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73
173화. 합심과 조율
이윽고 나의 시선이 향한 곳은 커튼이 걷힌 게시판이었다. 현선민은 그것을 등진 채로 느긋하게 차를 마시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이는 곧 자신이 가진 패를 나에게 전부 보여 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며 그만큼 투명하게 임하겠다는 의미일 터였다.
음, 우선은……. 그보다 지금이 몇 시지? 여기 온 지도 한참인 것 같은데.
그대로 소매를 걷어서 확인해 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진 시각이었다. 이곳에서 다시 용산의 길드 사무실로 복귀하려면 시간이 제법 소요될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현선민이 대화를 주도했지만, 그녀가 거래를 암시하는 문장을 내뱉은 이상 분위기를 전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동안 나와 동료들이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과 별개로 거래의 현장에서는 대화의 주도권을 먼저 잡는 사람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이 건물의 쓰임새를 알게 된 순간부터 현선민 헌터가 저희에게 무엇을 제안하고 싶어 하는지 어림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불법 마석 가공물을 제조한 배후 세력에 관해 함께 추적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제 짐작이 맞습니까?”
현선민이 쥐고 있던 찻잔을 느릿하게 내려놓는 것을 보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표정을 통해 속내를 가늠하려는 듯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제안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도해가 어떤 이득을 취할 수 있을지 듣기 전에 먼저 확인하고 싶은 사항이 있습니다. 어째서 다른 길드가 아닌 도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건지 묻고 싶군요.”
일전의 현선민은 내가 회귀 직후에 다녀왔던 현장 실습 건을 계기로 나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사건은 그녀가 나를 눈여겨보게 되는 계기가 되어 주었겠지만, 확신을 품게 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을 터였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저는 오래전부터 도해 길드의 정보 수집력을 높이 사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서애란 헌터가 특별히 유능하다는 건 성문 길드에 소속되어 있을 적부터 인지한 상태였고요. 더불어 고정인 헌터와 고예성 헌터 남매의 이야기 또한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게 전부일까? 아닐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현선민이 슬며시 입꼬리만 올려 웃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제 삶의 지향점이 완전히 달라진 건 도해월 마스터와 다른 헌터들이 누군가 고의로 발생시키려 했던 용산 던전 브레이크를 막아 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직후였어요.”
이어서 현선민은 사람의 의지로 발생시키려 했던 재난을 막아 낸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었는지 자신의 관점에서 설명해 나갔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예전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날의 나와 동료들이 만든 날갯짓은 다시 한번 긴 시간을 돌아 또 다른 바람이 되어 나에게 불어오는 중이었다.
“제가 폭로를 감행했던 시각은 도해월 마스터와 동료들이 던전에서 빠져나오기 한참 전이었다는 걸 기억하실 겁니다.”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일은 그녀에게 눈앞에 그린 듯 생생하게 남아 있었던 건지 그 무렵의 일을 설명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이어진 설명에 따르면 그녀가 헌터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문제의 던전, 즉 ‘멸절의 설산’에 입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지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간 성문 길드에서 자신이 맡았던 일들이 던전 브레이크를 고의로 발생시키는 데 다방면으로 일조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때까지 저는 삶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든 그저 견디고 버티는 것만이 삶의 미덕이라고 믿어 왔어요. 하지만 문제의 던전에 어린 학생들이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실까지 접하게 된 다음부터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졌고요. 처음에는 딱 그 정도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던 현선민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를 찡그렸다. 이어서 한숨을 짧게 내뱉은 그녀는 허공에서 눈길을 틀어 맞은편에 앉은 나를 응시했다.
“그렇게 일이 커지고 내부가 혼란해진 틈을 타서 사표를 쓰고 빠져나가는 것이 제 목표였습니다. 그렇게 나온 뒤에는 누구도 저를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더는 누구도 기만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었어요. 하지만…….”
현선민이 말끝을 흐리면서 허공을 응시하는 순간 그 모습 위로 과거의 잔상이 문득 겹쳐 보였다.
“그 던전에서 도해월 마스터와 동료들이 살아서 나왔고, 던전 브레이크 또한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분명하게 인지했습니다. 저의 솔직한 마음은 성문의 비리를 폭로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더 나아가기를 원한다는 사실을요.”
짧은 찰나 동안 내가 보았던 건 다름 아닌 고정인의 얼굴이었다. 그때 고정인이 나와 동료들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잊을 수 없는 것처럼 이 순간 또한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군요. 내밀한 이야기까지 선뜻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켰으나 내가 내놓을 수 있는 답은 이것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전생의 기억과 현재의 흐름을 견주어 보았다.
전생에서도 서애란이 나타나기 이전에 헌터 아카데미를 재학했던 B급 각성자가 있었고, 그 학생이 졸업한 뒤 성문 길드에 입사했다는 것까지는 일치했다. 하지만 그때는 성문 길드의 비리를 폭로하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었다.
오래전에 했던 선택이 불러일으킨 바람이 이렇게나 많은 걸 바꿔 놓는구나.
그렇다면 이제는 어디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또 다른 날갯짓을 경계하며 앞날에 벌어질 일을 대비할 차례였다.
