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80
180화. 다시 시작된 날갯짓 (7)
서애란과 대화를 마무리하고 혼자 남은 나는 회의실에서 새벽을 지새우기 위해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모든 기척이 사라진 뒤 완전해진 적막 속에서 눈을 깊이 감았다가 뜨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대체 왜 그런 짓을 벌이는 거지?’
드문드문 불을 밝힌 높은 빌딩을 내다보고 있으니 서애란의 음성이 귓가에서 되풀이되었다. 다른 물질도 아닌 마석을 가공하여 알약을 제조하고, 그걸 사람이 직접 복용하게 만든 뒤 반응을 지켜보는 일에는 특정한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 알약의 정체는 비밀에 부치는 것이 당연지사일 터였다. 만약 내가 그들 진영에 속해 있었다면 비밀 유지를 위해 그것을 복용한 사람들 또한 외부에 나돌게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건 당연한 상식이었다.
그럼에도 현선민이 지금껏 많은 사람을 한 건물에 모을 수 있었다는 건 그들의 비밀이 생각보다 쉽게 간파될 수 있을 만큼 허술하거나 어쩌면 고의로 허점을 만들었다는 뜻일 터였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그 허점은 일부러 만든 것일까?
어쩌면 그 문제에 대한 답은 차진명이 학교에서 사라졌던 시간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전까지 나에게 있어 그 시간은 전생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었기에 의문스럽게 다가왔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서애란을 비롯한 다른 두 사람까지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게 되면서 그 시간에 내가 모르는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차진명이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했던 이유도 함께 찾을 수 있게 되려나. 정확한 이유를 찾지 못하더라도 그와 관련한 실마리 정도는 얻게 되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칠 즈음 창가에 빛이 들면서 바깥 풍경이 환해지는 모습을 눈에 담아 볼 수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배경으로 남산타워의 모습이 선명해질 즈음에는 심란해진 속내를 정리하고 다음 일과를 준비하기 위해 회의실을 벗어났다.
집무실로 복귀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문제혁이 기상하는 시간에 맞춰 문자를 보내 두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던전에서 복귀가 늦어지면서 밀린 일을 처리하고 있으니 바깥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똑똑―
곧이어 울린 노크 소리에 이어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그 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상기된 얼굴을 한 고예성이었다.
“들어오라는 말은 아직 안 했는데.”
나는 손가락 사이에 느슨하게 두었던 만년필을 고쳐 쥐면서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 하단에 서명을 남겼다. 이내 파일철을 닫고 고개를 들자 가볍게 숨을 고르는 고예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 좀 봐줘. 급하게 전할 소식이 있어서 연락 없이 바로 온 거니까. 지금 시간 괜찮지?”
고예성은 문을 박차고 들어온 직전과 상반되도록 침착해진 상태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힐긋 살피면서 슬그머니 웃어 보이고는 만년필을 내려놓으면서 끄덕였다.
“괜찮아. 그나저나 왜 이렇게 다급하게 왔어. 황선규 의원이 초대에 응하겠대?”
“이야, 바로 맞히네. 방금 그쪽 보좌관이랑 통화 마치고 오는 길이야. 황 의원이 우리 길드의 정성을 생각해서 초대에 응하겠다고 했대. 대신 그쪽에서 조건을 하나 걸었어.”
“조건을 걸었다고?”
전용 천으로 만년필의 펜촉을 닦던 나는 간결하게 되물으면서 맞은편에 서 있던 고예성을 바라보았다.
“황 의원이랑 만나는 날에 희찬 선배를 같이 데려오라고 했어. 그 조건을 지켜 줄 수 없다면 만남은 정중하게 거절하겠다고 하더라.”
“음…….”
“솔직히 난 네가 의원실 쪽에 다시 연락해 보라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한 상태였거든. 두 번째 요청에서 선뜻 수락해 준 것만 해도 놀랐는데 조건이랍시고 희찬 선배까지 언급하는 것 보니까 조금 당황스럽더라.”
아무래도 고예성은 이때까지 길드의 뒷배를 자처하지 않았던 황선규가 순순히 응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황선규 의원이 그동안 어떤 길드와도 얽히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거랑 별개로 그 의원은 3선에 달하는 동안 각성자와 길드에 유리한 정책을 계속 발표해 왔어. 그러다 보니 희찬 선배의 아버지인 공규호 의원과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을 수밖에 없겠지. 공규호 의원은 그 반대편에 서 있으니까.”
말끔하게 정리한 만년필을 내려놓은 나는 말문을 멈추고 고예성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그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쪽에서 희찬 선배를 보고 싶다고 한 건 황선규 의원이 우리 길드에 흥미를 느낀 지점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는 뜻일 거야. 정확히는 우리가 희찬 선배를 어떻게 데려왔는지 궁금한 거겠지.”
전생의 기억을 미루어 볼 때 황선규 의원이 돈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다면 그건 사람을 끌어당기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쪽에서 긍정적인 의사를 밝힌 건 내가 그가 정한 기준을 어느 정도 충족했다는 의미일 터였다.
“어쨌든 황 의원이 우리의 초대에 응하겠다고 한 건 우리의 제안을 잠정적으로 수락하겠다는 대답이나 다름없으니까 원하는 대로 준비해 줘. 희찬 선배도 거절하진 않을 거야. 그건 내가 따로 얘기해 둘게.”
