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74
174화. 다시 시작된 날갯짓 (1)
현선민과 합심하기로 결심한 뒤 앞으로의 일정 조율은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당분간 나와 그녀는 이능단속‧관리본부에서 진행될 심사에 매진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서애란을 재단 사람들 사이에 임시로 투입한 뒤 불법 마석 가공물을 제조하는 배후 세력에 관해 마저 추적하기로 했다.
조율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재단 건물에서 보호하고 있는 이들의 대부분이 E, F급 각성자라는 것이었다. 개중에는 적은 수에 불과하지만 비각성자도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현선민은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고정인과 고예성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물어 왔다. 재단의 사정을 전해 들은 두 사람은 약간의 고민 끝에 수락해 주었다.
두 사람과 대화를 마무리할 즈음 고정인이 나에게 조심스레 질문한 것이 있었다. 바로 서애란과 이유나에 관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그 둘이 같이 있어도 괜찮대? 애란이랑 이유나 말이야.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되면 매일은 아니어도 꽤 자주 볼 것 같아서. 사실 나 그때 학교에서 이유나 나타난 것 보고 진짜 너무 놀랐거든. 그때는 너희 다 빠져나가고 나서 뒷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무 말도 못 꺼내고 넘어갔지만.’
이윽고 회의실에서 서애란과 마주 앉아 한가득 쌓인 결재 서류를 확인하던 내 귓가에 고정인의 목소리가 되풀이되었다.
가만히 허공을 보면서 그녀의 목소리를 곱씹고 있으니 맞은편에서 두툼한 플라스틱 파일을 들여다보던 서애란이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뭐 할 말 있어?”
이때까지 서애란이 들여다보고 있던 건 전날 재단 사람들을 통해 전달받은 자료였다. 보안을 위해 일부러 아날로그식으로 출력한 자료집에 의하면 재단에서는 안지유를 주축으로 이유나를 비롯한 헌터 아카데미를 졸업한 헌터들이 팀을 이루어 움직이는 중이라고 했다.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나는 그녀가 들여다보고 있던 자료집에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거두면서 말했다. 그러자 서애란은 펼친 파일 위로 깍지 낀 손을 얹으면서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유나랑 따로 나가서 대화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 이후로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 당분간 같이 일하게 되면 계속 마주쳐야 할 텐데 두 사람 다 그래도 괜찮은 건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그 말을 들으면서 입술을 달싹거리던 서애란은 음, 하는 소리를 내면서 창문을 돌아보았다. 창밖에서는 흐린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잠시 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먹구름이 드리운 하늘에 눈길을 두었던 서애란이 한숨을 삼키면서 입을 열었다.
“그 부분은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 더 물어볼 거라고 생각을 못 했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괜찮아. 일하는 와중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킬 것도 아니고, 뭐.”
그 말을 끝으로 침묵하던 서애란은 계속해서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해 입을 열지 않고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미 몇 번이고 얘기했던 것처럼 나는 그 애를 계속 생각해 왔어. 그런데 내가 줄곧 생각해 왔던 건 그 애한테 사과하는 것뿐이었더라. 이유나가 뭐라고 반응할지, 그 이후는 어떻게 될지 가늠하지도 못하고 딱 거기까지만 생각했던 거였어.”
서애란의 말이 길어질 즈음 그녀의 어깨 너머 창가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유리창에 빗물이 부딪히는 소리를 따라서 잠시 고개를 돌렸던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인지 그 애가 사과를 받아 주지 않았을 때 내심 당황스럽더라. 당연히 그럴 수도 있는 거였는데 거기까지 헤아리지 못했던 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겠지.”
동시에 창밖을 내다보던 나는 순식간에 굵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앞으로도 네가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거야. 이제부터 생각해 보려고 하거든. 앞으로 내가 이유나를 위해서 뭘 할 수 있을지.”
서애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을 맺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마냥 막막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삶에 주어진 새로운 기회를 반드시 잡고 싶어 하는 절실함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심사 관련 공지는 언제쯤 확인할 수 있는 거야? 듣기로는 길드 측에 공문을 따로 보낸다고 하던데. 현선민 헌터는 언제 다시 만나기로 했어?”
나는 이어서 되묻는 서애란의 목소리를 듣고 손에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이어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확인해 보니 머지않아 설연호가 회의실에 오기로 약속했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음, 자세한 건 연호 선배가 알고 있을 거야. 아마 오늘 내로 도착하지 않을까 싶은데. 우리 쪽으로 공문이 오면 일정부터 점검해 보고 따로 현선민 헌터랑 따로 약속 잡으려고.”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대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다시 화면을 내려다보니 설연호의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며칠 전에 현선민 헌터가 얘기했던 대로 됐더라 유월 중순 즈음에 나온다던 길드 순위가 벌써 나왔대 곧 있을 심사 때문인가 봐] [심사 관련 공문도 곧 있으면 온다고 하니까 그거랑 같이 보면서 얘기하면 될 것 같아 지금 보고 있는 것만 끝내고 바로 갈게]나는 간결하게 정리된 메시지를 두어 번 훑어본 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 순간에도 창밖에서는 굵은 빗줄기와 함께 벼락이 내리치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한국마력연구소.
