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63
163화. 또 다른 소실점 (6)
김미솔과 대화를 나눴던 날 이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 사월의 중순에 접어들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화두 중 하나는 이유나에 관한 것이었다.
빼곡하게 설계한 일정을 따라 오늘도 설연호와 함께 던전 공략을 마치고 나온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길드 사무실로 복귀했다. 행색을 말끔하게 정리한 뒤 책상 앞에 앉아 숨을 고르면서 그녀의 이름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김미솔에 의하면 서애란과 이유나는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급속도로 친해졌다고 했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뒤 강효서가 서애란에게 접근하게 되면서 그 두 사람의 사이는 조금씩 틀어졌다고 한다.
그다음의 일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다. 강효서를 따라서 크고 작은 악행을 일삼는 서애란을 더는 견디지 못하게 된 이유나는 그 모든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뒤에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서애란의 말에 따르면 차진명이 그녀의 잘못을 덮어 주기 위해 9층 필드의 사고를 계획했고 이유나는 그들에 의해 크게 다치고 말았다.
이유나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던 김미솔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녀가 동아리에 들어오려는 서애란을 어째서 마다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고 그때 네가 결정한 사안에 굳이 반기를 들고 싶지 않아서 계속 같이 지내고 있지만, 가끔 기분이 이상해질 때가 있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으면서 과거의 애란이는 왜 그렇게까지 모질었나 싶기도 하고.’
문득 귓가에 맴도는 김미솔의 목소리를 따라 스스로 질문해 보았다. 그때의 서애란은 그리고 전생의 나는 왜 그렇게도 모질었을까. 되돌아가서 바로잡을 수 없는 과거에 대고 묻고 있으니 공연히 심란해졌다.
당장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에 매몰되어 있지 말자.
고개를 저으면서 자세를 가다듬은 뒤 백이현의 이름을 떠올렸다. 김미솔을 마주한 자리에서 그의 근황을 확인해 보니 다행히 잘 지내는 듯했다.
팀으로 진행하는 던전 공략에도 성실하게 임했고 다른 헌터들과의 관계들 또한 나쁘지 않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그럼에도 한 가지 걸리는 건 조력자가 얽힌 사고가 발생하는 날 백이현이 헌터 아카데미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그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낯선 인물이 함께하고 있었다.
혹여 미래의 장면이 빠르게 흘러가는 나머지 안지유를 알아보지 못한 건가 싶어 재차 확인해 보았으나 그녀는 그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그 사실까지 고려해서 생각해 본다면 백이현과 동행한 인물 또한 익명의 후원자 세력에 속했을지도 몰랐다.
지잉―
그때 근처에 놓여 있던 휴대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뒤집어 확인해 보니 발신자는 문제혁이었다.
“수업이 벌써 끝났나.”
손바닥으로 버석한 눈가를 짚어 지압하던 나는 그의 전화를 받았다.
“어, 제혁아. 무슨 일이야?”
―응, 바로 받네. 형한테 얘기할 게 좀 있어서.
이어서 휴대전화 너머의 문제혁은 차분하게 자신의 용건을 전달했다. 지난달에 내가 예측했던 대로 새로운 이사장으로 부임한 에덴 길드의 전태무는 위임 직후부터 지금까지 학교를 휘젓고 다닌다고 했다.
―새로운 이사장이 얼마 전에 상위권 학생들 위주로 꾸린 특별반을 만든다고 했어. 이관부랑 한마연에 입사하는 학생들을 지금보다 더 많이 늘리는 게 목적이래. 선생님들끼리 누구를 넣을지 상의하고 있다고 하더라. 아마 선일이도 거기에 추천되지 않을까 싶어.
그럼 그렇지. 지선일은 전생에서도 조기 졸업을 권유받았던 수재였으니까. 그것과 별개로 이때까지 없던 특별반을 굳이 만든다고 생각하니 당황스러워졌다. 설마 이것도 차정주의 지시였던 걸까?