“알았어. 일정은 그쪽에서 제시하는 대로 따르면 되지?”
나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고예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내내 가지고 있던 고민을 한 가지 덜었다는 생각에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다.
* * *
고예성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내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면서 들어오라는 말을 전한 뒤 문가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이야, 형. 잘 있었어?”
오랜만에 길드 사무실에 방문한 문제혁은 집무실에 들어오면서 반갑게 인사를 건넨 뒤 걱정스러운 어조로 되물었다.
“그런데 형 얼굴이 왜 이래? 어제 잠 못 잔 거야?”
“어제 던전에 다녀와서 그래. 괜찮아. 그리고 등급 오른 거 축하해. 고생 많았어.”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면서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러자 문제혁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서 내가 가리키는 의자에 착석했다.
“문자로 얘기했던 것처럼 하늘 보육원에서 지내던 아이들이 입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사라지고 있대. 뭐, 최성일 원장이 어떤 사람인지는 너도 잘 알고 있을 테니 여기까지는 예상했을 거고……. 문제는 그중에 비각성자도 있다는 거야.”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문제혁이 눈가를 찡그리면서 되물었다.
“각성자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비각성자는 왜? 음, 안 그래도 나 얼마 전에 보육원에서 지원금 관련 서류 쓰러 오라고 연락 왔거든. 그때 같이 가면 뭐든 알아볼 수 있을까?”
이어서 문제혁은 휴대전화를 꺼내 얼마 전에 받은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나는 그와 함께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보육원에 방문할 날짜를 조율해 보았다.
“그러면 제혁이 네 생일이 오월 말이니까……. 그 전에 다녀오자. 다음 주 주말 정도가 좋을 것 같은데. 어때?”
“난 괜찮아. 외출 신청서만 미리 작성하면 돼.”
선뜻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문제혁에게 가볍게 웃어 주고 등허리를 바르게 세웠다. 계속해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나를 힐긋 살피면서 말했다.
“맞다, 나도 이번에 길드 순위 나온 거 봤어. 생각보다 훨씬 높게 나왔던데. 학교에서도 한동안 잠잠하다가 순위 나온 뒤로 나랑 선일이한테 여기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애들이 다시 잔뜩 늘어난 것 있지.”
“그럼 이제 학교에서도 선글라스 쓰고 다녀야겠네.”
그것까지 듣고 보니 언젠가 문제혁과 지선일이 선글라스를 쓰고 사무실에 나타났던 일이 떠올랐다. 이내 피식 웃으면서 우스갯소리를 던지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문제혁도 이내 이해했다는 듯 따라서 웃어 보였다.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감돌았으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게 상위권에 들었지만, 이 기세를 유지하려면 앞으로도 헌터들이 우리 길드에 속하고 싶은 이유를 분명하게 확보해야 할 터였다.
무엇보다 나와 동료들이 게이트 사고를 막아 낸 일을 여전히 우연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모두의 기억 속에 우리 길드의 입지를 또렷하게 각인시킬 필요도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두어 해 전에 용산 던전 브레이크를 막았던 것처럼 또다시 반복될 재난을 막아 내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 전까지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길드의 자산 규모를 확장하는 거겠지.
전생에서 부대를 이끌 때는 국가에서 필요한 자금을 전부 지원해 주었던 만큼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신세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는 황선규 의원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그가 우리의 뒷배를 자처하고 나면 이번 심사에서 특정 길드만 이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절한 몫이 떨어지도록 손을 써 줄 수 있을 터였다.
그뿐만 아니라 던전 브레이크 현장에 수습 인원으로 파견되는 등 이능단속‧관리본부의 허가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사안이나 길드 관련 정책에 있어서 불이익을 얻지 않도록 조치가 가능해질 것이기도 했다.
훗날 차정주와 차진명이 이능청을 쥐락펴락하게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한편으로 황선규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만큼 그는 나에게 중요한 패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아, 그리고 보육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에덴 길드의 주해나 헌터였나? 그 헌터 엄청 오래전에 우리랑 같은 보육원에 있지 않았어? 이름만 들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얼굴 보니까 바로 알겠더라고. 그 헌터랑 형이랑 친했었잖아.”
그때 한참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문제혁이 나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문제혁도 그녀를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음, 하는 소리를 내면서 대답을 망설였다.
“맞지? 그런데 그 헌터 있잖아, 어른 되고 나서 이름을 바꾼 건가? 내가 기억하던 이름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거든. 원래 이름이 뭐였지? 형은 기억나?”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기억과 삶에 큰 획을 남긴 그 이름을 잊을 리가 있나.
그와 별개로 나는 그것을 문제혁에게 전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도 알리지 않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앞에서는 거짓말을 꺼내 놓을 수 없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가 보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내가 주해나 헌터를 기억하는 것도 그 헌터가 보육원을 떠나고 나서 형이……. 음, 아니야. 여기까지만 얘기할게.”
그런 내 속내를 기민하게 알아챈 문제혁이 말을 돌렸다. 이어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 번 언급했던 것처럼 에덴 길드가 이번 심사에 참여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문제혁의 손등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으면서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능단속‧관리본부에서 작성한 심사 공문은 같은 날에 전해졌으니 지금쯤 에덴 길드에서도 전략을 구상하고 있을 터였다.
부길드장이었던 전태무가 부재한 그곳에서 주해나는 지금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자연스레 허공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그들의 속내를 가늠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