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66
166화. 또 다른 소실점 (9)
간담회를 마무리한 뒤에도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이 태산처럼 밀려왔다. 일찌감치 집무실로 출근해 잡다한 서류 결재를 마무리한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면서 눈을 감았다.
그날 저녁 지선일이 전해 왔던 소식과 새로운 작전에 관한 건 오후에 찾아오기로 했던 설연호와 마저 나눠 볼 생각이었다. 그 이후에는 고정인과의 만남도 예정되어 있었다.
짧은 휴식을 마치고 이어서 행한 일은 간담회 자리에서 받았던 명함을 책상 위에 일렬로 펼쳐 놓는 것이었다.
그것들을 트럼프 카드처럼 가지런하게 정렬한 뒤에는 길드의 이름과 행사장에서 보았던 이들의 얼굴을 매치해 보았다.
그날 나에게 명함을 건넨 이들은 대부분 우리 길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를 전부 수용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집은 첫 번째 명함은 영원 길드의 관계자가 주고 간 명함이었다. 영원 길드는 규모는 작은 편에 속하지만 헌터 아카데미의 졸업생을 위주로 수용하며 소속 헌터들에게 제공하는 복지가 훌륭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언젠가 나와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하게 될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
그것을 시작으로 나는 앞으로 우리와 협력할 수 있는 길드와 그렇지 못한 길드의 명함을 구분해 정리했다. 명함을 처리하는 기준은 전생의 그들이 보였던 행보를 토대로 삼았다.
특히 언젠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협력 관계를 철회하고 배신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은 빠르게 제외했다. 물론 성물을 사용한다면 훨씬 정확하고 빠르게 분류할 수 있었겠지만, 혹시 모를 가능성을 대비하여 많은 헌터가 모인 자리라 성물을 사용하지 않았다.
전생과 현재의 삶은 크고 작은 부분이 많이 달라졌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마주하게 되는 상황 또한 이때껏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과거의 그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무엇을 선택했는지 잘 살펴보면 꼭 성물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앞으로의 행보가 어떠할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명함을 계속 정리하면서 회귀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들을 바꿔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생에서 겪었던 일과 여전히 큰 줄기를 공유한 채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건 곧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어떤 생에서든 일관된 선택을 고집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들은 미래를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자신이 몸소 통과한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길어 올린 분별력으로 결정적인 선택을 내릴 확률이 더 높을 것이었다.
후자에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차진명이었다. 전생의 그가 어떤 이유로 세상을 멸망시켰는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으나 지금까지 수집한 정황에 따르면 이번 생에서도 그는 전생과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그리고 전생과 크게 다르지 않은 행보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건 주해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그녀의 명함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앞으로 그녀와 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에 무거운 바위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똑똑―
그녀가 남긴 명함 위에 손을 얹고 고민하고 있을 즈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시간을 확인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주해나의 명함을 뒤집어 놓았다.
“들어와.”
이어서 모습을 드러낸 건 예상대로 설연호였다. 그는 내가 권하는 자리에 앉으면서 가볍게 웃었다.
“간담회는 잘 다녀왔어? 거기 다녀온 사람들이 말하는 것 보면 주해나 헌터가 그날 부재한 마스터 역할을 거의 다 도맡았다고 하던데.”
설연호의 말을 들으면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눴던 순간의 기억은 며칠이 지난 지금도 가슴속에 답답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해소하기 위해 설연호에게 당시의 일을 설명하고 있으니 그의 표정 또한 사뭇 진지해지는 게 느껴졌다.
“주해나 헌터를 그날 처음 본다고 했다고? 둘이 아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의아한 듯 갸웃거리는 설연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허공을 응시했다. 맞은편 책상에 뒤집힌 채로 놓여 있을 명함을 힐긋거리면서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렇게 하는 게 서로한테 좋을 것 같아서. 던전 관리 권한 배부 심사가 마무리되면 결과를 두고 알게 모르게 얼굴 붉힐 일이 생길 수도 있을 테니까.”
“상대는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를 굳이 꺼내고 싶지 않은 건가 보네. 그럴 수도 있지.”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럽게 대꾸한 설연호가 파일철 위로 깍지 낀 손을 얹으면서 물었다.
“그건 그렇고 나한테 물어보고 싶다고 했던 건 뭐였어?”
그제야 허공에서 시선을 거둔 나는 잠시 입을 다문 채 머릿속으로 할 말을 골랐다. 침묵 끝에 입을 연 나는 가장 먼저 헌터 아카데미 내에서 학생들이 불법 마석 가공물을 암암리에 거래하고 있다는 사실과 거기 얽혀 있는 들불의 새로운 관리자와 그녀를 돕는 조력자에 관해서 언급했다.
“이때까지 조력자는 억지로 관리자 옆에 붙어 있기는 했지만, 관리자의 뜻대로 잘 따르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러다 조력자가 선일이한테 도움을 요청한 걸 관리자에게 들켰나 봐.”
거기까지 듣던 설연호는 탄식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지켜보면서 덩달아 한숨을 내쉬던 나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내가 내다보았던 미래에 의하면 사고가 발생하는 장소는 7층 필드였다. 관리자는 조력자와 함께 필드에 들어가 모의 던전 테스트를 실행한 뒤 그곳에서 스킬을 사용하여 조력자를 해칠 생각인 듯했다.
“음, 예전에도 9층 필드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잖아. 애란이가 거기 얽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아, 패턴이 그때랑 아주 흡사해. 선배 혹시 그때 이유나가 얼마나 다쳤었는지 기억나?”
