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82
182화. 별과 오로라가 내리는 꿈의 호수 (1)
[던전 입장을 시도합니다.] [던전 입장 인원을 확인합니다.] [던전 에 입장을 완료하였습니다.]시야를 뒤덮었던 흰빛이 걷히기도 전에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살갗을 간지럽혔다. 반사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산딸기처럼 상큼한 열매의 향기가 뒤섞인 공기가 폐부로 가득 들이쳤다.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뜨는 순간 끝없는 들판의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발목까지 자라난 풀잎의 감촉을 느끼며 정면을 내다보니 지평선과 맞닿은 어두운 하늘에 검푸른 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와, 씨. 무슨 별이 저렇게 많냐. 툭 치면 쏟아질 것 같네.”
나는 곁에서 감탄하는 공희찬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반쯤 젖혔다. 그의 말대로 상공을 촘촘하게 수놓은 별들이 저마다 고유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별을 하나 고른 뒤 그 주위로 아무렇게나 선을 이어 보기만 해도 근사한 별자리가 완성될 것처럼 빼곡한 풍경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관광용 던전 하나 가져 보겠다고 그렇게 목을 매는구나. 놀러 갈 곳은 바깥에도 널린 와중에 왜 그 많은 돈을 들여서 여기까지 들어오나 했더니. 직접 와 보니까 알겠어.”
나에게는 이런 비현실적인 풍경이 어느 정도 익숙한 것이었으나 오늘 동행한 공희찬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설마 처음 들어오는 건가?
“야, 우리 아버지 같은 양반이 이런 데 돈 주고 제 발로 들어오겠냐?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나까지 데려올 리가 없지. 도해 길드에 이렇게 좋은 게 있을 줄 알았으면 진작 쫓아올 걸 그랬네.”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면서 공희찬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툭 던지듯 대꾸했다. 졸업도 하지 않고 학교를 일찍 떠나간 그는 한참 전에 동료들과 함께 들어갔던 관광용 던전에도 동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예전에 동아리 사람들 데리고 관광용 던전에 다녀왔던 적이 있어. 그때 선배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동아리라고 말하는 것 보면 학교 다녔을 때 일인가 보네. 길드도 아니고 동아리라니……. 이제는 그게 대체 언제 적 일인가 싶다. 안 그래?”
풀숲을 가로지르며 주변을 배회하던 공희찬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춘 뒤 돌아보았다. 그는 이내 눈을 감으면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나는 허리춤에서 손을 떨구고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름의 끝물에서 불어오는 듯한 선선한 바람을 만끽하는 듯 눈을 감은 얼굴이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예전부터 선배한테 묻고 싶은 게 있었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자 공희찬이 말해 보라는 듯 허공에 대고 팔목을 휘적였다.
“그때 왜 그렇게 급하게 떠났어? 졸업식에도 안 왔었잖아. 혹시……. 준희 때문인 거야?”
이 질문은 공희찬을 처음 사무실로 데려왔던 날에는 차마 꺼내지 못한 것이었다. 그때는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확인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한참을 대답 없이 조용하던 공희찬이 느릿하게 눈을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어. 뭐, 강준희 걔가 그렇게 떠난 게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했고.”
이어서 그는 부친인 공규호 의원이 자식이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것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말하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 특별히 간섭하지 않았던 그의 부친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용산 던전 브레이크 이후 우리의 존재가 뉴스에서 거론될 무렵이었다고 한다.
“한심한 아들놈이 장난삼아 들어간 동아리인 줄만 알았는데 뉴스까지 타니까 놀랄 만도 했겠지. 그때부터 집에 다시 돌아오라는 압박이 들어오더라. 그것까지는 견딜 수 있었는데, 쭉 같이 지내던 강준희가 떠났다고 하니까 생각보다 타격이 꽤 세더라고.”
공희찬은 이내 허공에 떠다니는 반딧불이를 향해 손끝을 뻗으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준희라서 더 그런 것도 있어. 걔가 날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날 얼마나 우습게 여겼으면 내가 제일 혐오하는 놈들 편에 냅다 붙었나 싶은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거든. 그리고 그냥……. 됐다. 다 지난 얘기는 이제 그만해.”
손가락에 앉은 반딧불이를 들여다보던 그가 말문을 맺으면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나는 그를 사무실로 데려왔던 날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서 잠시 침묵했다.
“음, 그때 선배가 사무실에 처음 와서 우리한테 해 줬던 얘기들 다 기억나지?”
“어, 기억나.”
곧장 대답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떠올린 건 공규호 의원의 수행원 중 한 명이 F급 각성자였다는 사실과 그가 가진 정보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도 조만간 이관부에 가서 등급 측정을 다시 받으려고 하거든. 계획하고 보니까 그때 선배네 아버지 수행원 중에 각성자가 있고, 그 사람이 한마연에서 등급 측정 결과를 일부러 조작한다는 정황 증거도 가지고 있다고 했던 얘기가 갑자기 생각나서.”
공희찬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와 그의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 바람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왼편으로 한참 걷다 보면 나오는 숲길에서부터 불어오는 것일 터였다.
“나도 집 나온 이후로 따로 연락을 안 하기는 했는데……. 갑자기 그건 왜? 한마연이랑 얽힌 얘기는 애란이나 예성이 같은 애들이 알아보고 있는 것 아니었냐?”
