들불도 매일 확인하고.
그녀는 휴대전화 너머로 자신에게 관리자 권한을 부여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에게 이 모든 걸 맡긴 건 한참 전에 학교에서 사라진 선배, 강준희였다.
관리자가 그의 행색을 선명하게 떠올리기 위해 눈을 감은 순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휴대전화를 쥐고 있지 않은 손이 둥글게 말리면서 주먹에 힘이 실렸다.
“네, 알겠어요. 특이 사항 생기면 바로 보고할게요. 네.”
휴대전화에 대고 성실하게 대답하는 목소리를 연기하던 관리자는 주먹을 펼친 뒤 손톱을 세워 목덜미를 긁기 시작했다. 몇 주 전부터 시작된 갈증은 이제 목이 바짝 마르는 것 같은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거래 준비도 끝냈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훨씬 좋아요. 네, 무조건 비밀에 부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받아 간 사람들 입단속도 제대로 시켜 뒀어요.”
툭 불거진 뼈마디로 목덜미를 미친 듯이 긁었으나 살갗은 여전히 창백했다. 마구잡이로 긁은 자리에 피가 비치기는커녕 과한 자극에도 붉어지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네, 바로 확인할게요. 네.”
그 말을 끝으로 통화를 종료한 관리자는 휴대전화를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교복 치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내 주머니 속에 있던 손에 잡힌 립밤을 버석거리는 입술에 바르면서 고개를 젖혔다.
그대로 모든 움직임을 멈춘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지근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맑은 하늘을 보고 있으니 저렇게 새파란 물을 한가득 마시면 갈증이 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의식을 헤집었다.
“후.”
이윽고 립밤을 주머니에 욱여넣은 관리자는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관리자는 부작용이 거셀수록 효과가 확실할 거라던 강준희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 이 고생스러운 시간을 이겨 내면 나도 그 사람처럼 될 수 있을 거야. 조금만 버티자.’
그렇게 생각하던 관리자는 머릿속으로 어떤 이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자신처럼 보잘것없고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누구나 알 만한 곳에서 모두의 신임을 받으며…….
“너, 너 왜 그래. 괜찮아?”
그때 육중한 소음과 함께 옥상 문이 열리면서 분주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관리자는 제 팔목을 잡고 억지로 돌려세우는 여학생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 고개를 틀었다.
“신경 쓰지 마. 어떻게 됐어?”
관리자는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어 여학생의 손을 뿌리쳤다. 그대로 떠밀린 여학생은 겁에 질린 얼굴로 관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귀 막혔어? 어떻게 됐냐고 물어보잖아.”
“아, 그게…….”
문득 소름이 끼치는 듯 온몸을 잘게 떨던 여학생이 닫힌 문을 돌아보았다. 기척 없이 한적한 옥상 내부에는 곳곳에서 만개한 꽃향기가 실린 바람만 이리저리 맴돌 뿐이었다.
“8반에 있던 애는 아침부터 계속 구토하다가 방금 조퇴했다고 들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병원은 가지 말라고 당부해 뒀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또 3반에 있던 애는 며칠 전부터 갈증이 너무 심하다고 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계속 얘기하니까 금방 잠잠해졌어.”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하던 여학생이 관리자와 두어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그녀를 힐긋거렸다. 바람이 검고 긴 머리카락을 들출 때마다 바로 직전까지 긁고 있던 목덜미가 드러났다.
“다음 거래 일정도 확인했지? 당분간 난 개편에만 집중해야 하니까 특별히 걸리는 게 있다 싶으면 바로 얘기해.”
시선을 의식하고도 덤덤한 어조로 말문을 맺은 관리자가 여학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학생은 손목에 걸고 있던 작은 가방을 그녀에게 건네면서 조심스레 입을 뗐다.
“이건 그냥 내가 불안해서 그러는 건데……. 혹시라도 누가 범람 같은 곳에 폭로해 버리면 어떡하지? 거래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기도 하고 날마다 조퇴하는 애들이 점점 늘어나는 걸 누가 눈치채기라고 하면…….”
작은 크기의 약통이 한가득 담긴 가방을 쥐고 구석진 곳을 향해 걸어가던 관리자가 그 말을 듣고 우뚝 멈춰 섰다.
관리자는 발끝에서부터 용솟음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가방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러자 팔목과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커뮤니티 개편 때문에 계속 정신없을 것 같다고 방금 얘기했잖아.”
말을 다 끝내지 못한 관리자는 고개를 툭 떨군 채 벌어진 입술 틈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불법 마석 가공물을 섭취하게 되면서 생긴 부작용은 갈증뿐만이 아니었다.
시종일관 불덩이를 입에 물고 있는 듯한 갈증보다 관리자를 더욱 괴롭게 만드는 건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분노였다.
“네가 생각해도 너 요즘 이상해진 것 알고 있지.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 그냥 선생님한테……. 이걸 들고 누구한테 가지? 그래, 정건후 선생님한테 가서…….”
관리자의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채로 닫힌 문을 힐긋거리던 여학생이 순간 말끝을 흐렸다.
