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59
159화. 또 다른 소실점 (2)
사흘 전 급하게 소식을 전해 왔던 지선일과의 전화 통화는 예상보다 짧게 마무리되었다. 지난번 미팅 룸에서 만났던 그녀가 전한 대로 교내에서는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은 나머지 모든 상황을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하여 내가 전해 들은 건 나와 서애란이 짐작했던 대로 교내에서 수상한 거래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었다. 그 거래를 주도하고 사람들을 모집하는 건 두 명의 여학생으로 추정되고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 강준희일지도 모른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사실 준희 선배랑 관련한 건 얻어걸린 거나 마찬가지예요. 거래를 주도하던 두 사람 중에서 한 명이 저랑 제혁이를 은근히 의식하는 것 같았거든요. 자세한 건 이틀 뒤에 만나서 얘기해 줄게요. 아, 그리고 다음 주에 학교에 새 이사장이 부임한대요.’
집무실과 연결된 숙소 침대에 걸터앉아 지선일과의 통화를 곱씹던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일어섰다.
지난 사흘 동안 예정된 일정대로 설연호와 함께 던전을 연이어 공략하면서 소진된 체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오랜만에 오전 내내 휴식을 취하고 일어난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털면서 욕실로 향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목덜미에 수건을 걸친 채 남은 물기를 닦으며 개운함을 만끽하던 것도 잠시 욕실 밖의 서늘한 공기가 살갗에 닿는 순간 손가락 뼈마디가 욱신거리면서 통증이 일었다.
“이거 참, 되게 아프네.”
이내 관절마다 자글거리는 듯한 통증이 불거지면서 전류가 흐르는 듯한 찌릿함까지 느낀 뒤 수건에서 손을 거두었다.
손바닥을 곧게 펼친 뒤 불빛 아래에 비추어 보자 검을 움켜쥐었던 마디마다 붉게 맺혀 있던 물집이 터진 것이 보였다.
물집이 터지면서 죽은 살점이 너덜너덜하게 들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손에서 시선을 거뒀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통증이 거세지는 기분이었기에 애써 외면하는 채로 지난 이틀 동안의 훈련을 되짚었다.
최근 들어 훈련에 한층 더 몰두한 채로 임했던 건 근래에 접한 두 가지 소식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마주칠 것이라고 짐작만 했던 에덴 길드를 예상보다 일찍 마주치게 되면서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차정주가 출마를 선언하던 현장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기고 떠난 뒤로 고민의 무게가 배가되는 듯했다.
그래도 성물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서 쩔쩔매던 시기는 금방 지나쳐서 다행이었다. 아이템이 없었으면 시간을 몇 배를 더 투자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고통을 절감시키기 위해 손가락을 억지로 쥐었다가 펼치던 나는 칼자루를 쥐는 것처럼 허공에 모양을 잡아 보았다.
처음에는 육중한 검을 쥐고 빠른 속도로 활보하며 단거리 전투를 이행하는 게 쉽지 않았었다. 하지만 훈련을 거듭하다 보니 조금씩 요령이 생겼다. 이제는 검에 깃든 힘 또한 나와 호흡을 맞추려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만큼은 죽을 때까지 총잡이로 살 줄 알았는데. 이걸 전생의 부대원들이 알게 되면 뭐라고 반응하려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허공에 두었던 손을 떨어뜨린 나는 문득 전생의 차진명이 유스티티아의 검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했는지 떠올랐다.
당시의 그는 검날에 상대방이 자신에게 지닌 악의를 저장한 뒤 역으로 공격하면서 그것들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이 크고 맹렬할수록 공격의 효과가 상승했다.
“차진명은 그 기술을 대체 어떻게 익힌 거지.”
