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77
177화. 다시 시작된 날갯짓 (4)
현선민과 함께 밤늦게까지 전략을 구상하고 돌아온 지도 어느덧 며칠이 지났다. 각 길드의 사정을 파악하고 심사 참여 여부를 헤아리는 일에 시간이 제법 소요되었으나 각자 업무를 분담하는 것은 금세 마무리되었다.
이능단속‧관리본부측에서 송부한 공문에 따르면 심사 접수는 일주일 뒤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던전 목록이 공개되는 건 그로부터 나흘 뒤가 될 것이었다.
던전 지망 목록을 작성하기 위한 가이드는 심사 대상 선정이 마무리된 뒤에 공개된다고 했으니 그때 가서 다시 보면 될 것 같고…….
집무실에 앉아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지난 논의 결과를 정리해 둔 파일을 확인하던 나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몇 번 두드렸다. 그러자 역할 분담을 적어 넣은 페이지로 넘어가더니 각자 맡은 일이 항목으로 분류되어 나타났다.
지난 만남에 동행한 설연호는 심사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는 길드 중 우리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만한 곳과 차례로 접촉하는 일을 맡기로 했다.
계속해서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을 무렵 근처에 놓여 있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화면에서 시선을 거두고 곧바로 확인해 보니 오늘 오전에 영원 길드와의 만남을 갖는다는 설연호의 문자가 떠올라 있었다.
똑똑―
다시 태블릿을 들여다보기 위해 시선을 트는 순간 문가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소매를 걷어 시간부터 확인한 나는 들어오라는 말을 전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에 둔 파일철과 태블릿을 챙겼다.
“아유, 마스터 얼굴 한번 보기 되게 힘드네. 다시 돌아와 달라고 애걸복걸할 땐 언제고 막상 와 보니까 중요한 직분은 다른 애들이 다 차지하고 있던데.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 그 대단한 마스터께서 이제라도 불러 주니 감지덕지라고 해야 하나.”
이윽고 문을 닫고 들어선 공희찬은 테이블 근처에 서서 집무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내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서서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선배도 그런 자리에 욕심이 있었어? 일부러 던전 공략 팀 쪽에 배치해 줬던 건데. 적성에 안 맞으면 얘기해. 다른 부서로 옮겨 줄게. 아니면 팀이라도 하나 만들어 줘?”
나는 테이블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전 내선 전화기로 바깥에 있을 직원에게 음료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 자식 좀 봐라. 선배한테 토씨 하나 안 지고 반박하네. 이제 다 잡은 물고기다 이거야?”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던 공희찬은 이내 어슬렁거리며 테이블에 앉았다. 나는 공희찬의 맞은편에 태블릿과 파일철을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를 끌어당기면서 그를 흘긋 살폈다.
“됐어, 인마. 허구한 날 집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실컷 나돌아 다니니까 이제 좀 살 것 같거든. 괜히 어깨 무거워질 일 만들지 마. 아, 그냥 지금이 좋다고.”
등받이에 느슨하게 기댄 채 말을 잇던 공희찬이 후련한 얼굴로 어깨를 들먹였다. 그에게 넌지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 별로 안 늦었지?”
이어서 집무실의 문이 열리더니 음료가 담긴 쟁반을 든 직원과 고예성이 차례로 들어섰다.
“선배도 방금 왔어. 와서 앉아.”
이어서 나는 쟁반을 내려놓은 뒤 인사하는 직원에게 가벼운 눈짓을 전하고 고예성을 보면서 맞은편 빈자리를 가리켰다.
* * *
두 사람과 짧은 안부를 나눈 뒤 내가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현선민과 만나게 된 배경에 관한 것이었다.
“예전부터 우리를 도와줬던 익명의 후원자라고, 선배도 몇 번 들었을 텐데. 우리가 줄곧 짐작했던 대로 익명의 후원자는 혼자가 아니었고 단체였어. 모양새가 길드랑 비슷하기는 한데, 그쪽은 무슨 재단 같은 걸 운영하는 중이야.”
