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90
190화. 도움닫기 (4)
다시 날이 밝은 뒤에는 문제혁과 함께 보육원으로 이동했다. 한참을 걸려 도착한 뒤로도 곧바로 건물로 들어가지 않고 탑승했던 차량 근처에 서 있던 그는 사뭇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계속 그러고 있으면 팔 아플 텐데.”
문제혁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자신이 들고 있던 상자를 고쳐 들었다. 그가 들고 있는 상자 속에는 보육원 아이들에게 기증할 장난감과 책이 잔뜩 들어 있었다. 물건을 옮기기 수월하도록 팔을 걷어붙이고 있으니 그가 착용하고 있던 시계가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그거 내가 준 거네. 마음에 들어?”
들고 있던 상자를 한가득 쌓여 있던 상자 더미에 내려놓던 문제혁이 시계를 흘긋거렸다. 그는 슬며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뒤 또 다른 상자를 가져와 옮겼다.
“당연하지. 나 웬만해서는 학교에서 형이랑 선배들 얘기 잘 안 하는데, 이거 받고 나서는 애들한테 자랑하고 다녔어. 내가 이걸 누구한테 생일 선물로 받은 건지 아냐고 하면서.”
얼마 전, 내가 그에게 선물한 시계는 전생의 그에게 선물했던 것과 흡사한 것이었다. 그때는 누군가에게 받은 뒤 보관하던 것을 대충 건넨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그와 디자인이 흡사한 아티팩트를 성심성의껏 골라 선물했다.
“그랬더니 애들이 뭐래?”
피식 웃으면서 되묻고 그를 따라서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건물 안쪽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 우리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건지 주위가 잠잠했다.
“다들 부러워서 어쩔 줄 모르지, 뭐. 어떤 애는 도해 길드에 너무 들어가고 싶어서 조기 졸업은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아봤다고 했어. 내가 그 성적으로 조기 졸업은 불가능할 거라고 하니까 되게 슬퍼하더라.”
“그게 그렇게 슬퍼할 일인가?”
문제혁의 모습을 살피는 동안 슬금슬금 입가를 비집던 웃음이 그 말을 듣는 순간 크게 터져 나왔다. 고개를 절레 저으면서 상자를 옮기고 있으니 멀리서 누군가 나와 문제혁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구, 세상에! 이게 누구야. 우리 해월이랑 제혁이 아니니? 세 시에 온다고 하더니 왜 벌써 왔어.”
단숨에 달려 나온 최성일이 내가 들고 있던 상자를 대신 가져가 들었다. 이어서 그는 차량 근처에 쌓여 있던 상자를 훑으면서 과한 소리로 감탄했다.
“뭘 또 이렇게 많이 들고 왔어. 뭐, 우리 애들한테 뭐든 더 해 줄 수 있으면 나야 너무 좋지만. 그래,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어서 들어와. 밖에 있는 짐은 봉사자들 시켜서 옮기라고 할게.”
문제혁이 들고 있던 상자까지 빼앗아 내려놓은 그는 나와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안쪽으로 이끌었다. 나는 그의 손길을 자연스레 거두면서 문제혁을 한차례 흘긋거렸다.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그를 발견한 뒤 다시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면서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라서 들어선 원장실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여전히 내부 곳곳에는 보육원 출신인 헌터들의 사진을 비롯한 각종 소식지가 잔뜩 붙어 있었다.
“어서 들어와라. 대체 이게 얼마 만이니. 언제든 생각나면 놀러 오라고 그리 일렀건만. 모쪼록 얼굴 보니 좋구나. 선생님은 나가서 마실 것 좀 가져올 테니까 앉아서 좀 쉬고 있으렴.”
변하지 않은 건 최성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면서 그간의 기억까지 제멋대로 미화시킨 듯했다. 영문도 모르고 그의 애틋한 눈길을 받아 내던 문제혁은 헛기침하면서 의자에 앉았다.
“형, 잠깐 이리 와 봐. 저쪽 선반에 있는 거 다 형 사진 아니야?”
최성일이 원장실을 벗어난 뒤에야 내부를 크게 둘러보던 문제혁이 맞은편에 있는 선반을 가리켰다. 입구 근처에 서 있던 나는 그제야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마주한 건 책장 한 칸을 가득 채운 액자들이었다. 액자에 담긴 건 내가 몇 달 전에 진행한 인터뷰 사진과 우리 길드의 행보를 다룬 뉴스 기사를 스크랩해 둔 것이었다.
“음……. 뭐가 되게 많네.”
그것들을 한눈에 담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지어졌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의 나는 원장이 공들여 장식한 사진 속 사람들을 내심 부러워했었다. 그리고 이 사진들의 의미를 알려 주면서 내가 가졌던 소망을 깨뜨린 것이 바로 주해나였다.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나는 불쑥 떠오른 기억을 자연스럽게 외면하면서 문가를 슬쩍 돌아보았다. 이내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그가 문제혁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계획했던 일을 진행하려면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원장 선생님은 내가 계속 붙들고 있을게. 형이 어제 말했던 대로 정기 후원 얘기만 슬쩍 흘려도 되는 거지?”
그때 선반에서 시선을 거두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문제혁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문가 너머로 말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맞아. 최종적인 결정은 내가 하는 거지만, 제혁이 네가 잘 얘기하면 들어줄 수도 있다고 강조하면 계속 물고 늘어질 거야. 그것 말고도 보육원 상황이 어떤지 최대한 알아봐 줘.”
그 말을 끝으로 원장실을 벗어나 긴 복도를 가로질렀다. 일전의 최성일은 봉사자들이 후원 물품을 옮겨 준다고 했으나 내부는 이전과 다름없이 고요할 뿐이었다.
