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85
185화. 불가항력의 재정의 (1)
황선규와의 만남을 마무리하고 난 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문제혁의 생일이 다가왔다. 그동안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며 피로를 느낀 적도 더러 있었으나 이제는 생각만큼 버겁지 않았다. 훈련을 거듭하며 이전보다 체력이 월등하게 상승한 덕분인 듯했다.
그날 관광용 던전에서 나와 황선규가 호숫가에 따로 남아 있는 사이 공희찬도 그의 보좌관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던전을 빠져나오기 전, 그에게서 받았던 명함을 내게 전하는 공희찬의 얼굴엔 화색이 감돌고 있었다.
공희찬을 길드에 데려온 건 어디까지나 내 욕심이기는 했지만, 달라진 생활에 만족하는 게 눈에 보여서 다행이야.
집무실 책상에 앉아서 결재 서류를 들여다보던 나는 방금까지 보고 있던 파일철을 덮으면서 생각했다.
똑똑―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거리고 있을 즈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 설연호가 찾아오기로 했던 시간이었다.
“들어와, 선배.”
긴 한숨을 갈무리하며 문간에 대고 대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문간을 넘어선 설연호가 들고 있던 파일철을 테이블 내려놓는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오늘도 다른 길드 사람들 만나고 온다고 하지 않았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
나는 설연호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 등받이를 끌어 착석했다. 그가 하나씩 내려놓는 파일을 따라서 시선을 옮기고 있으니 금세 대답이 돌아왔다.
“응, 오늘도 다녀왔어. 제일 먼저 만났던 영원 길드부터 시작해서 전에 정했던 순서대로 쭉 만나는 중이야. 다행히 다들 우리랑 생각이 비슷하더라고.”
이어서 그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파일철을 펼친 뒤 소유를 희망하는 던전 지망 목록을 작성하기에 앞서 협의하는 데 동의한 길드의 목록을 보여 주었다.
“이번 주 안으로 성문이 보유했던 던전 목록도 공개된다고 하니까 그때 가서 자세하게 협의하면 될 것 같아.”
“조만간 현선민 헌터도 다시 만나야겠네. 고생했어, 선배.”
나는 그가 내민 목록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어서 설연호는 다른 파일철을 차례로 펼치면서 업무 관련 보고를 간단하게 이어 나갔다.
얼마 뒤 설연호가 내민 서류를 확인하는 것으로 보고가 마무리되었다. 파일철을 한데 모아서 정리하던 그가 문득 나를 마주 보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황선규 의원은 잘 만나고 왔어? 바로 다음 날에 희찬이가 우리한테 얘기해 줘서 대강 알고는 있는데, 너는 어땠는지 궁금해서. 사무실 직원들도 슬슬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아. 이대로라면 바깥에 퍼지는 것도 금방이겠어.”
잔뜩 들떠서 무용담을 늘어놓았을 공희찬을 생각하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피식거리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설연호는 쌓아 놓은 파일 위로 깍지 낀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그거 말고 해월이 너한테 따로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음, 선배가 나한테 뭘 물어보고 싶은지 알 것 같아. 다른 의원들을 두고 황선규 의원한테 가서 도움을 청한 거냐고 묻고 싶은 거지?”
언젠가부터 그가 나의 표정만 보고 속내를 읽어 내는 것처럼 나 또한 그의 의중을 손쉽게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맞아. 황선규 의원이 우리를 돕겠다고 했으니 심사 결과에 관한 건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모쪼록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기는 한데, 만에 하나 거절당했다면 어떻게 하려던 건가 싶어서.”
어느새 호기심을 비롯한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설연호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걸 다 감수하고도 밀어붙였다는 건 뭔가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거라는 생각에 나도 계속 고민해 봤거든. 혹시 황 의원을 찾아간 이유가 네가 생각하고 있는 다음 계획이랑 연관이 있는 거야?”
다음 계획이라. 나는 일순 고개를 기울였으나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금세 알아챘다. 되짚어 보면 설연호는 헌터 아카데미에 재학하며 소모임을 결성하기 위해 계획하던 순간부터 나와 함께해 주었다.
동시에 그는 내가 맞서려는 사람이 차진명이라는 것과 그가 오래전에 사라진 성물을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까지 전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길드 구성원의 수도 어느 정도 확보가 되었고, 이제 내부 상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만 남았으니 다음으로 뭘 하게 될지 궁금할 만도 하지.
“선배가 짐작한 대로 우리 길드의 뒤를 살피는 건 반드시 황선규 의원이어야 했어. 그리고 그건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이랑도 연관이 있는 것도 맞아.”
혼자서 잠시 생각하는 동안 설연호는 어느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입을 떼는 순간 내가 앉은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와 눈을 마주치면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몇 해 전, 나와 동료들이 용산 던전 브레이크를 막아 내면서 바꿔 놓은 현재는 한참 지난 미래인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눈으로 드러난 것 중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단연 성문 길드의 몰락이었다. 우리가 던전 ‘멸절의 설산’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인지한 현선민이 쏘아 올린 신호탄을 기점으로 차진명은 대량의 마석과 실험실로 쓸 만한 던전을 제공해 주던 뒷배를 잃었다.
그 다음으로 차진명은 가장 가까운 조력자였던 강효서를 잃었다. 강효서를 죽게 만든 건 그의 선택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럼에도 전생의 강효서가 그를 대신해 처리했던 수많은 일을 떠올려 보면 차진명은 언젠가 제 손으로 강효서를 처리한 일을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일로 제 아버지인 차정주의 신뢰를 잃었겠지.
거기다 이능청이 승격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건 수많은 던전 브레이크에서 비롯된 인식의 변화였다. 지금은 그 부분이 틀어막힌 상황이다.
