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9
19화. 실습 보상 (3)
“제가 알고 있는 건 뭐든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배정민과 맞잡았던 손을 느슨하게 놓은 나는 자리에 다시 착석했다.
일행의 건너편으로 착석한 그는 들어오면서부터 들고 있던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앞서 말씀드렸던 대로 마스터님의 말씀부터 전달하겠습니다. 우선 마스터님께서 일정상의 이유로 이 자리에 직접 오지 못하신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대신 전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입장한 던전의 등급 상승을 예측하지 못했던 점은 전적으로 저희 길드의 책임이므로 이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어조로 말하던 배정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이 숙였다.
반듯한 자세로 앉아 읊는 목소리는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고 정중했다.
시종일관 공손한 기색을 유지하면서도 눈동자는 피로에 절어 붉게 충혈된 상태였다.
“이번 사태의 사건 경위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며칠 전 여러분이 입장한 던전 ‘비탄에 잠식된 신전’은 이때까지 헌터 아카데미 학생들도 비교적 안전하고 수월하게 실습을 진행할 수 있도록 관리되었던 던전 중 하나였습니다.”
배정민은 펼친 서류철의 방향을 나와 다른 사람들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반대로 틀어 보여 주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저희 길드에서는 최소 3년 이상 던전 등급이 상승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로 유지된 던전 중에서도 자체적으로 지정한 관리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던전만을 학생 실습용으로 개방하고 있습니다.”
그가 내민 서류에는 나와 조원들이 다녀온 던전에 관한 보고 기록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여러분이 다녀오신 던전은 사방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이처럼 지형적 특성이 다소 독특한 만큼 등급 자체가 높게 책정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잘 아시다시피 몬스터 처치 자체는 어렵지 않으셨을 겁니다.”
배정민이 손끝으로 던전의 이름과 등급, 특성을 차례로 가리켰다.
차분한 어조의 브리핑을 듣고 있으니 과거의 한순간으로 되돌아간 듯했다.
나는 그때처럼 고개를 가벼이 까딱이면서 배정민의 말을 경청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확인할 것이 예고 없이 등장한 A급 몬스터에 관한 것입니다. 저희 쪽에서 실습 직전까지 마나 수치 변동 가능성을 철저하게 확인했던 만큼 이번 사태에 관해서는 진심으로 유감이라는 점 재차 전해 드립니다. 고로 이번 사태의 진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증언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가 서류의 다음 장을 넘기자 며칠 전의 상황 보고 항목 또한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개중 유난히 눈에 걸리는 문장을 입속말로 되뇌어 보았다.
한참 미래에 등장해야 했을 녀석이 어째서 지금 시점에 등장했는지 골몰하다 보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저희도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A급 몬스터가 등장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요.”
난데없이 나타난 스킬라를 보고 제일 놀란 사람은 나였다는 말은 삼켰다.
온갖 보급품과 최고급 무기로 중무장한 S급 헌터 무리조차도 쉽게 대적할 수 없던 녀석을 갑작스레 맞닥뜨린 직후 놀라서 자빠지지 않은 게 다행일 노릇이었다.
“네, 저희도 여러분의 심정이라면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제가 궁금한 건 따로 있습니다. 먼저 조장 도해월 학생에게 묻겠습니다. A급 몬스터 스킬라를 직접 공략하는 대신 해독제를 통해 시간을 벌어 우회하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그야 이미 녀석을 처치해 본 경험이 있으니까.
과거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기에는 우리가 지나치게 약해진 상태이기도 했고.
“제가 가진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스킬을 시전하여 저희가 공략할 수 있는 최적의 방안을 고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해독제를 제조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마침 설연호 선배처럼 뛰어난 힐러가 같은 조에 배정된 덕분이었죠.”
그렇게 말하면서 근처에 앉아 있던 설연호를 가리켰다.
나와 설연호를 차례로 살피던 배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로 공이 넘어오는 것이 불편했던 건지 설연호는 말을 덧붙였다.
“제가 한 건 시약을 제조한 것밖에 없습니다. 조장이 의견을 좋은 의견을 냈고, 조원들도 도와준 덕분에 성공적으로 우회할 수 있었던 것뿐이에요.”
그 말을 곱씹으려는 것처럼 음, 하는 소리를 내던 배정민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표정만 보면 석연치 않은 것 같은데.
혹시 우리를 의심하는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대체 뭘 의심하는 거지?
“네, 잘 알겠습니다. 진술해 주신 대로 저희 자료에도 기록될 예정이니 그 부분은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말을 기점으로 장내의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배정민의 말을 듣고 있으니 리호 길드의 반응이 어느 정도 예상되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책임을 되도록 줄이고 싶은 거다.
사태가 악화되어 그대로 던전 브레이크라도 발생한다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게 될 테니까.
“A급 몬스터를 대척할 때 실질적으로 가장 힘을 쓴 건 저라고 생각해요. 제가 그 몬스터의 주의를 끌지 않았다면 다들 공격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그새를 못 참고 공희찬이 끼어들었다.
그 말을 듣던 배정민은 서류철을 접으면서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른 학생들의 활약상도 전해 들었습니다. 전부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화 중에 한마디라도 얹은 것이 뿌듯했는지 공희찬의 어깨가 의기양양해졌다.
