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70
170화. 몰이해의 시간 (2)
안지유의 뒤를 따라 입구를 지나치자 드넓은 공간의 생김새가 한눈에 들어왔다. 방금 통과한 입구를 기준으로 왼편에는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식당이 있었다. 오른편에는 로비와 함께 마련된 여가 공간이 눈에 띄었다.
로비 너머로 이어지는 복도 안쪽으로는 두 개의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맞은편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닫힌 문에는 ‘기도실’ 혹은 ‘휴게실’이라는 팻말이 부착되어 있었다.
도시 외곽에 세워진 이 건물은 한참 전에 교회의 수양관으로 쓰이던 공간 같았다. 전체적인 인테리어 또한 예스러운 구석이 있었으나 관리가 잘 되어 있는 편이었다. 쭉 살피고 있으니 불필요한 장식 없이 말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 구경했지? 이쪽에서 마저 얘기할까.”
입구 근처에 멈춘 채 한참을 둘러보던 내게 말을 붙인 건 안지유였다. 그녀는 로비 근처로 테이블과 일인용 소파가 띄엄띄엄 놓인 곳을 가리켰다.
나는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곁눈으로 백이현을 돌아보았다. 그는 안지유와 나를 번갈아 살피면서 무언가 이야기할 틈을 노리는 듯했다.
“봐서 알겠지만, 수상한 공간은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어? 구출한 학생은 휴식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때 백이현을 돌아보던 안지유가 말했다. 나는 그 두 사람의 이목을 자연스럽게 가져오면서 되물었다.
“수상하지 않다고 해서 무턱대고 학생을 넘길 순 없어. 이 건물은 무슨 용도로 쓰이는 건지, 백이현 헌터는 나를 왜 여기로 데려온 건지 그 이유부터 설명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한눈에 봐도 길드 사무실은 아닌 것 같지? 우리는 이 건물에서 오늘 구출한 학생처럼 불법 마석 가공물을 과복용해서 생긴 부작용을 앓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어.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로 여기에 머무는 사람들도 있고.”
오랜만에 만난 안지유는 평소처럼 매끄럽게 얘기하고 있었으나 단숨에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말이었다.
“사람들이 더 있다고? 전부 자발적으로 들어온 건가?”
“대부분 선배가 데려온 사람들이야. 이번 사고에서 구출한 학생을 여기로 데려오라고 말한 사람도 선배고. 아, 선배는 그러니까……. 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말하는 거야.”
나는 설명을 이어 나가는 안지유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선배라는 호칭을 언급할 때의 표정이나 어투를 통해 이들의 리더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왜 학생을 여기로 데려오려고 했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날 데려온 이유가 그게 다는 아닌 듯한데. 여기가 길드 사무실이 아니라면 무슨 명목으로 모여 있는 거지?”
이어서 묻고 있으니 안지유가 잠시 고민에 잠긴 듯 다문 입술을 늘렸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처럼 눈가를 미약하게 찡그렸다.
“음, 제일 중요한 것부터 대답하자면 여기는 길드가 아니고 몇 년 전부터 정식으로 운영 중인 비영리 재단이야. 여기에 너를 데리고 온 건 마침 오늘이 기회인 것 같아서 그랬어. 오래전부터 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거든.”
이윽고 나는 안지유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을 곱씹어 보았다. 방금 그녀가 언급한 사람은 이때까지 익명의 후원자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도운 인물일 것이었다.
“그 선배라는 사람을 말하는 거지?”
“맞아. 도해 길드 쪽으로 먼저 연락해 보는 방법도 생각해 봤는데,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그동안 미루고 있었어. 그러다 오늘 이현이랑 너희 동선이 겹쳤다는 소식을 듣고 이쪽으로 널 데리고 와 달라고 일부러 부탁한 거고.”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내가 이들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나는 그와 관련하여 달리 내색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구출한 학생을 도해 길드 사무실에 데려가면 금방 꼬리가 밟힐 것 같아서 여기로 데려오라고 한 것도 있어. 너희 길드는 이미 많이 커졌고, 보는 눈도 적지 않으니까. 네가 생각해도 사무실보다는 여기 있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지 않아?”
