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몰이해의 시간 (4)
눈앞에 부착된 붉은 실은 직선을 그리며 규칙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입술을 달싹이면서 시선을 떨궜던 나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면서 고민을 이어 나갔다.
“다 확인하셨죠?”
그때 곁에 있던 현선민이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두어 걸음 물러선 뒤 게시판을 한눈에 담아 보았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시판은 현선민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채워 넣은 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지도를 읽는 방법은 오로지 그녀만 알고 있을 터였다.
나는 그즈음에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접어 두고 현선민의 설명을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해석해 주는 대로 되짚다 보면 의문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었다.
잠시 뒤 현선민이 오른편의 커튼 자락을 걷으면서 가려져 있던 게시판 일부를 마저 내보였다. 새롭게 나타난 부분을 천천히 훑어 내려가니 불법 마석 가공물에 관해 정리한 자료들이 눈에 띄었다.
자료를 정리하는 방식은 왼편에 부착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전에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 접한 자료를 시발점으로 삼아 그와 관련되었거나 이후에 벌어진 일을 붉은 실로 이어 둔 것 같았다.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서너 걸음 물러나 게시판의 전체적인 그림을 담아 보고 있을 즈음 현선민이 다시 입을 뗐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금일 저녁 헌터 아카데미에 백이현 헌터와 이유나 헌터가 나타났던 이유 그리고 구출한 학생을 이곳까지 데려오겠다고 주장한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해 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선민의 말을 경청하던 나는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는 마저 말을 이어 나갔다.
“앞서 도해월 마스터와 함께 3층 병동에 방문한 뒤 그곳의 쓰임새를 상세하게 설명해 드린 이유 또한 짐작하셨을 테고요.”
그 말을 끝으로 현선민은 뒷짐을 진 자세 그대로 나를 돌아보았다. 방금 그녀가 건넨 질문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수수께끼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저 말들이 지금까지 우리를 도왔던 익명의 후원자의 의도를 얼마나 파악하고 있냐는 질문처럼 들렸다.
“이때까지 익명의 후원자라는 이름으로 저희를 도와주셨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후원이라는 명목에 걸맞게 저희 길드의 행보에 도움을 보태 주려는 의도였겠죠.”
그녀의 말대로 한참 짐작해 보았던 것이었던 만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말문을 맺으면서 짧게 숨을 고른 뒤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는 저희 길드가 현선민 헌터가 이끄는 재단과 뜻을 합쳐서 움직일 수 있을 만한 믿음직한 상대인지, 이 건물에서 보호하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알려도 될 만큼 안전한지 꾸준히 지켜보면서 몸소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역시 예리하시네요. 정확합니다.”
긴 이야기를 경청하던 현선민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반면 나로서는 어딘가 찝찝한 인상을 떨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지난 행적을 집요하게 읽혔다는 사실 때문인 듯했다.
구태여 이해를 자청한다면 신중하게 행동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흩뜨린 나는 그녀가 모아 둔 자료를 재차 훑어보았다.
다행히 뉴스 기사나 범람에 올라온 게시물 등 공개적인 곳에서 취득할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만약 길드 내에서 정보를 얻으려 했다면 백이현이 움직였겠지만, 지금껏 따로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달리 수상한 행적을 보이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저와 도해 길드의 행적을 이렇게까지 면밀하게 되밟아 왔고 그걸 저한테 보여 줄 수 있다는 건 현선민 헌터 또한 이 대화에 그만큼 투명하게 임할 자신이 있다는 거겠죠.”
애써 차분한 말투를 구사하고 있었으나 일전에 느낀 불쾌감을 쉽사리 거둘 수 없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던 것과 별개의 영역이었다.
“무엇을 바라고 이렇게까지 한 건지 저로서는 영영 이해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테니까요. 현선민 헌터가 저와 도해를 기만하려는 의도에서 일을 꾸민 게 아니라면 어째서 이토록 신중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저에게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면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곁에 서 있던 현선민은 그런 나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테이블을 가리켜 보였다.
“물론입니다. 얘기가 길어질 듯하니 우선 이쪽으로 안내할게요. 잠시 기다려 주시면 제가 예전에 성문 길드에서 사용하던 출입증과 헌터 라이센스를 가져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자리에 안내한 현선민은 자신이 평소에 사용하는 듯한 책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얼마 뒤 현선민이 과거에 자신이 사용했던 성문 길드 사무실 출입증과 헌터 라이센스를 내려놓으면서 맞은편에 착석했다.
“도해월 마스터의 존재를 처음 인지하게 되었을 때 저는 성문 길드 소속 헌터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눈앞에 놓인 출입증과 라이센스를 확인했다. 두어 해 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물건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당시 성문 길드에서 그녀가 맡았던 업무는 주요 직급이 수행할 만한 것들이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현선민은 몇 년 동안 성문 길드에서 대량으로 수집한 마석이 보관된 장소를 관리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렇게 수집된 마석들이 무기와 아티팩트를 만드는 등 정상적인 루트로 쓰이지 않는다는 정황 정도만 인지한 상태였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제가 맡은 업무 속에 평범한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부조리가 얽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한 건 커뮤니티 들불이 개설되고 난 뒤였어요. 효서가……. 아니, 정확히는 강효서 헌터가 그 커뮤니티의 관리자 자격으로 저와 소통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였습니다.”
