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87
187화. 도움닫기 (1)
서애란이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는 자정이 되기 전에 복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까지 확인한 나는 설연호와 함께 저녁을 먹고 회의실로 이동한 뒤 길드에 소속된 헌터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설연호가 팀으로 구분된 인원들을 순서대로 설명하는 동안 나는 스카우트하는 과정에서 읽어 보았던 프로필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그를 통해 전해 들은 것만 종합해 보면 예상 밖의 행동을 하거나 길드 생활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없는 듯했다.
그래도 직접 만난 자리에서 듣게 되는 얘기는 또 다를 수도 있는 거니까. 하나하나 고심하면서 신중하게 데려왔으니 아쉬운 구석이 없도록 좀 더 신경 써야겠어.
설연호는 마지막으로 백이현의 이름을 언급했다. 현선민과의 만남 이후 그는 재단에 소속된 안지유와 이유나와 별개로 길드 내에서의 활동에 집중하기로 한참 전에 협의한 바가 있었다.
“재단 얘기를 듣고 나서 혹시라도 길드 생활에 집중이 어려워지면 어쩌나 싶어서 좀 걱정했었거든. 지내다 보니 그런 건 다 기우였고, 혼자 활동하는 걸 그냥 뒀으면 꽤 아까웠을 것 같다는 생각만 들더라.”
그 설명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전생에서부터 탐냈던 인재가 내가 세운 울타리 안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있으니 내심 뿌듯했다.
이름 있는 헌터를 스카우트하고 길드의 규모를 넓히는 일은 그야말로 머리싸움이었다. 집무실과 회의실을 전전하며 업무를 처리하던 시기가 얼추 지나가고 다른 헌터들과 현장에서 몸을 부대낄 생각을 하니 묘하게 뻐근하던 전신에 활기가 감도는 듯했다.
테이블에 팔을 얹은 채 주먹을 쥐었다가 펼치던 나는 앞으로 벌어질 던전 브레이크를 대비하기 위해 어디서부터 움직이는 게 좋을지 고민해 보았다.
“던전 브레이크 수습 현장처럼 다수의 인원이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는 내가 지휘를 맡게 될 테니 사전에 따로 합을 맞춰 보는 게 중요해. 애초에 전투 설계를 완벽하게 하려면 같이 움직이는 사람들에 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 하고.”
차가운 커피를 마시면서 내 말을 듣던 설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모습을 흘긋 살핀 뒤 다시 문가에 시선을 두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심사 일정이 정리되는 대로 미솔 선배랑 상의해 보고, 다음 달부턴 진행되는 던전 공략 일정에 나도 합류할 생각이야. 자세한 건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있을 때 다시 얘기할게.”
잠시 뒤 설연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어라 대답하려 하자 문간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회의실로 들어선 건 고단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서애란이었다.
“안녕. 연호 선배도 같이 있었네요.”
“응, 얘기가 생각보다 길어졌거든.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겠네.”
“좀 피곤하긴 한데 나쁘진 않아요.”
문을 닫고 들어서면서 설연호에게 가볍게 웃어 보인 서애란은 자연스럽게 그의 옆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이내 테이블에 가방을 내려놓고 안쪽을 뒤적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들더니 나와 설연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해월이한테 먼저 연락해 두기는 했는데. 계속 같이 있었던 거면 뭐라고 보냈는지 선배도 전해 들었죠? 따로 설명할 것 없으면 서류부터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웬만한 건 다 얘기했어. 바로 설명해도 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서애란은 이어서 얇고 불투명한 파일을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어서 파일 속에 담겨 있던 몇 장의 서류를 꺼내자 활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이것부터 읽어 봐. 한 부 더 복사해 왔으니까 선배도 읽어 봐요.”