“그럼 그렇지. 효신이랑 얽힌 자료만 해도 그래. 그렇게 위험한 걸 덜컥 내놓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
테이블에 한쪽 팔꿈치를 얹은 채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공희찬이 대꾸했다. 이어서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 등을 곧게 세웠다.
“중요한 건 그 재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을 전부 불러 모은 사람이야. 그쪽 사람들은 우두머리 격인 그 사람을 선배라고 부르더라. 근데 그게 누군지 알아?”
“뭔데, 왜 이렇게 질질 끌어. 누구길래 그래?”
“우리가 마지막으로 같이 들어갔던 현장 실습 날에 누가 인터넷에 성문 길드의 비리를 폭로하는 게시물이 올라왔던 거, 기억하지?”
거기까지 들은 공희찬은 고개를 끄덕인 뒤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눈을 크게 뜨면서 되물었다.
“설마……. 그때 그 B급 헌터? 그 사람이 익명의 후원자였다고?
나는 이어서 현선민이 우리 길드를 그간 도왔던 이유와 비로소 만난 뒤에 했던 제안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럼 그렇지. 목적도 없이 생판 남을 도울 리가 있나. 그거야말로 진짜 이상한 놈이지. 아니, 씨, 살다 보니 별 희한한 일이 다 있네.”
공희찬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따금 헛숨을 터뜨리거나 눈가를 찡그리면서 반응했다. 끝내 그는 손바닥으로 심장 근처를 문지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 *
현선민과 관련한 설명을 마무리하고 그녀가 우리에게 했던 제안에 관해 열거할 무렵에는 분위기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는 이어서 현선민이 도해 길드를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면서 분석한 장점과 약점에 관해 언급했다.
“지금 우리 길드는 리호나 취우 그리고 사양 같은 대규모 길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그게 우리 길드의 장점 중 하나라는 현선민 헌터의 의견에 나도 동의하는 바야.”
그대로 말을 멈춘 나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눈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내 차가운 물기가 맺힌 유리잔을 내려놓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유념하고 있어. 그 사람들한테 제일 중요한 건 각자가 맡은 길드일 테니까. 특히 이번 심사처럼 국가 기관이 개입하는 사안에서는 간단한 조언 외에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없기도 하고.”
허공에 젖은 손가락을 가볍게 털고서 파일철을 집어 든 나는 그 안에 담긴 서류가 보일 수 있도록 펼친 뒤 두 사람 앞에 내려놓았다.
“그런 의미에서 현선민 헌터가 언급한 장점보다 더 확실한 강점을 서둘러 확보하지 못한다면 그 관계들은 언젠가 우리의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 사람들한테 필요 이상으로 의존해서 좋을 게 없다는 뜻이야.”
내가 그들 앞에 내려놓은 건 한 국회의원의 프로필이 담긴 서류였다. 뒤로 이어지는 낱장에는 해당 의원의 지난 행보와 향후 행보를 예측하여 정리한 사안이 담겨 있었다.
“음, 길드의 강점을 언급하면서 이런 서류를 우리한테 보여 준다는 건…….”
고예성은 머리로는 이 상황을 파악했으나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듯했다. 이어서 말끝을 흐리면서 공희찬을 바라보자 그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한마디로 이제 우리 길드도 이런저런 사정을 봐주는 뒷배가 필요해졌다는 뜻인 거지.”
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고 심사 관련 공문이 담긴 파일철을 펼쳐 놓았다. 그러자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금 서류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여기 있는 공문을 보면 각 길드는 지망하는 던전의 목록을 자유롭게 작성할 수 있지만, 그걸 반영할지 말지 결정하는 건 이관부의 뜻이라고 되어 있어. 그렇다고 해서 우리한테 대놓고 불이익을 주진 않겠지만, 심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우리 쪽에서도 뒷배를 확보해 두는 게 좋겠지.”
나란히 펼쳐 놓은 파일철을 연달아 살피던 고예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국회의원의 프로필이 담긴 서류에 검지를 얹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이 의원을 만나 보라고 한 것도 현선민 헌터야?”
“제안한 건 현선민 헌터가 맞지만, 그 의원을 선택한 건 나였어.”