―선일이는 원하지 않는 눈치이기는 한데, 그 반 담임이 좋은 기회라면서 계속 떠미나 봐. 그러면서 특별반에 들어가면 뭐가 좋냐는 식으로 얘기하던 와중에 선일이네 담임이 조만간 설명회를 열 거라고 했대.
“뭐 그런 쓸데없는 짓을…….”
―새 이사장이 무슨 일이든 과감하게 키우는 스타일인 것 같더라. 아무튼, 이관부 취직이랑 관련해서 강의해 줄 사람으로 형이랑 같은 해에 졸업한 정미진 헌터를 데려올 거라고 했대. 혹시 형도 알고 있어?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을 빠르게 회전시켜 보았다. 그러다 보니 회귀 직후 처음 맞이한 방학식에서 그녀를 마주치고 조금 당황스러워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이번 생에서도 이능단속‧관리본부에 입사한 그녀는 지금쯤 내부에서 자리를 잡고 있을 터였다.
―예전에 선배들끼리 얘기하다가 얼핏 들은 건데, 길드의 규모를 늘리는 것만큼 이관부 내부 사람들이랑 가깝게 지내면서 소식을 주고받는 것도 중요하다면서.
“그렇지.”
이능단속‧관리본부 내에 아는 인맥을 만들어 두라는 건 오래전부터 인지하고 있던 조언이었으나 실행으로 옮기는 건 쉽지 않았다.
나의 대답을 듣고 이것저것 묻던 문제혁은 지선일을 통해 정미진과 접촉해 보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정미진은 후배 양성에도 관심이 많았었다. 아마 지선일이라면 그녀와 수월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을 터였다.
―이관부 쪽에 우리 편을 만들어 두기도 전에 척을 진 게 생각나서 말해 본 거야. 형만 괜찮다고 하면 선일이한테 말해 놓을게.
문제혁은 평소와 비슷한 어조로 염려스럽게 전하고 있었으나 괜히 허점을 찔린 듯한 기분에 헛기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 이제 도서관 가야 해서 끊을게. 형도 오늘 이브 호텔인가? 거기 간다고 했었지?
“응, 맞아.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나중에 또 통화하자.”
그 말을 끝으로 문제혁과의 통화를 종료했다. 시간을 확인하면서 남은 연락을 살펴보니 에덴 길드 측에서 두어 시간 뒤 사무실 앞으로 차량을 대기시켜 놓을 거라는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그 말도 안 되는 간담회가 벌써 오늘이라니.”
한동안 던전 공략 일정에 매진하느라 마음의 준비를 마칠 여력도 없이 시간이 흘러 버렸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남은 시간을 계산한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거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약속했던 시간에 이르러 에덴 길드의 소유로 보이는 차량에 탑승한 나는 편안한 자세로 차창 너머를 내다보았다. 쉼 없이 흘러가는 바깥 풍경에서 시선을 조금 높이자 맑은 하늘에 떠오른 보름달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뒤 손가락 마디만큼 열린 창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질 즈음 호텔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심 한가운데 우뚝 선 호텔은 멀리서도 이목을 이끌기 충분했다,
차츰 가까워지는 호텔의 벽면을 바라보고 있으니 일정한 간격마다 음각으로 깎아지른 벽면이 눈에 띄었다. 특히 건물 상단에 설치된 조명을 따라 환한 불빛이 굽이치며 내리는 듯한 효과를 자아내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이윽고 호텔 부지로 들어선 차량이 부드럽게 정차했다. 묵묵히 운전하던 기사는 나를 돌아보면서 고개를 숙였다.
“도착했습니다.”
기사를 향해 가볍게 목례한 나는 차량에서 내린 뒤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투명한 회전문을 넘어서는 순간 환한 길이 열리면서 근처에서 대기하던 누군가 가까이 다가왔다.
“도해 길드의 도해월 마스터님, 반갑습니다. 지금부터 안내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정장 차림의 여성이 나와 시선을 맞추면서 인사를 건넸다. 이어서 들고 있던 초대장을 건넨 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서 적색 카펫을 가로질러 나아가기 시작했다.