전생에서 당시 사람들의 헌터와 길드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건 국회의원이 된 차정주가 던전 브레이크와 같은 재난은 해당 던전의 관리를 소홀히 했던 길드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설파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벼린 화살을 그 전과 달리 노골적으로 각각의 길드에게 겨누었던 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이러한 배경을 인지한 상태로 과거를 되짚어 보면 용산 던전 브레이크 사태가 이능청 승격을 위한 계획의 시발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차정주는 자신이 한평생 꿈꿨던 계획의 첫발을 망쳐 버린 차진명을 탐탁지 않게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차진명이 제 아들이라는 사실은 그가 느끼는 분노와 원망을 상쇄시키는 데 있어 일말의 도움이 되지 못했을 터였다.
어느새 시간이 꽤 흐르기는 했지만 내가 그에게서 앗아온 것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손꼽는다면 바로 성물 유스티티아의 검일 테다. 전생에서 차진명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데 사용했다고 추정하는 그 검을 가져오게 되면서 나는 훗날 그에게 대적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얻게 되었다.
그 힘에 대적할 수 있는 또 다른 성물인 게니우스의 창을 차진명이 소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변수로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 창과 관련한 건 아직 알아보는 단계에 있으니 뭔가 더 알게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겠어.
이윽고 머릿속에 남아 있던 상념을 빠르게 흘려보낸 나는 침묵을 깨뜨리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어. 강효서 선배가 조사 중에 목숨을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선배가 남긴 의혹에 관한 보도가 전부 사라졌던 거, 기억하고 있지?”
“응, 그때 우리를 도와줬던 오한빈 기자가 너한테 방송국 윗선에서 후속 취재를 전부 막았다고 했었다며. 강효서가 생전에 관리했다던 대량의 마석이랑 얽힌 얘기는 이제 인터넷에 검색해도 아예 안 나오더라. 남아 있는 링크를 겨우 찾아서 들어가 보면 그것도 외부 요청으로 삭제됐다고 뜨고. 그것도 벌써 한참 전의 일이야.”
차분하게 되묻는 순간 설연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이내 말하면서 무언가 깨달은 듯한 그는 미간을 슬며시 좁히면서 드문드문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그건 나도 예전부터 궁금하던 부분이었어. 그렇게 많은 마석이 순식간에 없어졌을 리는 없고, 그걸 쥐도 새도 모르게 다시 숨겼다는 건 언젠가는 다시 사용할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싶었거든.”
나는 복잡한 속내를 차분하게 가라앉히고자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압하면서 얼굴을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성문 길드가 몰락하게 된 건 던전 브레이크를 고의로 발생시킨 배후 세력으로 지목됐기 때문이야. 물론 성문이 그 일에 깊이 연루되어 있던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시끄럽게 무너지게 할 필요는 없었어. 그런데도 이렇게 된 건…….”
“진짜 배후 세력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성문을 방패처럼 세운 거겠지. 그렇게 되면 그때랑 비슷한 일이 다시 벌어졌을 때 사람들이 성문부터 의심하게 될 테니까.”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설연호의 음성을 듣다가 명쾌한 해답을 따라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의미에서 난 우리가 막아 낸 용산 던전 브레이크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그 일을 벌인 배후 세력은 특별한 이유 없이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킬 법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뜻이야. 한두 번에서 그칠 게 아닐 것도 분명하고.”
“그게 시작이었다니……. 그래, 다른 것도 아니고 던전 브레이크를 고의로 일으키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사람들이 한 번으로 그칠 리 없지.”
말끝을 흐리던 설연호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길게 탄식하다가 내가 앉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배후 세력이라는 거 말이야. 해월이 넌 이미 차진명을 의심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예전에 차민훈 선생님이랑 성문 길드 사이의 유착 관계가 밝혀졌을 때도 그렇고, 차진명이랑 가까이 지내던 강효서가 조사받던 중에 그렇게 된 걸 보면서 이미 결론을 내린 줄 알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이니까. 만약 확실한 증거가 확보된다고 해도 차진명 선배의 뒤에서 차정주 후보가 버티고 있는 이상 우리가 뭘 알리려고 해 봤자 강효서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말 거야.”
한숨을 푹 내쉬면서 나와 시선을 마주치던 설연호가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가 시선을 허공에 두고 생각에 잠겨 있던 동안 나는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해 보았다.
“그래서 황선규 의원을 찾아갔던 거구나. 성문처럼 큰 길드도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마당에 우리라고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관부에서는 한참 전부터 우리 길드를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기도 했고.”
설연호의 말을 끝으로 집무실 내부에 적막이 감돌았다. 그러는 사이 내가 머릿속으로 떠올린 건 뒤이어 발생할 던전 브레이크에 관한 것이었다.
차진명이 계획한 두 번째 던전 브레이크는 전생과 비슷한 시기에 벌어지게 될까.
지금은 사라진 성물의 존재를 추적하면서 곁가지로 한국마력연구소에 얽힌 것들까지 파고들고 있지만, 앞으로 중점 삼아 집중해야 하는 건 바로 연쇄적으로 벌어지게 될 던전 브레이크였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 이제야 확실하게 이해되는 게 하나 있어.”
이런저런 고민으로 생각이 길어질 무렵 설연호가 입을 열었다. 나는 마저 말해 보라는 듯 그에게 손짓했다.
“아주 오래전에 학교 보건실에서 네가 나한테 했던 말 있잖아. 앞으로 벌어질 재난을 네가 가진 예지력으로 막겠다고 했던 거. 이때까지 그 말에 담긴 의미는 표면적인 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그렇게 말하는 설연호의 얼굴은 회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을 무렵에 헌터 아카데미의 보건실에서 마주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굳은 의지와 신뢰가 깃들어 있다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