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61
161화. 또 다른 소실점 (4)
“어땠어?”
그때 벤치에 있던 두 사람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서애란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녀에게 눈인사를 건네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 나갔다.
던전 밖에서 천리안 스킬을 시전했을 때의 한계점은 명확했다. 현실 세계와 완전히 구분된 공간인 던전에서는 사소한 디테일까지 파악할 수 있었으나 현실 세계에선 디테일까지 확인하기엔 나의 스킬과 마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천리안으로 모든 전말을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무조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 이미 정해진 미래의 일과 같은 부분은 내가 보았던 장면들에서 읽을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조합하면 알아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어날 일들은…….
그즈음에서 정리를 마치고 짧은 한숨을 내쉰 나는 세 사람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새로운 이사장 자리에 앉게 되는 건 에덴 길드의 부길드장인 A급 전태무 헌터일 듯한데. 다들 알고 있었어?”
나의 말에 지선일이 가까이 다가와 대답했다. 그녀는 금세 심각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몰랐어요. 길드에 소속되어 있던 헌터를 이사장으로 세운다니. 그거 진짜예요?”
이어지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전태무와 얽힌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전생에서 B급으로 각성하여 소속 없이 활동하던 그는 에덴 길드에서 입적한 지 얼마 되지 즈음 A급으로 성장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에덴 길드의 부길드장의 자리를 꿰찼었다.
또한 전태무는 권력을 향한 욕심이 상당한 인물이었다. 그는 전생에서 총선이 진행된 뒤로 에덴 길드의 마스터가 급격히 노쇠해지면서 주해나와 함께 후대 마스터 자리를 두고 경쟁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자주 왕래했던 주해나를 돕기 위해 스킬을 사용하여 전태무의 약점을 알아내 전달했고, 그녀는 답례로 이능청에 대적하려는 목적으로 연합했던 길드 세력의 약점을 제공했다.
나는 그녀에게 받은 정보를 이능청장이었던 차진명에게 곧바로 넘겼다. 그때부터 차진명은 주해나를 통해 얻은 정보를 토대로 길드 연합 세력의 행보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주해나는 전태무를 무너뜨린 뒤 에덴 길드의 마스터의 자리를 차지했다.
차진명이 성물을 사용하여 제 뜻에 반발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처리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주해나가 마스터 직위를 차지한 이후로 에덴 길드 내에서 전태무의 입지는 순식간에 추락해 버렸다. 이번 생에서도 그 흐름은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나는 다소간 당황스러워졌다.
차정주는 전태무를 이사장 자리에 앉히기 위해 어떤 조건을 제시했을까. 마스터 직분을 향한 집착이 누구보다 강한 전태무를 설득했다는 건 그것보다 더욱 만족스러워할 만한 조건을 차정주가 제시했다는 뜻일 텐데.
전생에서 전태무와 주해나가 고령이 되어 은퇴한 에덴 길드의 마스터 자리를 두고 다퉜던 일은 많은 이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언급되었다.
하지만 전태무가 이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이번 생에서 벌어지지 않을 일이 되어 버린 이상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터였다. 전태무와 경쟁하지 않게 된 주해나는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이게 될까?
“그럼 그 조력자라는 애는 어떻게 되는 거야? 지금까지 한 얘기만 들으면 학교가 어수선해진 틈을 노려서 처리할 생각인 것 같은데.”
“나도 그런 줄 알았어. 그런데……. 일이 예상했던 방향이랑 전혀 다르게 흘러갈 것 같아.”
스킬을 통해 내다본 미래에 따르면 지선일과 문제혁이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 벌어졌던 식중독 사태와 그 외의 일들은 일종의 전조 증상 혹은 경고였다. 새로운 관리자의 배후 세력은 그보다 더한 일을 벌일 수 있는 힘이 있었고, 천천히 준비 중이었다.
앞으로 그들이 벌이게 될 일을 파악하려면 한국마력연구소 근처에 접근하여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이상적일 터였다. 그곳에 가면 사라진 강준희가 차진명과 어떤 관계로 얽혀 있는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쉽지만 그건 당장 실행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차진명은 천리안 스킬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고, 그동안 나와 동료들이 게이트 사고를 수습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스킬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쯤 차진명은 끝끝내 포섭당하지 않은 나의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과거의 서애란와 정건후를 처리했던 것처럼 나를 제거하기 위한 또 다른 실험을 계획 중일 수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한국마력연구소 근처에 접근하는 건 차진명이 만든 덫에 스스로 들어가는 것과 진배없었다. 내가 그곳으로 향하면 그들은 어떻게든 나를 찾아내 처리하려 들 가능성이 농후했다.
나는 지금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하게 덤빌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한국마력연구소에 직접 접근하여 진실을 파헤치는 건 추후의 일로 보류하고 이 상황에 걸맞는 계획을 구상하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다.
그즈음에서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린 나는 시선을 틀고 서애란을 바라보았다. 내가 보았던 무수한 미래의 가능성 중에서 이번 작전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는 건 오직 서애란뿐이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러한 속내를 간파한 듯한 서애란이 툭 던지듯 말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그녀에게 선뜻 설명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말문을 여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사건은 중간고사가 끝나는 사월 말, 등급 측정 결과가 발표된 뒤 며칠 지나지 않아서 7층 필드에서 사고가 벌어질 거야. 그때 조력자를 구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거기서 일어난 일을 필드 내부의 시스템 오류로 발생한 단순 사고라고 생각하겠지. 마지막으로……. 이번 일은 다른 사람 없이 너 혼자서 맡아 줘야 해.”