나와 설연호에게 서류를 내민 서애란이 등받이에 몸을 느슨히 기대면서 숨을 골랐다. 그대로 넘겨받아서 읽어 보는 동안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임상 시험 참여 지원서 및 참가자 동의서]그녀에게 받은 서류는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살펴보니 여느 임상 시험에서 사용하는 안내문과 크게 다른 점이 보이지 않았다.
“지원서에 적힌 내용은 일반적인 임상 시험이랑 비슷해요. 문제는 뒤쪽에 있는 동의서예요. 주의 사항을 자세히 보면 기본적인 임상 시험 윤리를 준수하지 않는다는 게 느껴지죠.”
그 말을 듣고 동의서를 꼼꼼히 검토해 보니 그녀가 방금 언급한 것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통의 임상 시험은 참여자의 자발적 의지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 서류에는 강제적 참여를 독려하는 문장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그러네. 어린 학생들 눈으로 보기에는 용어가 조금 어려워 보이기는 해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을 것 같아.”
서류의 하단을 점검하면서 시험 참여 시 거액의 참여비를 지급한다는 문구가 아주 작은 글씨로 적힌 것까지 확인한 나는 두 사람을 눈에 담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수상하다는 게 훤히 보이는 와중에도 왜 순순히 이끌려 들어가나 했더니. 역시 돈 때문이었구나.”
“맞아. 또 대외적으로 이 시험의 목적은 각성자의 신체 능력 향상을 위한 고기능 포션을 개발한다는 거기도 하고, 마석을 가공한 걸 섭취하게 만든다는 설명은 적혀 있지 않아서 포섭이 더 쉬웠던 것 같아. 그리고 처음 포섭하는 단계에서는 극비로 운영하는 프로젝트니까 제안받았다는 사실도 발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더라고.”
곧이어 대꾸한 서애란은 이어서 자신이 습득한 내용을 마저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시험 참가자의 대부분이 임상 시험의 개념에 대해서 잘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시험 초기의 포섭 대상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는 성인이었어. 시간이 흐를수록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다가 헌터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학생들한테까지 가공물을 보급하기 시작한 거야.”
그러한 사실까지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쯤에서 내가 묻고 싶은 건 다른 부분이었다.
“음, 지금까지 말한 건 전부 이해했어. 그러면 그 시험에 비각성자까지 참여시킨 이유는 뭐래? 전에 재단에서 구조한 사람 중에 비각성자도 있다고 했을 때는 따로 이유가 있나 싶었는데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서. 애초에 임상시험 목적이 각성자를 대상으로 한 고기능 포션 개발이었다며.”
그 말을 끝으로 서류를 내려놓은 나는 서애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세를 바르게 고치면서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떨어뜨린 그녀가 금세 고개를 들었다.
“비각성자를 포섭한 이유는 아직 추측 중이야. 시험 대상은 각성자로 한정하기는 했어도 여러 가지 경우를 수집하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보고 있어.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겠지.”
처음부터 각성자를 대상으로 계획된 시험에 비각성자를 참여시켰다는 건 그녀의 말대로 특정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만약 비각성자가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이 진행한 일의 결과를 보면 의료 기구나 약물 개발 단계에서 최종적인 안정성을 입증하기 위해 진행하는 임상시험이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진행한 비윤리적인 인체 실험이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를 반드시 찾아내야 해. 지금 이대로는 내막을 터트린다고 하더라도 한마연은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빠져나갈 거야.”
눈앞에 놓인 서류를 들여다보면서 시험 대상에 관한 설명을 훑어내린 나는 단호한 목소리를 내며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맞은편에 있던 설연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맞아. 이때까지 비리 의혹 같은 여러 잡음도 있었지만, 아직도 한마연이라고 하면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니까.”
“현선민 헌터도 비슷하게 얘기했어요. 본인이 성문의 비리를 폭로할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몰락할 줄은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그때처럼 모든 상황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는 날은 쉽게 오지 않을 테니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했고,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해요.”
나는 서애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그때와 같은 완벽한 우연을 직조하기 위해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니 그녀가 재차 말문을 열었다.
