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88
188화. 도움닫기 (2)
김미솔은 자신을 기다리며 멀뚱히 앉아 있는 공희찬을 힐긋거렸다. 팔짱을 끼운 채 창문 너머를 바라보던 공희찬은 슬그머니 웃음 짓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뭐냐. 왜 웃는데?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그냥 좀 새삼스러워서.”
의아해하는 공희찬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인 김미솔은 자신의 자리에 놓여 있던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가득 쌓인 자료를 하나씩 확인한 뒤 순서대로 쌓아 올리던 그녀가 손길을 멈춘 채 어느새 한적해진 문간을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사무실에 처음 왔던 날부터 무슨 돈이든 아껴 보겠다면서 종일 불을 끄고 지냈던 게 한참 지난 것처럼 느껴져. 생각해 보면 고작 몇 달 전의 일인데 시간이 엄청 흐른 것 같고.”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던 자료를 빤히 쳐다보던 공희찬은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김미솔의 근처로 다가갔다. 이어서 그는 투박한 손길로 남은 자료를 한데 모으면서 그녀를 힐긋거렸다.
“그때 그거 나 놀린다고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었냐? 내가 그날 사무실에 처음 왔다고 너희끼리 몰래 꾸민 짓인 줄 알았는데.”
“그런 거 아니라니까. 작년 여름이었나? 방학하고 한창 길드 개설 관련해서 이것저것 준비할 때였을 거야, 아마. 한번은 원하랑 해월이랑 둘이 남아 있던 적이 있었거든. 그때 걔들 에어컨도 끄고 그 찜통에서 몇 시간을 일하고 그랬어.”
김미솔이 손짓으로 지시하는 대로 자료를 정리하던 공희찬이 혀를 끌끌 차면서 대꾸했다.
“홍원하가 더위 먹고 헛소리하는 걸 곧이곧대로 받아 줘서 그런 거겠지. 하여튼 해월이 걔도 참 별걸 다 받아 준다니까. 걔가 그렇게 실없는 놈인 걸 다른 헌터들도 알아야 하는데. 안 그러냐?”
그는 자신의 질문을 듣고도 대답 없이 자료를 모으는 일에 열중한 김미솔의 팔을 장난스럽게 툭 건드렸다.
“다음 달부터 마스터가 공략 일정에 합류한다는 얘기만 했는데 다들 안색부터 달라지더라. 너도 봤지?”
새로 전한 소식에 헌터들이 평소보다 들뜬 반응을 보였던 건 지금 도해 길드에 소속된 대다수의 헌터가 입사를 결심한 계기가 바로 도해월이기 때문이었다. 김미솔은 그 사실을 머릿속으로 상기하면서 입을 열었다.
“마스터가 던전 공략 일정에 참여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기다렸다고들 하니까. 면접이나 미팅 자리에서부터 우리 길드에 들어오고 나면 해월이가 정확히 어떤 스킬을 구사하는 건지 알 수 있는 거냐고 묻는 사람이 꽤 많았대.”
그중에서 연령대가 비교적 어린 헌터들은 도해월이 게이트 사고를 사전에 예측하고 막아 내는 모습을 연달아 보게 되면서 그에게 비친 일종의 영웅적인 면모를 선망하고 있었다.
그보다 연배가 높은 헌터들은 도해월이 게이트 사고 현장을 통솔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리더일 것이라고 가늠하면서 길드에 합류했다.
“그 얘기는 나도 들었어. 그 누구였지? 1팀에 있는 A급 헌터도 미팅 자리에서 비슷하게 얘기했다고 하지 않았냐? 예전에 연호한테 들은 것 같은데.”
자료 정리를 마무리하고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털썩 앉으면서 말했다. 순간 고개를 기울이던 김미솔은 피식 웃으면서 맞은편에 앉았다.
“안진영 헌터 말하는 거지?”
“엉, 우리 길드에 A급 헌터는 그 사람밖에 없잖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헌터는 대체 어떻게 데려온 거냐?”
느슨하게 몸을 기댄 자세로 끄덕거리던 공희찬이 되물었다. 그의 말대로 김미솔 역시 긴 휴식 끝에 복귀한 흙 속성의 A급 헌터 안진영을 스카우트하겠다는 도해월의 말을 들었을 때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생각하며 반신반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해월이가 안진영 헌터를 데리고 오고 싶다고 말했을 때는 나랑 연호도 잘못 들은 줄 알았어. 연호도 그때는 그쪽에서 바라는 조건을 맞추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거라면서 재고해 보는 게 어떠냐고 하더라.”
어느새 한적해진 회의실 내부를 둘러보던 김미솔이 고개를 내저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상체를 앞으로 반쯤 숙이면서 흥미로운 기색을 보이던 공희찬에게 시선을 옮겼다.
“우리가 다 반대하는데도 자기가 무조건 데려올 수 있다고 밀어붙이더니 네 번째 미팅에서는 사무실에 데려와서 계약서까지 작성했어.”
그녀의 말을 듣던 공희찬은 무언가 떠오른 건지 허공에 손을 펼친 채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입속말로 무어라 중얼거리던 그는 금세 팔을 떨어뜨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진영 헌터 입장에서는 우리 길드가 제시하는 조건이 다른 대규모 길드에서 부르는 것보다 턱없이 부족했을 것 같은데.”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우리도 잘 몰라. 나중에 본인한테 듣기로는 해월이가 자기가 바라던 조건을 정확하게 맞혔다고 하더라.”