“의문점은 충분히 해소되었습니다. 이제 제가 현선민 헌터의 제안을 수락하면 도해가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앞서 전달한 이야기는 사실상 감정적 호소에 가까웠으니 이제 객관적인 눈으로 도해를 다시 비춰 볼까 합니다.”
다시 한번 찻잔을 내려놓은 현선민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우선 도해가 터를 잡은 용산에 관해서 말해 보죠. 용산구는 다른 지역에 비해 길드끼리의 경쟁이 심한 편이에요. 분기별로 각 길드의 순위를 매기고 그 결과에 따라서 갈라치기를 하는 경향도 강하죠. 같은 지역구의 국회의원 중에서 누구의 편에 붙느냐에 따라 혹은 어느 당이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신세가 뒤바뀌기도 해요.”
현선민은 길드의 배경적인 부분을 먼저 설명하면서 큰 그림을 그린 뒤 세부적인 사항을 채워 넣으려는 생각인 듯했다. 느릿하게 턱을 까딱이던 나는 간결하게 말을 보탰다.
“그렇다는 건 곧 정계 상황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거기에 휩쓸리지 않을 만큼 길고 굵은 뿌리가 필요하다는 말이겠네요. 그래야만 경쟁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고요.”
“네, 바로 감을 잡으시네요. 그 뿌리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고 계시겠죠.”
“말씀하신 뿌리라는 것이 길드가 보유한 던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도해는 지금 물가에 심은 어린나무와 다름없다는 사실 정도는 저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저희가 보유한 던전은 관광용 던전 두 개가 전부니까요.”
곧바로 되묻던 현선민은 이어지는 말을 듣고 가만히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그녀는 길드끼리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고 버티려면 다수의 던전을 보유하는 것이 유리하고 설명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다른 곳보다 수익성이 뛰어난 던전을 보유하거나 혹은 관리가 까다로운 던전을 맡은 뒤 그 던전을 오랫동안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입증하면서 길드가 가진 능력치를 환기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현선민의 설명을 신중하게 귀 기울여 들었다. 전생의 나는 이능청 슬하의 부대를 지휘하는 정부 기관 소속 헌터였기 때문에 길드의 입장을 낱낱이 이해하지 못했었다.
굳이 따진다면 전국의 수많은 길드가 분기마다 거액의 보조금을 타가는 것 자체가 정부의 예산을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고 내가 알지 못했던 시각을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그런 의미에서 현선민은 적절한 시기에 부상한 아주 중요한 변수였다.
“물가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들판에 심긴 나무보다 여러모로 불리한 점이 많죠. 커다란 바람이 불면 맥없이 휘청이다 뿌리가 뽑힐 수도 있을 거고, 주변의 물을 너무 많이 흡수했다가 뿌리가 썩어 버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겁니다”
어느새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현선민은 막힘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바로 곁에서 물이 흐르고 있으니 세간의 흐름을 읽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거예요. 실제로도 도해월 마스터는 앞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니 이런 비유가 틀린 것도 아닐 테고요. 그런 의미에서 다가오는 오월에 이관부에서 진행하는 심사는 도해 길드의 기반이 되어 줄 뿌리를 얻을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반쯤 숙였다. 그렇지 않아도 에덴 길드에 조금 더 알아보려던 참이었던 만큼 나로서는 달가운 화제였다.
“그것까지 계산하고 있었던 거라면 지금의 저희가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도 어느 정도 간파하고 있었겠네요. 제가 궁금한 건 에덴 길드가 어째서 이번 심사에 뛰어들었는지 그 이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금세 차분한 기색을 되찾으며 묻고 있으니 현선민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이어서 그녀는 이번 심사에 에덴이 참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단하게 열거했다.
“에덴은 이번 심사를 빌미로 성문이 남긴 흔적을 삼켜 부지를 늘리고, 용산구 내에서 더는 자신들을 뛰어넘을 만한 가능성을 품은 길드가 나타나지 않도록 공공연하게 선언하려는 생각일 거예요.”
“에덴 길드에서도 저희 길드의 성장세를 어느 정도는 의식하고 있다는 뜻처럼 들리네요.”
그와 더불어 에덴은 이능단속관리본부와 밀접하게 연결된 만큼 이번 심사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고 용산구 내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아야만 앞으로도 큰 탈이 없을 것이기도 했다.
이 심사가 중요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무게감이 실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나도 모르게 한숨이 쏟아졌다. 이윽고 현선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도해에서 저희의 일을 도와주신다면 저도 이번 심사에서 도해가 에덴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이게 제가 도해월 마스터에게 드리고 싶었던 제안입니다.”
방금 그건 나에게는 충분히 솔깃한 제안이었다. 현선민이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도 서애란을 통해 한국마력연구소가 감추고 있던 진실을 파고들던 참이었기 때문에 딱히 밑질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사리 분별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때 성문에 몸담았던 현선민과 함께한다면 그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될 수 있을 터였다.
“좋습니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자세한 사항은 날이 밝은 뒤에 마저 조율해 보도록 하죠.”
금세 판단을 마무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다시 한번 나와 손을 맞잡은 현선민은 습관처럼 환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