“한마연이 그 일에 비각성자를 끌어낸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성물이 그 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는 정황은 확보했어.”
맞은편에서 한숨을 쉬던 설연호가 그 말을 듣고 서애란을 돌아보았다.
“불법 마석 가공물을 제조하고,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하는 걸로 추정되는 연구소의 지하 공간에 보관되어 있대. 자세한 위치까지는 추정하기 어렵지만, 그 안에서도 접근하기 가장 어려운 곳에 있는 것 같고.”
이윽고 서애란은 성물 근처에 접근할 수 있는 건 수석 연구원 중에서도 경력이 오래된 사람들이라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전부 박호재 연구소장이 연구소를 설립할 당시부터 함께하던 사람들이며 현시점에서 그들을 지휘하는 건 성민주라는 내용이 뒤따랐다.
“차진명이 가는 곳에 성민주도 항상 따라붙는 것 보면 둘이 예사로운 관계는 아닌가 봐. 방금 했던 얘기까지 듣고 나니까 차진명이 세운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하는 사람이 성민주라는 것까지 확실해졌고.”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설연호를 흘긋거리던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서애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를 한데 모으면서 입을 열었다.
“연구소에 성물이 존재한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는 그 물건으로 뭘 하려고 했는지, 이미 어딘가에 쓰였다면 무슨 목적으로 쓰인 건지 알아볼까 해. 그것까지 혼자 알아보는 건 무리일 듯한데……. 혹시 우리 길드에 나랑 같이 움직일 만한 사람이 있을까?”
“마침 잘 얘기했어.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한성연에서 일했던 최보윤 헌터한테 손을 뻗어 볼 생각이거든. 확실히 믿을 만한 사람인지 확인해 보고 알려 줄게.”
최보윤은 길드 창설 초기에 소속 헌터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설연리의 추천으로 입사를 지원한 인물이었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는 그녀와 얽힌 일을 찾을 수 없었기에 이번 생에서 설연리와 어떤 관계인지 알아보는 것이 우선일 듯했다.
“최보윤 헌터를 통해서 성물에 관해 알아보고 있으면 한도일 마스터랑 정건후 선생님한테도 소식을 알릴 거야. 그 이후로 어떻게 움직일지는 취우 쪽이랑도 얘기를 해 봐야겠지.”
서애란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는 휴대전화를 꺼내 김미솔과 다른 이들에게 날이 밝으면 회의실로 모이라는 연락을 남겨 두었다. 각자에게 배분할 역할을 고민하며 창가를 돌아보니 어느새 푸른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 * *
회의실 창가에 한낮의 볕이 완연해졌을 무렵 김미솔은 회의를 마무리하기 위해 모두의 이목을 모았다. 그러자 테이블 가운데 놓인 지도를 내려다보며 침묵하던 헌터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었다.
“회의는 이쯤에서 마무리할까요? 이번 주는 휴식에서 막 복귀한 인원들을 고려해서 일정을 느슨하게 잡았으니 쉬엄쉬엄 움직인다고 생각합시다.”
그 말을 끝으로 자세를 편하게 바꾼 헌터들이 자신의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미솔은 몇 시간 전 이곳에서 도해월과 나눴던 대화를 상기하며 입을 열었다.
“대신 다음 달부터는 각 팀 던전 공략 일정에 마스터도 합류할 예정이니 참고하시고요. 혹시 질문 있으신 분? 없으면 이틀 뒤에 다시 뵙겠습니다.”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던 이들이 김미솔을 잠시 돌아보았다. 이내 그들은 저마다 화색이 도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며 회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다 끝난 거지? 다음 일정 없는 거면 남아서 얘기나 하자.”
그때 스크린 근처에 서서 자료를 정리하던 김미솔의 눈길을 끈 사람이 있었다. 그녀에게 말을 붙인 건 테이블에 홀로 남아 팔짱을 끼우고 앉아 있던 공희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