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60
160화. 또 다른 소실점 (3)
“신호? 무슨 신호?”
나의 질문에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지선일은 무언가를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쳤다.
“시작은 이 씨앗이었어요.”
그녀의 펼친 손바닥 안에 놓여 있는 건 손가락 두어 마디 크기의 씨앗이었다. 희고 가느다란 털이 송송 난 짙은 녹색의 씨앗은 시중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크고 단단해 보였다.
“씨앗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일주일 전부터였어요. 이걸 처음 발견한 건 책상 서랍에서였고요.”
나는 지선일의 얘기를 귀담아들으며 씨앗을 살펴봤다. 바람에 일렁이는 잔털을 보고 있으니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우연인가 싶었는데 아니었어요. 서랍에서 이걸 발견하고 치우니 바로 다음 날에는 사물함에서 다른 씨앗이 나왔거든요. 또 다른 날에는 누가 눈앞에서 이걸 흘리고 가기도 하고. 그것 말고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씨앗을 전달받았어요.”
그렇게 말한 지선일은 들고 있던 씨앗을 문제혁에게 넘긴 뒤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같은 모양의 씨앗을 연달아 꺼내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끝없이 나타나는 씨앗을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네.”
“네, 한두 개만 있을 때는 누가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는데 이만큼 쌓이니까 뭔가 이상하더라고요.”
지선일은 이어서 주머니에 가득 채웠던 씨앗을 문제혁의 손아귀에 차곡차곡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사실 난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오목하게 구부린 두 손을 모은 채로 가만히 서 있던 문제혁이 말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힐긋거리던 지선일은 마침내 씨앗을 다 꺼낸 뒤 나를 돌아보았다.
“참고로 씨앗에 독성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럼 이게 뭔가 싶어서 사진으로 검색해 봤는데 아무것도 안 나왔어요. 고민하다가 미솔 선배한테 사진을 찍어서 보여 주니까 평범한 씨앗이 아닌 걸 바로 알아채더라고요.”
“평범한 씨앗이 아니라면 이것도 스킬로 만든 건가? 그 조력자가 흙 속성이라고 했었지?”
나의 질문에 지선일은 고개를 끄덕인 뒤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윽고 문제혁의 손아귀에 한가득 쌓여 있던 씨앗들이 순식간에 작은 크기의 쪽지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락―
작은 종이가 서로 마찰하면서 뒤섞이는 소리에 순간 멈칫한 나는 문제혁의 손아귀에 가득 쌓여 있던 쪽지 중에서 가장 위에 있는 것을 건드려 보았다.
“이렇게까지 할 정도면 그쪽에서 너희를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나 보네.”
“선배들 졸업하기 직전까지 저희가 벌인 일들을 생각해 봐요. 7학년 올라오니까 예전에 수상한 짓을 했던 애들은 다 우리를 피해 다니더라고요. 아무튼, 순서대로 정리해 둔 거니까 하나씩 읽어 보세요.”
덤덤한 어조로 덧붙이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문제혁의 손아귀에 쌓여 있던 쪽지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펼쳐 보았다.
[시작은 12월] [오늘 조퇴한 사람들은 알약 복용 세 달차] [거래 간격 불규칙] [거래 대상 물색 기준 E, F급 각성자 우선] [신체 능력 향상 및 각성자 등급 상승 효과] [거래 성사 직전 비밀 서류에 서명해야만 물건 수령 가능] [섭취 직후 시야가 붉게 변하면서 극심한 어지러움 호소]쪽지를 하나씩 펼쳐 읽을 때마다 퍼즐처럼 조각난 말들이 눈에 들어왔다. 급하게 적어서 보낸 건지 필체는 반쯤 기울어져 있었다.
“시작은 12월이라는 건 거래가 그때부터 시작됐다는 것 같은데. 알약 복용 세 달차는 부작용이 제일 거세지는 시점을 가리키는 건가? 다른 건 해석이 필요 없으니 일단 넘어가고……. 시야가 붉게 변한다는 건 뭐야?”