김미솔은 그 말을 끝으로 안진영과 관련한 화두에 더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안진영을 만나겠다고 결심하던 순간에 마주했던 도해월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A급 헌터가 하나 있고 없고가 차이가 크다며, 자신이 직접 안진영 헌터를 설득해 보겠다고 하던 도해월의 확신에 찬 눈빛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두 사람은 미팅 자리에서 생전 처음 만났다고 했어. 하지만 해월이는 안진영 헌터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처럼 말했었지…….’
이후에도 도해월은 외부에서 활동하던 헌터들을 데려오고, 규모가 작은 길드를 인수 합병하는 등 일련의 과정을 망설임 없이 진행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데려오고자 했던 사람들을 전부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눈앞에 있는 공희찬도 따지고 보면 도해월이 그렇게 데려온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나저나 이 시간 이후로 회의실 쓰는 사람 없는 거지? 내가 알기로는 그런데.”
그때 공희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어서 그가 반쯤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복도를 살펴보았다.
“오늘은 더 없으니까 편하게 얘기해도 돼.”
김미솔이 넌지시 말을 건네자 공희찬이 금세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이전과 달리 사뭇 심각해진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까 여기서 해월이랑 애들한테 들었던 얘기, 전부 다 사실인 거지? 아직도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을 만큼 어이없는 상태라서.”
몇 시간 전, 도해월의 소집으로 오전 시간에 이곳에 모여 있던 이들이 전해 들은 건 불법 마석 가공물과 관련하여 서애란이 알아낸 내막이었다.
김미솔과 공희찬 또한 그녀가 그 일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상태였으나 두 사람은 각자 맡은 길드 업무에 매진하던 참이기에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옛날부터 한마연 놈들 뒤가 구리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만, 뒤에서 그딴 짓을 벌일 줄은 몰랐지.”
김미솔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공희찬의 옆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공희찬이 먼저 회의실을 벗어난 뒤 따로 남아서 성물에 관한 이야기까지 전해 들은 그녀는 여러모로 복잡해진 참이었다.
“아까 들은 얘기는 당분간 기밀로 유지하기로 했으니까 해월이가 뭔가 지시하기 전까지는 우리끼리도 말을 아끼는 게 좋겠어. 그리고 당장은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던전 브레이크를 대비하는 일에 집중하는 게 먼저니까. 길드 분위기도 완전히 안정시켜야 하고.”
태연하게 대꾸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공희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만 보면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으나 김미솔은 굳이 되묻지 않았다.
“지금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는데. 그래도 뭐, 사람 속내는 말하기 전까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아, 그 뭐 하반기 되기 전에 급하게 필요한 사람 한해서 장비도 새로 맞출 거라며. 연말에는 전체적으로 업그레이드하고.”
“그건 아직 확정은 아니야. 예산 관련된 건 예성이랑 그쪽 팀 사람들이랑 해서 따로 얘기해 봐야 하거든.”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공희찬이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맑은 하늘 아래 우뚝 선 남산 타워였다.
“바깥이 저렇게 평화로운데 조만간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니……. 기분이 참 이상하네.”
그가 말끝을 흐리는 동안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던 김미솔이 고개를 들었다. 한때 한국성물연구소에서 근무했던 최보윤에게 메시지를 보낸 그녀는 공희찬을 따라서 창밖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 * *
회의실에서 동료들과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이능단속‧관리본부에서 성문 길드가 보유했던 던전의 목록을 공개했다.
목록을 전체적으로 점검한 뒤 집무실에서 남은 일과를 마무리한 나는 현선민과 사전에 약속했던 대로 저녁이 깊어졌을 무렵 먼 길을 가로질러 파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개인 공간으로 안내한 현선민은 던전 목록과 용산구의 지도를 나란히 펼쳐 놓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잠잠히 듣고 있던 것도 잠시, 현선민은 곧 입을 다물고 나를 돌아보았다.
“음, 설명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지망 순서는 도해에 소속된 헌터들 특성에 맞게 결정하면 될 테니 우리는 이쯤에서 정리할까요?”
공개된 던전의 목록을 차례로 살피면서 각각의 특성과 이점을 곱씹어 보던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 몇 시간은 훌쩍 지나 있는 상태였다.
“좋습니다. 최근에는 서애란 헌터를 통해 하늘 보육원에서 달에 한 번씩 아이들을 연구소 쪽으로 넘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황이 파악됐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전체적인 윤곽은 잡혔지만,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맞아요. 덜미가 잡힐 가능성을 우려하여 조사를 잠시 보류해 두었던 참이었습니다. 혹시 추가로 습득한 정보가 있는 건가요?”
근처에 놓인 커피를 마시면서 목을 축이던 현선민이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용산구 지도를 살피던 나는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기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번 주말에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 하늘 보육원에 방문할 생각입니다. 그날 가서 제대로 된 내막을 파악할 예정이고요. 그리고 그전에……. 현선민 헌터에게 개인적으로 질문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나는 이윽고 마른 입술을 축이면서 말했다.
“불법 마석 가공물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비각성자가 연루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당장은 공식적으로 알아낸 바가 없다고 하지만, 현선민 헌터라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 쪽에서도 공식적으로 확보된 사안은 없어요. 다만, 오래전부터 저 혼자서 짐작하는 이유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현선민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허공에 시선을 두고 숨을 가볍게 고른 뒤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