나는 긴 설명을 마무리하고 팔짱을 끼운 채 몸을 편하게 기대었다. 고예성의 곁에서 나와 그를 돌아보던 공희찬이 고개를 빼고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아, 황선규 의원이네? 이 정도면 괜찮지. 그건 그렇고 이 의원이랑 다른 길드랑 엮였다는 얘기는 한 번도 못 들어 본 것 같은데. 성격이 원체 꼿꼿하고 가리는 것도 많아서 따로 누구 뒤를 봐줄 만한 사람이 아니기는 해.”
잠시 뒤 공희찬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가를 찡그리면서 말했다.
“그런데 왜 이런 사람을 골랐어? 고를 거면 차라리 다른 길드를 같이 봐주거나, 봐주는 곳이 없다고 해도 우리가 요구했을 때 들어줄 만한 사람을 고르는 게 나을 텐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괜히 여기저기 찔러 보면 소문만 구려질걸.”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세를 되돌린 공희찬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근처에 쌓여 있던 파일철을 눈대중으로 살피던 나는 그중 하나를 집어 두 사람 앞에 펼쳐 놓았다.
“이게 이번 연도 상반기 용산구 길드 순위야. 우선 1위인 에덴 길드부터 6위까지 차지한 길드를 위주로 얘기해 볼게. 성문이 건재하는 동안에는 거기까지 포함해서 총 일곱 개의 길드가 지역구를 꽉 잡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이윽고 눈앞에 놓인 순위를 한참 들여다보던 두 사람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 길드의 뒤를 봐주던 건 전부 한국당 의원들이었어. 딱 그 여섯 개의 길드만 순위 변동 없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 때문이었을 거야. 순위를 집계하는 정오일보가 그쪽이랑 이어져 있거든. 하지만 이번에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이전 정권까지 보수 정당이랑 찰싹 붙어 있던 에덴 길드가 차정주 이사장의 출마 선언 이후로 국민미래당이랑 접촉하기 시작했다는 거?”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지던 공희찬이 말끝을 흐리기 무섭게 되받아쳤다. 그는 얕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옆에 놓인 빈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면서 말했다.
“풍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게 주해나 헌터라는 말이 돌더라. 에덴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다른 길드도 상황이 달라지려나? 아무튼, 다른 길드 사정은 대강 알겠어. 그러면 왜 하필 황선규 의원을 고른 건데? 괜히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가 소문이라도 잘못 나면 난처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이러는 거냐?”
물론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도 그는 끝까지 어떤 길드의 편에도 서지 않았었다. 하지만 나는 전생의 그가 차정주와 이능청에게 대적하기 위해 모인 길드 연합 세력이 힘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남몰래 손을 썼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했다.
“나는 아버지 곁에서 봐 와서 황선규 의원이 어떤 성격인지 잘 알아. 그리고 그 의원이 지금까지 길드의 뒷배를 봐주지 않았던 건 자기 마음에 차는 곳이 딱히 없어서 그런 거였을 거야.”
아직 이들 앞에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현선민이 그러했던 것처럼 황선규 또한 우리의 지난 행보를 흥미롭게 지켜봤을 가능성이 존재했다.
“선배가 말한 대로 그 의원은 가끔 고지식하다고 느낄 정도로 자기가 옳다고 믿는 걸 밀어붙이는 사람이야. 그렇다는 건 우리가 그런 의원의 마음에 들고 나면 누구보다 믿음직한 뒷배를 두게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해. 어느 순간부터는 다들 지레 겁먹고 물러나서 그렇지 두드리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거야.”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은 확신에 찬 어조로 담담하게 전하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눈앞에 놓인 파일철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예성이 넌 이틀 내로 황 의원 쪽으로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줘. 우리가 보유한 관광용 던전에 하루 동안 초대하겠다고 하면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들을 거야.”
내가 황선규 의원을 만나려는 건 그가 전생에 길드 연합 세력에 힘을 보태 주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전생에서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 그는 차정주와 경쟁하는 차기 대선 후보였다.
나에게는 그와 관련한 또 다른 패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 패를 확인하고 나면 내 제안을 쉽게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