설명을 경청하던 서애란은 눈꺼풀을 느릿하게 여닫으면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근처로 바람이 불면서 긴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할 수 있겠어?”
그녀는 되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반쯤 숙였다. 이내 귓가에서 쏟아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는 나머지 표정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잠잠히 기다리기를 택했다.
* * *
한참을 몽롱한 상태로 늘어져 있던 소녀가 손끝을 바르작거리며 깨어났다. 불현듯 눈을 뜬 그녀는 헛숨을 삼키면서 주먹을 힘껏 쥐었다가 펼쳤다.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자신이 기거하는 기숙사인 듯했다.
“네, 죄송합니다.”
소녀는 귓가에 닿는 익숙한 음성을 따라서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삼켰다. 그대로 손바닥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가 천천히 거둔 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내가 왜 여기서 눈을 뜬 거지? 나는 분명 도서관에 있었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시선만 틀어 맞은편 책상 앞에 앉은 관리자를 바라보았다. 관리자는 자신의 룸메이트 대신 그 자리에 앉아 누군가와 통화 중인 듯했다.
“요즘 계약서 서명 단계에서 거래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요. 부작용이 시작된 뒤로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찾아오는 애들도 많고요. 그래도 정해진 인원을 채우는 데 문제없게 할게요. 가뜩이나 그쪽에서 눈치챈 것 같아서 정신없긴 하지만…….”
어느 순간 말끝을 흐린 관리자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휴대전화를 귓가에서 조금 떼어 냈다. 맞은편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분노를 쏟아 내면서 언성을 높이고 있는 듯했다.
“아, 입단속은 걱정하지 마세요. 처음 정보를 공개할 때부터 서약서로 받아 뒀으니 문제는 없을 거예요.”
책상에 팔꿈치를 얹은 채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지르던 관리자가 대답을 이어 나갔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곁눈으로 살핀 옆얼굴을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일단 재워 두기는 했는데 얼마 안 지나서 깨어날 것 같아요. 네, 새 이사장 오고 나서 이탈한 애들부터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하고 그다음에…….”
긴장된 나머지 온몸으로 식은땀을 흘리던 소녀는 관리자가 말을 멈추는 순간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이어서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선 관리자는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누워 있는 조력자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직 자고 있어요. 곧 일어날 것 같아요. 네, 다시 연락 드릴게요.”
그 말을 끝으로 통화를 종료한 관리자는 낮은 소리로 욕을 중얼거렸다. 관리자의 반응을 보니 방금까지 통화 중이던 건 그녀에게 약물을 전달하고 거래를 지시하는 사람인 듯했다.
탁―!
이윽고 그녀의 손아귀에 들려 있던 휴대전화를 어찌나 힘껏 쥐었는지 휴대전화가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잘난 것 하나 없는 새끼가 진짜…….”
그 소리에 다시 눈을 뜬 소녀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는 척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켰다.
“아, 일어났어?”
“무슨 일이야? 그나저나…….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아까는 분명 도서관이었는데. 그리고 룸메는 어디 가고 왜 네가 여기 있어?”
소녀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녀는 혼란을 감추기 위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면서 관리자의 시선을 피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도서관이라니. 너 오늘 도서관 간 적 없잖아. 룸메한테 오늘만 나가 있어 달라고 부탁한 것도 너였고.”
“너야말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그런 적 없어.”
관리자는 소녀의 반응을 의아하게 여기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환한 형광등 아래에 서 있는 관리자의 얼굴이 유난히 창백하게 질린 것처럼 보였다. 그와 대조되는 거뭇한 눈가를 마주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난 소녀는 다시 시선을 떨궜다.
‘이번에도 최면에 걸린 거야. 벌써 이게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네. 언제부터 이런 거였지? 지선일 선배한테 씨앗을 보낸 걸 들킨 다음부터였던 것 같은데…….’
소녀가 한참 동안 고개를 떨구고 있으니 맞은편에 서 있던 관리자가 한숨을 길게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기숙사 내부를 활보하던 관리자가 침대에 앉은 소녀의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너 요즘 자꾸 이상하게 구는 거 약을 안 먹어서 그런 거야. 이것만 먹으면 너도 괜찮아질 거야. 자꾸 거절하지 말고 먹어 봐. 어?”
손아귀에 흰 약통을 쥔 관리자는 소녀의 무릎을 힘껏 쥐고서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소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싫, 싫어. 앞으로 조용히 있을게. 조용히 있을 테니까, 제발.”
겁에 질려 떨리는 시선을 무시한 관리자는 검푸른 빛이 감도는 약을 두 알 꺼내 손바닥에 내려놓았다.
“이것만 먹으면 네가 지선일 선배한테 뭘 까발렸든 다 용서해 준다고 했잖아. 쉬운 길이 있다고 몇 번씩 알려 줬는데도 나만 나쁜 사람 만들면 정말…….”
그즈음에서 말끝을 흐린 관리자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두 사람 주위로 얕은 바람이 불면서 소녀의 움직임이 잠잠해졌다.
“곤란해.”
나지막한 소리로 덧붙인 관리자는 소녀에게 약을 건넸다. 초점이 흐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소녀는 그 약을 받아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