어느새 손아귀 한쪽에 가득 모인 쪽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힘껏 쥐면서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러자 문제혁이 자신의 손아귀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두 개의 쪽지를 눈짓했다.
“이것까지 읽어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나는 사뭇 진지해 보이는 문제혁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마지막으로 남은 쪽지를 하나씩 펼쳐 보았다.
[통칭 레드 문] [도와주세요 S47821]두 개의 쪽지에 적혀 있는 글씨 또한 빠르게 휘갈긴 건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간결하게 적힌 활자에서 오랫동안 시선을 거두지 못하던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도와 달라는 말 뒤에 적힌 건 뭐지. 암호인가?”
“아뇨. 암호는 아니었고 익명 메신저 아이디였어요. 그게 아이디였다는 걸 알아채고 메시지를 보낸 게 이틀 전이고요.”
“답장은 받았어?”
지선일은 대답하는 대신 휴대전화를 꺼내 채팅방 화면을 보여 주었다. 메신저의 계정은 남아 있었으나 상대는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쪽에서도 조력자가 움직였다는 걸 눈치챘나 보네. 그건 그렇고 문자로 했던 얘기는 뭐야? 준희가 이 일에 엮여 있을 수도 있다며.”
고개를 반쯤 수그린 채 화면을 들여다보던 나는 고개를 내저은 뒤 화두를 돌렸다.
“그 부분은 내가 얘기할게. 들불이 개편을 시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파고들어 보니까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금방 찾을 수 있었어. 개편하는 과정에서 운영 방식을 완전히 수정한 것 같더라. 등급이 낮은 사람을 위주로 포섭하고, 시범 운영을 진행하고. 그런 걸 보면 이번에는 범람을 따라 하려는 것 같더라.”
되묻는 말에 대답한 건 문제혁이었다. 그동안 지선일은 그가 들고 있던 쪽지를 거둬 주머니에 수납했다.
“거래자도 대부분 거기서 포섭한 것 같아. 사실 그것까지 알았을 때는 설마, 하는 생각만 하고 크게 의심하진 않았거든. 내가 확신하게 된 건 다른 부분에서야.”
그즈음에서 잠시 말을 멈춘 문제혁은 주위를 크게 둘러보았다. 공원 근처는 여전히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거래자들을 포섭해서 레드 문이라는 알약에 어떤 효력이 있는지 설명할 때 새로운 관리자가 항상 하던 말이 있었대.”
“뭐라고 하는데?”
“이 약을 자기한테 공급해 준 사람도 그 약을 먹고 효과를 봤다고 한대. 입학할 때는 D급이었는데 6학년 현장 실습부터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능력이 향상하기 시작하다가 졸업하기 직전에 B급으로 졸업했다고.”
그건 그냥 내 얘기 아닌가? 그 말을 듣던 나는 헛웃음을 지으면서 허리춤을 손으로 짚고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거래자는 대부분 헌터 아카데미 학생들이고 간혹 외부 사람들도 섞여 있대. 학생들 중에서 제일 어린 건 4학년이라고 했어. 그래서 그런지 그 얘기를 듣고 형 이름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관리자가 그건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대.”
“누가 들어도 내 얘기인데 아니라고 부인하는 건 또 뭐야. 어이없네.”
자취를 감춘 뒤로 한동안 소식이 없더니 이렇게까지 요란하게 등장할 줄이야. 생각지도 못하게 사칭을 당한 기분인 터라 가슴이 답답해졌다.
“저도 같은 심정이에요. 저렇게 말한 게 준희 선배가 아니고 웬 미친놈일 수도 있어서 파고들어 봤거든요. 그 약을 지급한 사람이 바람 속성이라는 얘기까지 듣고 확신했어요.”