“맞아. 그런데 선배가 말해 준 부분은 선배한테 부탁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혹시 그 수행원이랑 다시 연락해 볼 수 있어?”
“하려면 할 수 있지. 아버지 수행원 중에서 나랑 가까웠던 사람은 그 사람이 유일하니까. 그런데 지금 그쪽 상황이 어떤지 모르기도 하고, 그 증거를 어디에 쓸 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뜸 넘겨주진 않을 거야.”
나는 그즈음에서 소매를 걷고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황선규 의원이 이곳에 입장하는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두어 시간 뒤였다.
“그 정도면 됐어. 언젠가 그 증거가 꼭 필요한 상황이 생기고, 넘겨받을 만한 명분도 충분해지면 그때는 연락해 볼 수 있는 거지?”
“뭐……. 그렇지? 내 도움이 필요해지면 그때 얘기하든가.”
대수롭지 않은 듯 툭 뱉는 어조와 달리 공희찬은 어딘가 긴장한 것처럼 자세를 곧게 가다듬었다. 이어서 그는 주위를 크게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지금 몇 시나 됐냐? 황 의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와서 점검해야 한다며. 그리고 또 따로 할 것도 있다면서. 슬슬 움직여야 하는 것 아냐? 뭐부터 하면 돼?”
공희찬과 친분이 있다던 F급 수행원에 관해 잠시 생각하던 나는 턱짓으로 왼편에 자리한 숲을 가리켰다. 저 숲길을 지나 완만한 경사를 따라서 오르다 보면 산 정상까지 금세 다다를 수 있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문제없는지 한번 점검만 해 보면 돼. 그리고 호수에 가서 따로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
이어서 그다지 높지 않은 산맥을 크게 훑어보다가 먼저 걸음을 내디뎠다. 잠시 뒤 자연스레 따라붙은 공희찬을 바라보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유성우가 내리기 시작할 거야. 그때 선배는 수석 보좌관을 데리고 자리 비켜 줄 수 있어? 황 의원이랑 따로 얘기 나눠 보려고.”
“딱히 어려울 건 없네. 지금은 그 호수로 가는 거지?”
나는 약간의 습기를 머금은 풀밭을 가로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끝으로 나와 공희찬 사이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야, 근데 왜 멀쩡한 길드 사무실 놔두고 황 의원을 여기까지 부른 거냐? 굳이 여기까지 부를 필요가 있어? 아니 다른 길드들도 그렇고 굳이 사무실 두고 던전으로 부르더라? 과시인가?”
“아무래도 그렇지. 우리 길드는 신설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이런 던전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면 그 자체로도 흥미를 유발할 테니까. 현실의 공간을 벗어나서 은밀하게 거래를 논의하려는 의도도 있고.”
그렇게 한참을 걸어 숲길에 들어선 뒤에는 황선규 의원을 만나서 해야 하는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더불어 내가 준비한 패를 꺼내 보이는 순간을 가장 근사하게 빛내 줄 그림까지 구상해 나갔다.
* * *
예정된 시간이 다가올 무렵 황선규 의원과 그의 수석 보좌관이 들판에 들어섰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의 모습은 전생에서 기억하던 것과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는 듯했다.
공희찬과 함께 근처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중년의 나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다부진 몸과 회색빛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군데군데 생긴 주름으로 인해 더욱 또렷해진 이목구비는 외국 고전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외양은 3선에 달하는 동안 탄탄한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
들판 가운데서 주위를 둘러보던 황선규의 모습을 눈에 담던 나는 마지막으로 공희찬을 힐긋거렸다. 그는 긴장하는 기색을 숨기려는 듯 심호흡을 했다.
“황 의원이 선배한테 뭔가 물어보면 떠오르는 대로 편하게 대답해. 너무 긴장하지 말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공희찬의 어깨를 다독인 뒤 황선규와 그의 보좌관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낯선 기척을 감지한 두 사람이 돌아볼 즈음 허리를 깍듯하게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도해월 마스터.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첫 만남을 갖다니 참 재미있네요.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가볍게 맞잡은 그의 손은 예상했던 대로 단단하고 마디마다 굳은살이 남아 있었다.
“그건 저희가 의원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기꺼이 방문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도해 길드의 마스터 도해월입니다.”
나와 눈을 마주치며 슬그머니 웃어 보인 그는 곁에 있던 공희찬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그래요, 공희찬 헌터. 다소 난감한 부탁이었을 텐데 선뜻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워요. 국회의원 황선규입니다.”
황선규는 공희찬의 손을 맞잡은 채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공희찬은 다소 노골적인 눈길에도 굴하지 않고 태연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이런 중요한 만남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도해 길드 소속 헌터 공희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희찬은 황선규와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면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황선규는 그런 그의 몸가짐이 마음에 드는 건지 웃으면서 호응했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저희 던전에서 가장 유명한 볼거리를 먼저 살펴보실 수 있도록 안내해 드리고자 하는데, 어떠신가요?”
나는 이윽고 곁에 있던 보좌관과 인사를 나눈 뒤 황선규를 향해 질의했다.
“이곳에 오면 더없이 아름다운 오로라를 직접 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우리 보좌관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그럼 안내해 주세요.”
황선규는 나와 공희찬에게 앞서 걸어도 좋다는 듯 손짓해 보였다. 이어서 나는 그들을 이끌고 호숫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