오늘처럼 바깥에서 손님이 오면 다들 나와서 맞이해 주는 게 보통인데…….
빠르게 걷는 동안 건물 내부를 살펴보았으나 공부방이나 놀이방을 비롯한 공간들이 하나같이 비어 있는 상태였다.
설마 일부러 숨긴 건가? 그건 아닐 텐데.
그대로 건물 바깥으로 향하니 문제혁과 내가 가져온 후원 물품이 담긴 상자 또한 같은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물품에서 시선을 거둔 뒤 스킬을 사용하기 적절한 곳을 찾아서 이동했다.
이어서 본관과 신관이 이어지는 중간 지점을 지나쳐 두 건물이 한눈에 담기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선 건물과 마주하고 있으니 이곳에서 보낸 시절의 기억에 순간적으로 압도되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억에 휘둘릴 만한 때가 아니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통화하는 척 귓가로 가져가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건물 주변은 여전히 이상할 만큼 고요했지만 어딘가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을 대비하면서 고개를 반쯤 숙인 뒤 눈을 감았다.
[사용자가 지정한 스킬 ‘천리안’이 발동됩니다.]그 순간 눈앞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오르면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도해 길드 사무실.
던전 공략 일정에 앞서 회의를 마치고 나온 서애란은 최보윤의 연락을 확인한 뒤 곧장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처음으로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 이틀 전의 일이었다.
그날 최보윤에게 앞으로 함께 성물에 대한 조사에 착수해 달라고 했던 제안을 생각하면 결정하는 것에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서애란은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을 지우면서 무거운 철문을 넘어섰다.
“조금 더 고민해 보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연락해 주셨네요.”
머지않아 여과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눈살을 찌푸리던 서애란이 말했다. 그러자 난간 근처에서 사색에 잠겨 있던 최보윤이 반사적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짧게 자른 밝은 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바람을 따라서 부드럽게 나풀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애란은 그녀에게 눈인사를 전하면서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만약 제 예전 동료들이 같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면 그날 바로 서애란 헌터를 돕겠다고 했을 거예요. 이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와 동료들은 그 물건의 행방을 계속 궁금해했거든요. 각자의 방식으로 추적해 보려는 사람도 적지 않았고요. 하지만 저는 한참 전에 연구소를 나온 상황이라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서애란은 이전 만남에서 최보윤이 한국성물연구소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던 기억을 곱씹어 보았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연구원들은 각각의 팀에 속해 있고 그들은 저마다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성물이 다르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속한 팀이 오랫동안 연구했던 성물은 게니우스의 창이었다. 그들이 2014년에 창이 사라진 이후에도 그것을 계속해서 연구했던 이유는 성물 연구자로서 일종의 도의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날 최보윤이 서애란에게 전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게니우스의 창 다음으로 자신이 속한 팀에서 연구하던 건 유스티티아의 검이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중점 연구 대상이 변경된 것이 몇 년 전의 일이었다는 설명까지 듣고 시기를 셈해 보니 차진명이 유학을 이유로 사라졌던 때와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이틀 전에 만났을 때 연구 대상이 변경된 일이 굉장히 갑작스러운 처사였다고 하셨던 게 기억나네요. 그때 연구소장이 최보윤 헌터와 다른 동료들이 그동안 연구했던 자료를 전부 폐기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건가요?”
이윽고 최보윤과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까지 되짚어 낸 서애란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때 최보윤은 혹시라도 자료가 남아 있다면 어떻게든 도울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현실적인 도움을 제공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했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정리하라는 명령은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수 년도 넘게 그 물건만 연구했던 학자들에겐 이때까지 지나온 시간과 그 안에 깃든 노력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라는 말처럼 들렸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한 건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잠시 말을 멈춘 최보윤은 주위를 경계하면서 자신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내 그녀가 꺼내 보인 것은 카드 형태의 출입증이었다.
“이건 한국성물연구소 단지 내부에 있는 도서관 출입증이에요. 성물과 관련한 자료는 물론이고 성물의 근원이 되는 고대 서사시와 문학 관련 서적이 십만 권 넘게 보관되어 있어서 규모가 상당하죠. 퇴사하기는 했지만 이게 있으면 출입할 수 있을 거예요.”
서애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가 내민 출입증을 들여다보았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소장의 지시가 있고 나서 관련 자료가 전부 처리되었었는데, 여기저기 알아보고 나니 그게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게 아니라면 연구소 내부에 자료가 아직 남아 있다는 건가요?”
자료가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최보윤의 말에 서애란은 단번에 화색을 보이면서 되물었다. 그러자 최보윤이 출입증을 다시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아직 확언할 수 없지만 가능성은 있어요. 창이 발견되기 한참 전에 상상의 복원도를 완성하고 연구소 설립 초기부터 근무했던 연구자 선배가 관련 자료를 도서관 곳곳에 숨겨 놨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그 선배가 괴짜인 것도 알고, 연구에 진심인 것도 알았지만 무슨 보물찾기처럼 일을 꾸며 놓다니……. 솔직히 믿기 어렵죠?”
최보윤은 냉소적인 말투와는 달리 의욕적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전에 성물의 존재를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을 때 그녀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감돌던 걸 생각하면 긍정적인 변화였다.
“수십만 권이 넘는 책들 사이에서 우리가 원하는 자료만 찾으려면 꽤 많은 품이 들겠네요. 일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에게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최보윤 헌터가 저와 함께할 의사가 있다면 아예 팀을 꾸려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서애란은 잠시 난간 너머를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 계획을 구상한 뒤 최보윤에게 질문했다. 그리고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정건후를 떠올렸다. 만약 최보윤의 말이 사실이라면 생각보다 더 이른 시일 내에 희망적인 소식을 그에게 전할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