나는 현선민이 강효서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가 강효서의 이름을 막역하게 부른 것은 한순간에 불과했으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의 깊이는 예사롭지 않은 듯했다.
“참고로 강효서 헌터와 저는 어릴 적부터 가깝게 지냈던 사이였어요. 아주 어렸을 때 효신 그룹이 운영하는 장학 재단의 후원을 받던 저를 강효서 헌터의 부친이 눈여겨보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꽤 긴 시간 동안 그쪽 집안과 왕래하며 지냈었죠.”
현선민은 의아해하는 나의 반응을 의식한 건지 곧바로 설명을 보충해 주었다. 성문의 비리를 폭로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강효서를 비롯한 효신의 사람들과 막역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했다.
“효신과 얽혀 있던 깊은 인연을 완전히 끊어 낸 건 성문 길드의 비리를 폭로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비리를 폭로한 뒤에는 오랫동안 준비했던 계획을 하나씩 진행하면서 재단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가꾸는 데 열중했어요.”
거기서부터 이어진 설명은 안지유에게서 들었던 것과 흡사한 것이었다. 이들 재단이 어떤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는지, 그들이 겪는 부작용은 무엇인지에 관한 설명을 듣던 나는 잠시 현선민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다시 게시판으로 향한 내 시선이 멈춘 곳은 이천 게이트 사고와 관련한 뉴스를 다룬 지점이었다.
그 중심에 부착된 것은 그날 하늘에 떠오른 무지개와 하단에 강효서의 사망 소식을 속보로 띄운 뉴스 화면이었다.
“이곳은 길드가 아닌 재단이고, 설립 목적 또한 대외적으로는 학술 재단이라고 되어 있는 만큼 활동에 있어서 이런저런 제약이 많았습니다. 특히 주가 조작 관련 정황을 제가 퍼뜨렸다고 의심 중인 효신 그룹의 눈을 피해서 움직이는 게 가장 어려웠어요. 도해 길드와 선뜻 접촉할 수 없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즈음에서 말을 잠시 멈춘 그녀가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틀었다. 그녀는 분명 강효서와 과거의 연이 닿아 있었다고 했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고 있던 뉴스 화면 스크랩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제가 먼 길을 달려오신 분을 앞에 두고 너무 긴 이야기를 늘어놓은 듯하네요. 조금 늦었지만, 차라도 한 잔 내어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게시판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현선민이 소리 없이 일어섰다. 이어서 그녀는 머리가 복잡해졌을 테니 천천히 생각해 보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 * *
“아까부터 가운데 붙어 있는 속보 화면을 계속 보고 계시네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던 현선민이 말했다. 이어서 그녀는 잠시 등을 돌리고 내가 바라보던 뉴스 속보의 스크랩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하필 저 화면에 떠오른 속보가 누군가의 사망 소식이라는 게 조금 걸리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장면인 만큼 남겨 두고 싶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강효서 헌터의 사망 원인이 정말 원인 불명의 심장마비였을까요?”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고개를 반쯤 기울였다. 그간 뒤를 밟아 왔으니 나와 강효서의 관계가 어떠한지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 와중에 이런 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제가 효신과 인연을 끊어 낸 건 그만한 이유가 있고, 과거가 어떠했든 저는 그들과 멀어지기를 택했어요. 지금도 그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진 않습니다. 도해월 마스터에게 묻는 것은 그저 도해의 정보 수집력을 높게 사고 있기 때문이에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말을 잇던 현선민은 찻잔을 나의 앞에 놓아 준 뒤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강효서 헌터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고 해서 그간 저지른 죄목을 옹호하거나 과거의 인연을 빌미로 안쓰러워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자세를 고쳐 앉은 그녀는 이때껏 내 시선이 향하고 있던 뉴스 속보 스크랩을 힐긋거렸다.
“그럼에도……. 강효서 헌터의 마지막을 누구도 살피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따금 생각하게 되네요. 참 모순적이죠?”
질문으로 끝맺었으나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심정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이번 생에서 내 의지와 별개로 끊어 내야 했던 과거의 인연이 있고, 역설적으로 그러한 이유로 따라붙는 복잡한 감정이 있었으니까.
그간 현선민이 보인 행적은 여전히 몰이해의 영역에 있었으나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는 순간 이곳을 채운 공기가 유연해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강효서 헌터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 제가 알고 있는 건 검찰이 발표한 공식 입장이 전부입니다.”
나는 눈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대답했다. 달그락거리는 소음을 따라서 시선을 옮기던 현선민은 선선히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앞서 나누던 이야기를 마저 해 보는 게 좋겠네요. 제 사정은 설명이 되었을 듯하니 이번에는 그간 무례를 범한 것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이어서 그녀는 나를 바라보면서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별다른 추궁 없이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지나온 시간과 얼마 전까지도 효신 그룹의 의심을 받고 추적당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부터 이토록 신중했어야 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는 납득하고 있던 참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 도해월 마스터를 직접 모신 이유는 결례를 무릅쓰고 제안하고 싶은 사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내 자세를 곧게 가다듬으며 말을 잇는 현선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언급하는 사안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두고 거래해 보자는 의미일 터였다. 나는 이들이 소지한 패가 무엇일지 상상해 보면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