언제나처럼 연구소 지하 내부를 부지런하게 돌아다니던 성민주는 오전 일정을 마무리한 뒤 자신의 개인 연구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닫힌 문 근처에 가까워질 즈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파일철을 품에 안은 채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석 연구원이었다.
“어떻게 된 거래요?”
그녀는 지정된 업무 외에도 이런저런 잡무를 수행해 주는 연구원에게 눈짓을 건네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따라서 들어선 연구원은 성민주를 따라서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음, 강준희 헌터 말로는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하더군요. 듣기로는 거래를 주도하던 학생이 최근에 약물을 기준치 이상으로 복용했다고 합니다. 그 여파로 우발적인 행동을 저질렀다고 추측하던데……. 자신의 불찰인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둘러대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성민주보다 훨씬 연배가 들어 보이는 연구원은 깍듯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직전까지 연구실 앞에서 대기하던 그는 대략 십여 분 전 누군가와 나눴던 통화 내용을 성민주에게 설파하고 있는 것이었다.
“차진명 헌터는 뭐라고 하던가요?”
연구원의 맞은편에 앉아서 그를 올려다보던 성민주가 은테 안경을 벗은 뒤 소리 없이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자신과 차진명이 막역한 관계라는 걸 연구소 내부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헌터라는 호칭을 매번 고집했다.
“특별히 책망하진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당분간 샘플 수집은 미루고 다른 직무만 제대로 수행하라는 식으로 지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다음 날 교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기는 했는데, 그것도 새로 부임한 이사장이 잘 막아 주셨다고 하고요. 다행히 자세한 사정은 캐묻지 않고 정리했다고 합니다.”
“거래를 주도하던 학생은요?”
“당분간 결석하는 쪽으로 학생 본인과 합의를 봤다고 합니다. 우선은 조용히 지나가겠지만, 조만간 다른 손을 써서 처리하시겠죠.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아무래도 강준희 헌터는…….”
피로한 몸을 의자 등받이에 묻고서 침묵하던 성민주는 연구원이 말끝을 흐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어서 감았던 눈을 느릿하게 뜬 그녀는 연구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자신을 꿰뚫는 듯한 시선을 느낀 연구원은 금세 말을 아끼면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런 연구원을 바라보는 성민주는 언제나처럼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더 전하라는 말은 없었나요?”
“아, 연구소 쪽에 전달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실험 계획을 앞당기고 싶은데 가능하냐고 하시더군요.”
그 말을 들은 성민주는 상체를 천천히 세우면서 책상에 놓인 달력을 들여다보았다. 달력의 뒷장을 넘기면서 날짜를 셈해 보던 그녀는 짧은 고민을 마치고 연구원에게 말했다.
“그건 내가 따로 얘기해 볼게요. 이만 나가 보세요.”
이윽고 연구원은 성민주에게 공손하게 인사한 뒤 들고 있던 파일철을 넘기고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성민주는 달력을 내려놓으면서 앞서 들었던 강준희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았다.
단순히 차진명의 새로운 수하인 줄 알았던 강준희가 연구소 지하까지 발을 들이게 되면서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강준희가 수석 연구원들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본 적이 있다는 사실도 한참 전에 보고받았던 부분이었다. 연구원들은 그런 식으로 은근히 선을 넘는 그를 불편하게 여기는 듯했으나 성민주는 딱히 저지할 생각이 없었다.
‘군데군데 모난 구석이 있는 건 적당히 고쳐 쓰면 되는 거고. 우리한테 넘긴 정보가 있으니 데리고 있는 동안은 계속 잘 굴려 봐야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가볍게 들썩인 성민주는 연구원이 두고 간 파일을 펼쳤다. 이어서 그녀는 강준희가 두어 해 전에 성물의 존재를 알려 준 덕분에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한층 수월해졌다는 사실에만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파일철에 담겨 있던 보고서를 정독한 성민주는 근처에 있던 내선 전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 잠깐 연구실로 오셔야겠어요. 네, 기다릴게요.”
통화를 마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수석 연구원이 성민주의 연구실에 들어섰다. 성민주는 그녀에게 앞서 전해 들은 사정을 설명했다.
“네, 알겠습니다. 장소는 그동안 준비하셨던 곳으로 그대로 이행하면 되는 걸까요?”
“아뇨.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일정을 앞당기는 동시에 계획을 전면 수정할 생각입니다. 장소는…….”
연구원을 눈앞에 두고 태블릿 화면을 통해 지도를 확인하던 성민주가 검지로 어느 지점을 짚으면서 말했다.
“평택이 좋겠네요.”
“네? 평택은 지금이 아니라 몇 년 뒤에……. 음, 우선 알겠습니다.”
순간 당혹스러워하던 연구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이어서 성민주는 연구원과 앞으로의 일정을 정리한 뒤 그녀를 내보냈다.
다시 혼자가 된 성민주는 휴대전화를 집어 차진명에게 연락을 남겨 두었다. 불법 마석 가공물과 관련하여 덜미가 잡힌 것으로 추정되는 이상 확실하게 반격할 필요가 있었다.
그즈음에서 성민주는 강준희가 성물에 관한 정보를 넘긴 덕분에 최종 목표에 다다를 때까지 소요될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또한 예상치 못하게 제 발목을 붙든 손을 털고 마저 나아가려면 이전보다 더 큰 판을 설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실험은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지잉―
그때 성민주의 휴대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차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