그 질문을 듣던 설연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내 기억으로는 회복 물약이나 힐로는 해결이 안 될 만큼 크게 다쳤던 걸로 기억해. 전신 부상이었을 거야, 아마. 유독 크게 다쳤던 게 왼쪽 어깨라고 하는 것 같았어. 뼈가 다 으스러진 상태였다고 하던데.”
당시의 이유나의 부상 정도를 설명하던 설연호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겪었을 고통을 가늠해 보고 있으려니 나 역시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이유나가 바람 속성이기도 했고, 무기를 사용하는 대신 손으로 스킬의 흐름을 조종하던 학생이라 그 일이 있고 나서 이런저런 얘기가 많이 돌았던 걸로 기억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기 같이 들어갔던 사람들한테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리고 그때 애란이는…….”
“사고는 이유나의 부주의로 벌어진 거라고 하면서 도리어 험담하고 다녔었지. 강효서 선배가 시키는 거라면 뭐든 다 했던 것도 그때부터였고.”
설연호의 말을 묵묵히 듣던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에서 건져 올린 사실을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그때 그랬던 걸 생각하면 애란이도 참 많이 변했어. 아무튼, 그 사고를 어떻게 막을 생각인데?”
이어서 되묻는 설연호의 말을 듣던 나는 태블릿에 임시로 정리해 두었던 메모를 띄운 뒤 그에게 보여 주었다.
“사고의 주동자인 관리자는 눈치가 굉장히 빨라. 만약 모의 던전 테스트가 시작되기 직전에 직접 덮치려고 하면 어떤 식으로든 빠져나갈 거야. 그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조력자를 해칠 가능성도 높아 보였고.”
빼곡한 메모 위로 검지를 옮겨 가면서 설명하고 있으니 설연호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러니까 정인이를 통해서 필드 시스템을 해킹한 뒤에 모의 던전 테스트를 임의로 중단하고, 그 틈을 노려서 애란이를 모의 던전 안에 들여보내겠다는 거지? 뒷수습은 해월이 네가 하고.”
“정확해.”
“이론상으로는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애란이만 혼자 들여보내도 되는 거야? 불법 마석 가공물을 먹고 나서 생긴 부작용이 심각한 상태라면 등급이 낮은 편이라고 해도 둘 이상은 붙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설연호의 말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과거의 내가 스킬을 사용하여 강현욱이 가진 악의를 측정하던 순간 그가 품은 악의 속에 힘이 깃들어 있는 걸 느꼈었다.
만약 현재의 관리자가 그와 비슷한 상태라면 둘 이상의 인원이 중간에 투입되는 것이 안전할 터였다. 하지만…….
“모의 던전 테스트를 중단한 틈을 타서 잠겨 있던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는 일 자체가 워낙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이 들어가면 관리자도 금세 눈치채 버릴 거야.”
입술을 잘근거리면서 경청하던 설연호는 잠시 뒤 내 의견에 수긍한다는 듯 말을 보탰다.
“모의 던전을 실제 던전처럼 구현하기 위해서 엄청난 마력이 동원됐다는 걸 생각하면 중간에 문을 열고 들어간다는 발상 자체가 위험하기는 해. 무작정 뚫고 들어갔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 거라면 차라리 손이 제일 빠른 한 명을 투입하고 서둘러 끝내는 게 낫겠네.”
그 말을 끝으로 내부에 침묵이 이어졌다. 내가 내민 태블릿 화면을 계속 들여다보던 설연호는 마지막 메모까지 확인한 뒤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왜 하필 애란이야?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9층 필드에서 났던 사고가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았을 것 같아서. 비슷한 일을 다시 겪게 해도 괜찮을까?”
회귀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내가 가장 이루고 싶은 목표는 전생에서 보았던 참혹한 결말이 다시 반복되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으로 남은 일이 다른 사람에게서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서애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애란이는 그때 그 사고를 단 한 순간도 잊어 본 적이 없고, 아직도 매일 생각한다고 했어. 그때 벌어졌던 일을 이제라도 바로잡고 싶은 게 아니라면 끝까지 외면하고 다른 기억들로 삶을 채우면서 과거와 멀어졌겠지.”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경우를 모두 겪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서애란은 사고에 대해 전해 들은 순간부터 지금의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똑똑!
그때 누군가 경쾌한 소리로 문을 두드렸다. 문간을 돌아보니 들어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노트북을 품에 안고 들어선 고정인이 손을 흔들었다.
“다들 안녕. 시간 맞춰서 온 건데 아직 얘기 중이었나 보네? 들어가도 되지?”
“응, 들어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그러면 나도 슬슬 일어나야겠다. 나중에 봐.”
이번에도 대답을 듣기 전에 들어선 고정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설연호와 교차하며 테이블로 다가왔다. 나는 설연호가 앉았던 자리에 다시 착석하는 고정인을 보면서 물었다.
“어떻게 됐어? 가능할 것 같아?”
“7층 필드 중앙 제어 시스템 말하는 거지? 음, 시도해 본 적 없기는 한데 시간만 좀 있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작전 날짜는 정해졌어?”
고정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설연호가 들여다보던 태블릿을 자연스럽게 가져갔다. 그녀가 메모를 집중해서 살펴보는 동안 휴대전화를 들고 달력을 확인해 보았다. 7층 필드에서의 사고까지 나흘이 남은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