“지금은 너랑 나랑 이성적으로 대화할 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아.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연락할게.”
맞은편에서 관리자의 모습을 가만히 주시하던 여학생은 빠르게 판단을 마친 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홀로 남은 그녀는 갈색 머리카락을 날리면서 사라지는 모습에서 금세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관리자의 주변으로 얕은 바람이 일더니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캐비닛이 모습을 드러냈다. 관리자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핀 뒤 캐비닛을 열어 가방을 집어넣고 구석에 넣어 두었던 작은 노트를 펼쳐 보았다.
‘정건후 선생님한테 얘기하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데 정말 나 몰래 정건후 선생님한테 찾아가서 전부 말해 버리면 어떡하지? 누가 범람에 올리기라도 한다면?’
첫 번째 장부터 빼곡하게 적힌 것들을 차례로 넘기던 관리자는 문득 손을 멈추고 여학생이 사라진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기 전에 내가 처리하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끝없이 치솟기만 하던 분노가 일제히 가라앉으면서 이성이 되돌아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쾅―!
낡은 철제 캐비닛의 문을 거세게 닫는 순간 거대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관리자는 두어 걸음 물러난 뒤 다시 눈을 감았다. 이어서 눈을 떴을 때는 눈앞에 있던 캐비닛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 * *
김수호는 연락을 남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을 전해 주었다. 짧은 통화 정도는 가능하다는 그의 메시지를 읽은 나는 곧바로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음, 어디서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지 고민이네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관광용 던전의 관리 권한을 보유한 길드끼리 얽힌 카르텔이 술렁였던 건 사실입니다. 마스터님의 결정 이후 사양 내부에서도 반발이 꽤 거세기도 했고요.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손에 쥐고 있던 파일철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다시 창가 쪽으로 몸을 틀고 바깥을 내다보며 절로 쏟아지려는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반응했던 곳이 에덴 길드였다는 것도 사실이에요. 관광용 던전 사업이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카르텔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가장 크게 일조한 곳이 에덴 길드였으니 놀라울 건 없는 반응이었죠, 우리 입장에서는.
김수호가 말을 끝낼 때까지 침묵하던 나는 그에게 에덴 길드와 이능단속‧관리본부 사이의 결탁 관계가 존재하는지 물었다. 전생의 기억과 이번 생의 상황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 말을 듣고 한참 고민하던 김수호는 그런 부분까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관광용 던전의 관리 권한을 가진 길드들 또한 사양과 도해처럼 일종의 협업 관계를 맺은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들 사이의 협업은 서로의 행적에 관해 깊이 파고들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각각의 길드 내부에 심복을 붙이지 않는 것으로 형성되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런 것까지 고려해서 추측해 본다면 떠오르는 이유가 영 없는 건 아닙니다. 에덴 길드는 지금쯤 멋대로 카르텔의 균형을 깨뜨린 사양에게 무척 화가 났을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이때까지 유지했던 사양과의 관계를 단숨에 정리할 수 없으니 타깃을 도해로 바꾸려는 걸 수도 있습니다.
“음, 그것까지 듣고 생각해 보니 그쪽에서 우리한테 일종의 경고를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네요.”
―맞아요. 아마 그럴 겁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저도 생각지도 못한 터라 당황스럽기도 해요. 그쪽에서 이관부 내부 인사들과 가깝게 지내는 건 알았지만, 이건 좀.
이어서 김수호가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는 사이 누군가 회의실의 문을 두드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살펴본 문간에는 설연호가 서 있었다.
“바쁘신 와중에 선뜻 연락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충분한 도움이 되었어요.”
나는 설연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 뒤 휴대전화에 대고 정중한 인사를 남겼다. 이어서 김수호도 마침 끊을 때가 되었다고 말하더니 간략한 인사를 건넸다.
“아, 집무실에 안 보이길래. 다른 직원이 회의실에 있다고 알려 줘서 바로 온 거야.”
통화를 마무리한 뒤 재차 돌아본 설연호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 휴대전화를 집어넣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뭐든 말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십 분 정도 전에 차정주 이사장이 기자회견을 시작했어. 출마 선언을 한다고 하더라.”
“출마 선언이라고?”
“응, 영상 연결해 뒀으니까 바로 보면 돼.”
걸음을 재촉한 건지 숨을 몰아쉬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밀었다. 곧장 받아 들고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기자회견이 한창인 차정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어깨 너머에는 국민미래당의 이름과 상징이 규칙적으로 나열된 배경지가 놓여 있었다.
“배경 보이지? 이번에 국민미래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대.”
나는 설연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영상을 확인했다. 단상 앞에서 마이크를 매만져 각도를 조절한 그는 특유의 중후한 음성으로 자신의 뜻을 밝히기 시작했다.
―바쁘신 일정에도 이 자리에 모여 주신 모든 기자 여러분께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저는 향후 국민미래당과 손을 잡고 함께 그려 나갈 가슴 뜨거워지는 소명을 여러분께 전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헛웃음을 짓고 있을 때였다. 차정주가 자신을 촬영하고 있던 카메라를 응시하는 순간 화면 너머의 나와 눈을 마주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