이어서 다시 생각해 보고 있으니 무작정 길드 사무실로 데려가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안정을 취하면서 사고의 전후 과정을 파악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 건물에 있으면 안전은 확실하게 보장되는 거지? 필요하면 치료도 제때 받을 수 있는 거고?”
“물론이지. 확실하게 하고 싶으면 이따 선배랑 같이 올라가서 확인해 봐. 만약을 대비해서 우리가 있는 아래층만 옛날 모습 그대로 두고, 위쪽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도록 진작 개조했거든.”
나는 마지막으로 안지유에게 확답을 받아 낸 뒤 이내 백이현에게 사람들을 데려와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 누나는 서애란 헌터랑 따로 얘기하고 올 거라고 했어. 구조한 학생은 홍원하 헌터가 데리고 있고. 다녀올게.”
안지유에게 바깥 상황을 간결하게 전달한 백이현이 나에게 눈인사를 건네면서 지나쳤다. 나는 그제야 안지유가 권한 자리에 앉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 건물은 언제부터 사용한 거야? 꽤 오래된 것 같은데.”
백이현을 보낸 뒤 한층 홀가분해진 얼굴로 맞은편에 착석한 안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연도까지는 나도 잘 몰라. 예전에 어느 목사 부부가 운영하던 수양관이었는데 그 두 사람이 게이트 사태에 휘말리는 바람에 영면하게 돼서 한동안 빈 건물이 그대로 있었대.”
그때 입구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면서 돌아본 곳에는 홍원하와 모의 던전에서 구출해 낸 조력자가 백이현의 안내를 따라 들어서고 있었다.
“여기 있으면 아무도 저 잡으러 안 오는 거 맞죠. 부모님은 외국에 계셔서 연락도 어렵고, 기숙사에 다시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너무 무서웠거든요. 그리고 또 학교에 두고 온 제 친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걔가 정말 저를 해치려고 한 게 맞아요?”
그동안 조력자로 불렸던 학생은 앞서 걷는 백이현을 향해 쉴 새 없이 말을 붙였다. 빠르고 급한 어조로 전하는 목소리에서 공포와 불안이 뒤엉켜 있었다.
“응, 여기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학교랑 관련한 것도 우리가 처리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일단 올라가서 쉴 수 있는 곳부터 마련해 줄게. 푹 쉬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
백이현은 불안한 듯 손을 떠는 학생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덜덜 떠는 학생은 가까이서 다시 보니 그저 어린 10대 소녀일 뿐이었다. 이어서 백이현은 나와 안지유가 앉은 쪽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지유는 그런 그에게 가볍게 끄덕여 보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복용한 지 몇 주밖에 안 된 것 같네.”
세 사람이 복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모습까지 지켜보던 안지유가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고개를 반쯤 기울이자 그녀가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온갖 케이스를 다 봤더니 이제는 한눈에 가늠이 되더라. 음, 그나저나 슬슬 내려올 때가 됐는데…….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소매를 걷고 시간을 확인하던 안지유가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윽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자 근처를 내다보니 여가 공간의 한쪽 벽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너머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으나 낯익은 형상이 금세 눈에 띄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온다던 서애란과 이유나인 듯했다.
* * *
한참을 묵묵하게 서 있던 서애란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느껴지는 곳은 짙푸른 빛깔로 코팅된 통유리 너머였다.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보이는 얼굴이던데. 해도 돼.”
그때 정면을 바라보면서 숨을 길게 내쉬던 이유나가 말했다. 서애란은 그녀를 돌아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는 이제 괜찮은 거야? 다른 곳은 어때?”
“괜찮아.”