전생의 차진명이 거머쥐었던 검날에 맺힌 무수한 악의를 생각해 보았다. 자연스럽게 현재의 삶으로 이어진 기억을 되짚다 보니 몇 년 전, 헌터 아카데미에서 마주쳤던 강효서의 사촌동생, 강현욱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때가 정확히 언제였지? 차민훈의 지시로 화장실을 청소하던 날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강현욱도 그랬다. 몇 년 전, 헌터 아카데미에서 마주쳤던 그는 그날따라 유독 수상하게 굴었다. 공정한 판별자 스킬을 시전했을 때 그가 나에게 지닌 악의를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전생에서 차진명에게 품었던 악의를 고스란히 되돌려받고 사망한 이들이 그토록 고통스러워했던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 것만 같았다.
이어서 강현욱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간 전혀 왕래가 없던 나에게 상식적인 수준 이상의 악의를 품고 있었던 그날에도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럼 그때도 불법 마석 가공물을 섭취하면서 생긴 부작용 때문에 그랬던 건가?
오래전에 차민훈과 함께 사라진 강현욱은 지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나 역시 긴 시간을 지나오면서 그와 관련한 기억을 자연스럽게 잊고 있던 터였다.
과거의 내가 의문으로 남겨 두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이런 식으로 얻게 될 줄은 몰랐기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강현욱은 강효서 선배가 졸업하고 나서 날 감시하려고 심어 둔 심복이었고, 이제는 두 사람 모두 영영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번에 나타난 새로운 관리자는 누가 맡긴 것일까.
새로 떠오른 질문은 잠시 접어 두고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오늘 지선일과 문제혁을 만나기로 한 건 헌터 아카데미 근처에 있는 낙후된 공원에서였다.
잔뜩 쌓여 있던 메시지를 확인하던 나는 함께 만나기로 한 서애란이 조금 늦을 것 같다며 남겨 놓은 메시지까지 확인한 뒤 옷장을 열었다.
†
걸음을 옮긴 지 한참 지났을 무렵 멀리서 익숙한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곳에 시선을 두고 걷고 있으니 코끝에 짙어진 꽃향기가 훅 미쳤다.
새벽에 내린 부슬비를 따라서 맑아진 하늘과 서늘해진 바람결을 느끼며 걷고 있으니 오감 또한 선명해지는 듯했다.
자연스레 이곳에서 마주했던 동료들과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잔상이 끝나갈 즈음 공원 가운데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일순 걸음을 멈춘 건 두 사람의 차림새 때문이었다. 그때 입구를 넘어서는 순간의 중얼거림을 기민하게 알아챈 지선일이 먼저 나에게 손짓했다.
뒤이어 나를 돌아본 문제혁이 손을 크게 흔들어 보였다. 그들은 내가 근처로 다가가기 무섭게 손에 들고 있던 캡 모자와 마스크를 씌워 주었다.
나는 두 사람이 왜 또 이러나 싶은 생각은 진작에 접어 두고 그들의 손길에 응했다. 무엇보다 벌써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머지 무어라 말을 붙여 볼 겨를도 없어 보였다.
“애란 선배는 언제쯤 오는 거예요?”
“먼저 이야기 나누고 있으라고 한 것 보면 좀 늦을 건가 봐. 그나저나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이번 주말에는 기숙사에 남아 있는 사람도 별로 없다며.”
모자를 깊이 눌러 쓴 나머지 시야가 낮아진 지선일이 턱을 반쯤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그늘진 얼굴로 한숨을 쉬더니 문제혁을 힐긋거리면서 말했다.
“저랑 제혁이가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기는 했거든요. 그렇게 했는데도 그쪽에서 눈치를 챈 건지 며칠 전부터 거래 자체가 중단된 것 같아요. 그리고, 음……. 우리가 거래 정황을 포착한 게 정확히 언제였지?”
말을 잇던 도중 말끝을 흐리면서 지선일이 문제혁을 돌아보자 그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지난주 화요일부터 몸이 아파서 조퇴하는 사람 수가 갑자기 늘어났어. 대부분 원인 불명의 복통이나 두통을 호소했고, 심각한 경우에는 구토 증세를 겪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 형한테 부탁받고 나서 거래 정황을 확보하게 된 것도 같은 날이었어.”