제법 긴 기로를 걷는 동안 곁눈으로 살펴본 여성은 몸가짐으로 볼 때 단순한 경호 인력이 아닌 에덴 길드 소속 헌터인 듯했다. 그녀는 나와 인사하던 순간 이후로 시선을 일절 마주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내디뎠다.
평소보다 번듯하게 차려입은 채로 낯선 공간을 걷던 나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전생에서도 총사령관으로서 이런 종류의 교류 행사에 여러 번 참석했었기에 이런 자리가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 당시 헌터 특수 정예 부대는 이능청의 입지를 단숨에 설명할 수 있는 일종의 상징처럼 기능했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차진명은 자신이 반드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행사마다 나를 경호처럼 대동하기도 했었다.
지나간 시절의 기억을 뇌리에서 거두고자 숨을 고르고 있으니 낯선 이들의 향기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친 듯 수많은 향기가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그러다 문득 한참 전에 머물렀다 사라진 듯 흐릿하게 남은 잔향이 스쳐 지나갔다. 그 향기가 호흡에 섞이는 순간 잊고 지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향수 취향은 여전한가 보네.
무의식적으로 조소를 띄우던 나는 여성의 안내를 따라서 연회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서자마자 눈에 담긴 건 검게 물든 배경과 그 공간을 가득 채운 투명한 유리 장식들이었다. 뒤이어 고개를 조금 젖히자 거대한 크기의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이 호텔도 크게 다를 건 없어 보이고.
“간담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비스듬하게 서 있으니 곁에서 나를 지켜보던 여성이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녀에게 눈인사를 전한 뒤 안쪽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입구 근처부터 드넓은 공간의 가장 안쪽에 놓인 무대 근처까지 살피고 있으니 익숙한 인영이 연이어 눈에 들어왔다. 사전에 고예성을 통해 알아본 정보를 토대로 이름과 얼굴을 대조해 보니 각각 길드에 관한 특이 사항까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나저나 이번 간담회는 용산구 소재의 길드들만 초대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여기 와서 보니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은데.
의아해하며 고개를 반쯤 기울이고 있으니 멀리서 낯선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쪽으로 몸을 틀고 살펴보자 한참 전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던 듯한 누군가 종종거리며 다가왔다.
“혹시 도해 길드의 도해월 마스터이신가요? 아, 맞으시구나. 이렇게 뵙게 되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꼭 한번 뵙고 싶었거든요.”
나는 맞은편에서 조잘거리는 남성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머릿속에서 매치된 정보에 따르면 그는 우리 길드보다 규모가 작은 길드의 마스터인 듯했다.
“네, 반갑습니다.”
간단한 인사말을 시작으로 눈앞의 남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근처에서부터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저마다 명함을 내밀거나 악수를 청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다 보니 내 주위로 작은 소란이 불거졌다. 그들은 우리 길드의 지난 행적을 언급하면서 감탄하거나 비법을 묻는 등 여러 가지 화두를 던지면서 대화를 주도했다.
“그나저나 도해월 마스터를 뵙게 되면 꼭 묻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다. 떠도는 소문으로는 얼마 전에 검찰청에서 사망한 강효서 헌터와 생전에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하던데……. 아, 이거 혹시 제가 너무 난처한 질문을 드린 걸까요?”
“예? 아무리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 그런 질문은 좀…….”
“그러게나 말이에요.”
어째서 사람 많은 곳에만 가면 꼭 헛소리하는 놈이 하나둘씩 따라붙는 것 같지. 헌터 아카데미에 재학할 때부터 줄기차게 들러붙던 놈들과 비슷한 논조로 시비를 걸어 오는 말에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자연스레 대답을 회피하면서 한 걸음 물러서고 있을 즈음 누군가 내 곁으로 다가오면서 말을 걸었다.
“도해월 마스터, 여기 있었네요. 한참 찾았습니다.”
돌아본 곳에는 언제나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는 김수호가 서 있었다. 나는 구세주처럼 다가온 그를 바라보며 평소보다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