이유나의 대답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짧고 간결했다. 수풀을 헤집으면서 밀려드는 바람을 따라 시선을 떨구던 서애란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오랫동안 궁금했어. 여기서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렇게 말하던 서애란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말아 쥐었다. 이유나는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는 채로 얼굴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걷어 내는 중이었다.
“내가 너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매일같이 생각했어. 그렇다고 해도 네가 그때 느낀 고통을 전부 이해하지 못하겠지. 너무 늦어 버렸지만 그래도 사과하고 싶어. 미안해.”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문 서애란이 헛숨을 삼켰다. 이후로 한참 침묵하던 이유나가 고개를 푹 숙인 서애란을 돌아보았다.
“그때 내가 겪었던 고통은 직접 느끼지 않는 이상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야. 어깨가 아니라 앞으로의 내 삶이 다 으스러진 것 같았으니까.”
그즈음에서 말을 아낀 이유나는 그간 자신이 통과했던 시간을 상기해 보았다. 그녀는 부상 직후부터 몇 년 동안 죽을 만큼 미운 사람조차 잊게 만드는 고통 속에 살았다. 세상에 고통과 자신만 남은 것 같은 참혹한 시간을 온몸으로 견뎌야만 했다.
“그때 그 일을 매일같이 생각한다고 했지. 그 상상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겠지만, 너는 내가 지나쳤던 모든 시간에 발치만큼도 닿을 수가 없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서애란을 바라보며 말하는 이유나의 목소리는 한없이 담담하고 매정했다.
“그래도 사과한 걸 모른 척하진 않을게. 이만 들어가자.”
마지막으로 전한 이유나가 서애란을 향해 허공을 손짓했다. 그녀는 서애란의 대답을 듣지 않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 * *
그로부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뒤 안지유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서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조금 늦어지는 듯하니 여기서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긴 뒤 모습을 감췄다.
혼자 남은 나는 일인용 소파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은 채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대로 생각에 잠겨 있으니 안지유가 언급한 선배라는 사람의 존재가 툭 걸렸다.
전생의 기억을 계속 되짚어 보았으나 선배라는 사람은 추정되는 존재는 딱히 없었다. 만약 그런 존재가 있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터였다.
그 사람도 안지유처럼 이번 생에서 다른 선택을 하게 된 사람인 걸까? 어떤 목적으로 우리를 도운 거지?
그렇게 묻고 있으니 일전에 안지유에게 들었던 설명이 떠올랐다. 그들이 이 공간을 자신들의 근거지로 택한 이유가 수많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재차 곱씹어 보았다.
효신 그룹의 비리를 전달받았을 때는 그저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사고가 발생할 걸 예측하고 조력자를 데려오라는 지시를 내린 걸 보면 불법 마석 가공물과 관련해서도 뭔가를 더 알고 있는 건가?
그때 입구 근처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돌아보니 앞서 들어서는 이유나와 서애란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숙인 채 걷는 서애란은 몰아치는 감정을 가다듬으려는 듯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서애란의 표정을 살펴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이 안지유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나는 자세를 곧게 세우면서 안지유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녀의 곁에는 검은 정장 재킷을 어깨에 걸친 낯선 여성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턱선을 스쳐 지나가는 짧은 단발머리의 여성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가 들었다. 한쪽 귓가에 넘긴 검은 머리칼을 따라 드러난 얼굴을 들여다보니 크고 선명한 눈매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실례지만 존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름만 들어서는 모를 겁니다. 음, 그렇다면 저를 어떻게 소개하는 게 좋을까요.”
이내 슬며시 웃음 짓던 그녀는 안지유를 곁눈으로 한차례 바라본 뒤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해 전 겨울, 인터넷에 성문 길드의 비리를 폭로한 B급 헌터를 기억하시나요?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가 성문 B급 헌터로 불린다고 하죠. 현선민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해 길드의 마스터 도해월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헛웃음이 번지고 말았다. 이내 그 기색을 가다듬으면서 그녀와 손을 맞잡았다. 성문의 B급 헌터를 이렇게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더욱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