지선일이 말을 보태는 순간 강준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일말의 기대가 헛웃음과 함께 사라졌다. 불법 마석 가공물은 한국마력연구소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그 물건을 지금 강준희가 맡고 있다면 그 또한 연구소와 연관이 있다는 방증일 테다.
혹시 강효서 선배가 그렇게 되고 나서 그 빈자리를 강준희가 채운 건가?
지금까지 들었던 이야기를 되짚어 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질문이 떠올랐다. 연이어 꼬리를 무는 질문을 따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조력자가 두 사람과 접촉했다는 걸 관리자와 강준희가 눈치챘다면 조만간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비밀을 함부로 새어 나가게 만든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까.
더불어 한국마력연구소가 이번 사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실마리를 좀 더 찾아내려면 미래를 내다보는 게 좋을 터였다.
“알아보느라 고생했어. 잠깐 앉아서 쉬고 있을래?”
입속에 맴도는 많은 말은 삼킨 뒤 두 사람의 어깨를 차례로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서로를 잠시 바라보던 그들은 순순히 벤치로 향해 착석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헌터 아카데미를 바라보았다. 이어서 이곳과의 거리를 간략하게 계산한 뒤 눈을 감고 스킬을 시전했다.
[사용자가 지정한 ‘천리안’ 스킬이 발동됩니다.]그 순간 공원을 가득 메우던 바람이 걷히면서 손아귀 안쪽이 간지러워지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시간의 행렬을 역행하는 바람결을 따라 오감이 열리면서 미래에 벌어질 일들이 불규칙적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도해 길드 사무실.
며칠 뒤에 예정된 던전 공략 일정과 관련하여 전략 회의를 마친 백이현은 조심스럽게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문간을 넘어서기 직전 돌아본 김미솔 팀장은 다른 헌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겨 비상구에 다다른 백이현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은은한 초록색 조명이 대리석 바닥에 물든 것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으니 맞은편에서 누군가 대답했다.
“네, 저예요.”
―그쪽 분위기는 좀 어때?
백이현과 전화를 연결한 건 지금쯤 파주에 있을 안지유였다. 간략한 인사를 건넨 그녀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섰다.
“겉보기에는 잠잠해요. 간부들 대부분이 태연한 걸 보면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는 소수만 움직이는 것 같았어요.”
―며칠 전에 사무실에 아직 학교에 남은 두 사람이 다녀갔다고 했었지?
“네, 그 이후로는 잠잠해요. 거래자 옆에서 도와주던 애는 어떻게 됐어요?”
어둑한 복도 구석에서 문간을 돌아보던 백이현이 물었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짙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 사람들도 연락이 안 되는 것 같아. 도해 길드 사람들은 얼마나 알아냈을까? 우리보다 많은 걸 알고 있으려나?
“저희도 선배한테 내용 전달받고 움직인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쪽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나저나 이건 그냥 저 혼자 하는 생각인데요…….”
이윽고 백이현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머릿속으로 안지유와 자신이 머무는 거처에 있을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사태를 관조하는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확실히 그때 있었던 일이랑 비슷한 것 같지? 선배가 이 일에 관여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래서일 거야. ……는 아직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오히려 담담해 보였어.
휴대전화 너머의 안지유가 누군가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비상구의 문이 열렸다. 육중한 문이 열리면서 내는 소음에 그 이름이 흐릿하게 들렸으나 백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뒤 통화를 마친 백이현은 벽면에 등을 기대고 상념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내저은 그는 이내 시간을 확인한 뒤 다시 회의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전신을 부드럽게 휘감았던 바람이 걷히는 감각을 따라 느릿하게 눈을 떴다. 숨을 고르면서 직전까지 보았던 미래의 장면들을 곱씹고 있을 즈음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 왔어. 얘기는 어디까지 나눴어?”
목소리를 따라서 반사적으로 돌아본 곳에는 서애란이 서 있었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있던 문제혁과 지선일과 먼저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확신했다.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서애란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