“저희가 아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원하시는 만큼 조사에 협조하고 싶어도 알고 있는 게 없으니 말씀드릴 것도 더 없는 상황이라는 건 잘 아실 것 같은데요.”
배정민은 나의 말에 부정하지 않고 선선히 끄덕거렸다.
잠시 입을 다물고 한숨을 남몰래 내쉬던 그가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혹시 여러분 중에 불법 마석 가공물을 소지한 채로 던전에 입장하신 분이 계십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정건후가 저지하며 끼어들었다.
조원들과 배정민의 대거리를 지켜보던 그가 나선 건 처음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 사태는 자칫 잘못했다가는 던전 브레이크 사태로 발생할 수 있을 만큼 위험천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책임 소재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저희 길드의 뜻이기도 하고요.”
그 설명까지 듣고 보니 배정민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는 대부분 알 수 없는 우연에 의해 발생한다.
전조 증상은 던전 내부의 마나 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다 못해 폭발적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상승한 마나 수치가 게이트와 던전 외부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발생하는 것이 던전 브레이크 사태다.
이때까지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는 전부 우연에 의해 발생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그 원인이 마나 수치의 급상승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연구자들은 한 가지 놀라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건 바로 의도적으로 던전 브레이크 사태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 확인된 바는 없으나 이론상으론 가능한 일이었다.
그 여파로 마나 에너지의 집결체인 마석을 다루는 법안 또한 더욱 엄격해졌다.
“지금 우리 학생들이 의도적으로 던전 등급을 상승시켰다는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리호 길드 측에서 이런 식으로 헌터 아카데미를 의심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아뇨, 선생님. 우선 진정하세요. 저희는 우선 그럴 가능성만 제시하는 겁니…….”
“가능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의심의 여지가 존재한다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학교 측에서도 법적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어요. 아이들의 목숨이 걸려 있던 아주 위험하고 끔찍한 사태라는 걸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배정민과 정건후의 대치가 팽팽하게 이어졌다.
나는 한숨을 삼키면서 배정민이 테이블에 펼쳐 둔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던전에 입장한 직후 내가 스킬을 통해 내다본 미래는 첫 번째 몬스터 통곡의 피라미가 등장하는 대목까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의 스탯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선의 범위였다.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계속 벌어진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이번 실습에서는 설연호의 기지로 무사히 해결할 수 있었으니 다행일 망정이었다.
우려되는 점은 내가 가진 기억과 눈앞의 상황이 다르게 펼쳐지는 건 이번이 첫 번째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커뮤니티의 가입 조건이 변경되는 것만 해도 당황스러운데 그 배후에 성문 길드까지 가담했다고 하니 알아내야 할 것이 산더미로 불어난 셈이다.
이런 불가항력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매번 스킬을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막막하지만 별수 있나. 상황이 뒤바뀐다고 해도 다시 그 이후를 예측하는 수밖에.
머지않아 배정민과 정건후의 대치는 정건후의 강건한 대응으로 끝을 맺었다.
배정민도 우리를 의심하는 기색을 거두고 보고서의 다음 내용을 짚어 나갔다.
나는 은연중에 번지는 염려와 두려움을 가라앉히고자 숨을 길게 내쉬었다.
“힘들면 더 무리하지 마. 너무 부담 가질 것 없어. 선생님한테는 내가 말할게.”
그때 고개를 기울이며 작은 소리로 말을 붙인 건 홍원하였다.
언제부터 지켜본 것인지 홍원하의 눈길에서 걱정이 묻어났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가볍게 가로젓곤 입을 열었다.
“보여 주신 보고서를 쭉 읽어 봤는데요. 결론은 A급 몬스터의 등장이 길드 측에서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고, 후속 조치를 통해서도 그 이유를 단정지을 수 없다는 말씀이신 거죠?”
“네, 정확합니다. 이번 사태는 다른 사태에 대비할 수 있는 선례로 남을 예정인 만큼 분석은 좀 더 진행될 예정입니다.”
“저희에게 더 알려 주실 수 있는 건 없나요? A급 몬스터가 갑자기 등장했을 때 던전 수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도 궁금합니다.”
“그 부분은 보고서의 다음 장을 넘겨 보시면 됩니다,”
배정민의 지시를 따라 홍원하가 종이를 한 장 넘겼다.
“보시는 것처럼 A급 몬스터가 등장할 무렵 마나 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고 있다는 관리자의 보고가 있었지만, 저희가 소지한 측정 기구에는 등급 변동 사항이 표시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네? 그게 말이 되는 건가요?”
“이론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복귀한 이후는 물론이고 오늘 오전에도 던전 등급 측정 기구를 거듭 점검해 보았지만 어떤 오류도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죠.”
던전 등급 측정 기구는 게이트 시대 이후 가장 활발한 개발이 이루어진 물건 중 하나였다.
던전 브레이크 직전, 그 주변부까지 영향을 미칠 만큼 마나 수치가 폭발적으로 상승한다는 사실을 입증한 다음부터는 현시대에 가장 중요한 물건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그만큼 최첨단의 기술력을 자랑하며 날마다 발전하는 기구가 오류를 범하다니.
들을수록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뒷덜미를 손아귀로 몇 번 주무른 다음 자세를 가다듬었다.
배정민과의 대화는 보고서를 몇 장 더 넘긴 후에야 마무리되었다.
나는 그에게 몇 번 더 질문해 보았지만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당장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사유 미상’이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