이어서 문제혁은 원인 불명의 통증을 호소하며 구토 증세를 보인 학생과 접촉을 시도해 보려 했으나 바로 다음 날 교내에서 식중독 사태가 벌어지는 바람에 계획이 무산되었다고 설명했다.
“그 순간에는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나 싶었거든. 그런데 우리가 뭔가 알아내려고 하거나 몸이 안 좋다는 학생들이랑 따로 접촉해 보려고 시도할 때마다 비슷한 일이 계속 터지더라. 그럴 때마다 학교 전체에 비상이 걸리는 바람에 더는 손을 쓸 수 없게 됐고.”
그 말까지 듣고 보니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주의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듯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서 예기치 못하게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때마다 그들 역시 무척 당혹스러웠을 것이었다.
“학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이해했어. 거래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던 거야? 지금까지 알아낸 것만 얘기해도 괜찮아.”
“거래 방식은 단순했어요. 예전에 들불에서 정보를 주고받던 방식이랑 흡사하기도 했고요.”
이어지는 내 질문에 차분한 어조로 대꾸한 지선일이 거래 방식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첫 순서는 사전에 익명 메신저를 통해 들불의 새 관리자와 접촉한 뒤 자신의 정보를 넘기고 대기 번호를 받는 것이었다. 이후 거래자는 관리자가 물건을 넘겨도 적합한 상대인지 판단을 마칠 때까지 대기해야 했다.
“하지만 물건이 준비된다고 해서 바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전달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무슨 종이에다 거래자 서명을 받더라고요.”
“비밀 유지 각서 같은 걸 쓰는 건가?”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생각보다 효력이 강력한 건지 그 단계에서 겁을 먹고 도망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거든요.”
들으면 들을수록 어이가 없어지더니 문득 헛숨이 터져 나왔다. 떨떠름한 심정을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내던 나는 길게 탄식하면서 되물었다.
“마지막 단계에서 거래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속출한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조건이 숨겨져 있다는 의미겠지. 그런 생각은 어른이 아니면 할 수 없었을 것 같은데. 거래를 주도하는 관리자에 대한 것도 알아봤어?”
그 말을 들으면서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문제혁이 입을 열었다.
“들불의 새로운 관리자는 정신계 스킬을 구사하는 여학생인 것 같아. 그리고 항상 같이 다니면서 거래를 돕는 또 다른 조력자도 여학생이고 흙 속성이래. 둘 다 5학년이야.”
“5학년밖에 안 된 애들이 그런 짓을 벌였다고?”
“응, 그것 말고도 크고 작은 사고를 많이 쳐서 학교 분위기가 여러모로 뒤숭숭해. 다다음 주 정도에는 이사장도 새로 부임한다던데. 아무튼, 다른 건 몰라도 식중독 사건은 두 사람이 스킬을 사용해서 벌인 일 같아.”
팔짱을 끼운 채 비스듬한 자세로 서서 문제혁의 말을 듣던 나는 눈을 감으면서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면서 그들의 행적을 머릿속에 상상해 보고 있으니 나를 지켜보고 있던 지선일이 입을 열었다.
“관리자가 환각을 일으켜서 식당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정신을 조종하는 사이에 조력자가 손을 쓴 것 같아요. 추측이기는 한데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사람들의 정신을 멋대로 조종해서 원하는 목적에 이르게 한다. 곱씹을수록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사실 오늘 선배들을 만나서 얘기하고 싶었던 건 따로 있었어요.”
“뭔데?”
“그 조력자 역할을 하는 학생에 관한 거예요. 걔가 우리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지 저한테만 몰래 신호를 보냈더라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지금까지 들은 내용을 토대로 거래자가 마지막으로 서명한 종이에 적힌 사항을 가늠해 보던 나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이어서 눈을 마주친 지선일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