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91
191화. 도움닫기 (5)
나는 전신을 휘감았던 미온의 바람이 완전히 걷히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서 올려다본 하늘은 이전처럼 화창했다.
빠르게 박동하는 심장 부근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른 다음에는 휴대전화의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문제혁은 내가 늦어질 것을 예상한 건지 천천히 들어와도 된다는 메시지를 이미 남겨 놓은 참이었다.
그래도 너무 늦으면 수상하게 생각할 거야. 빨리 정리해 보고 들어가자.
휴대전화를 집어넣은 뒤 직전까지 무의식 속에 불규칙하게 들이닥치던 장면들을 곱씹어 보았다. 이전부터 짐작했던 대로 우리가 다녀가고 며칠이 지난 뒤에는 아이들이 입양 브로커를 통해 차출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여러 모습이 보였었는데…….
아이에 관한 장면들도 보였던 만큼 이 자리에 멈춰서 깊이 몰두하는 대신 잘 기억해 두었다가 서애란과 현선민에게 전하면 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잘못 본 건 분명 아니었어. 천리안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는 건…….
조만간 이곳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예정이라는 뜻이었다. 끝도 없이 들이닥치는 미래의 장면 중에서 스치듯 지나친 것에 불과했지만 그건 반드시 벌어질 일을 예고하고 있었다.
정확한 지역은 확보되지 않았으나 피해 규모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으로 추정되었다. 더불어 그 안에서 정확한 날짜를 확보할 수 있을 만한 힌트를 얻었으니 나머지는 사무실에 돌아가서 계산해 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스킬을 통해 습득한 정보를 곱씹으며 간단하게 정리하고 있으니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차분하게 숨을 가다듬으면서 건물 입구 쪽으로 걸음을 틀었다.
그렇게 입구까지 몇 걸음 남겨 두지 않았을 무렵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던 질문 중 하나가 유난히 선명해졌다. 그건 바로 다음 던전 브레이크가 어디서 일어날지에 관한 것이었다.
전생의 기억과 비교해 보면 조만간 일어날 던전 브레이크는 과거와 전혀 다른 시기에 벌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다는 건 그 사태가 발생하는 장소 또한 그때와 달라질 확률이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해월이는 언제……. 아직도 통화…….”
그때 활짝 열린 입구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그대로 걸음을 재개한 나는 복도를 서성이면서 머릿속에 흐릿하게 떠오른 기억을 곱씹어 보았다.
전생의 내가 용산 던전 브레이크랑 비슷한 패턴으로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에 관해서 차진명한테 얘기했던 적이 있었어. 그게 아마……. 평택 던전 브레이크였지.
말끝을 흐리는 순간 그와 얽힌 기억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꺼내 보지 않은 나머지 먼지가 쌓인 것처럼 흐릿했을 뿐 평택 던전 브레이크는 나에게 있어 반드시 바로잡고 싶은 기억 중 하나였다.
휘익―!
그때 등 뒤에서 낯선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으나 특별히 눈에 띄는 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방금 그건 분명 사람이 낸 소리였다.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고요하던 이곳에서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의 기척을 느낀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나가서 살펴봐야 하나?
“통화가 길어지는 건가? 그런 거면 그냥 선생님이 나가서…….”
그런 질문이 무색하도록 원장실 근처에서 최성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문제혁이 다시 화두를 돌리는 듯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했으나.
휘! 휙!
이번에는 연달아 두 번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다시금 뒤를 돌아보니 입구 근처에서 누군가의 형체가 아른거리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것이 어린아이의 뒷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입구 쪽으로 몸을 틀었다.
* * *
삑―!
한편 한국마력연구소 지하에서 부지런히 배회하던 연구원을 멈춰 세운 건 기계의 오류를 알리는 날카로운 소리였다. 검은색 안경이 콧잔등까지 내려온 연구원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부랴부랴 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그가 다다른 곳은 불법 마석 가공물, 일명 레드 문을 섭취한 사람들이 따로 모여 있는 공간이었다. 불투명한 문을 열고 들어서니 피험자가 각각의 침상에 누워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연구원은 소리가 났던 기계 쪽으로 다가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기계를 먼저 살핀 그는 길고 가는 선으로 팔이 연결된 어린아이의 안색을 가늠해 보았다. 아이의 얼굴은 이곳에 있는 이들과 다를 것 없이 창백한 상태였다.
“방금 어디서 난 소리죠?”
입술을 잘근거리며 초조한 심정을 그대로 내비치던 연구원이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기계와 팔을 길고 불투명한 선으로 연결한 채 잠든 누군가의 안색을 살핀 뒤 다시 문간을 넘어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기계 설정에 오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방금 제가 확인했습니다.”
실험 진행 결과가 적힌 차트를 품에 안은 연구원이 수석 연구원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수석 연구원은 한눈에 보아도 말단 같은 그를 잠시간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혈액 검사 결과는요?”
수석 연구원은 자신이 이동할 방향을 손짓한 뒤 걸음을 옮겼다. 그 곁을 따르던 연구원은 차트를 내려다보면서 긴장한 듯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물 연구소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그는 마력 연구소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것으로 모자라 단숨에 지하까지 내려온 지 일 년이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아직도 이곳의 낯선 분위기에 적응하고 있는 그가 최근 수석 연구원의 지시를 받고 새로 모집한 샘플은 대부분 미성년자였다. 개중에는 미취학 아동도 대여섯 명 정도 존재했다.
“이번 검사에서도 수치 변동은 크게 없었습니다. 이대로라면 말씀하셨던 시일 내에 눈에 띄는 변화를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실험체의 연령대가 낮아지게 되면서 효과는 미미하고 부작용 속도는 이전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도 하고요.”
수석 연구원에게 직접 차트를 보여 주면서 설명하던 연구원은 말문을 닫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성물 연구소와 마력 연구소의 분위기가 상반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머무르는 지하는 편차가 더욱 극심한 듯했다.
그럼에도 그가 이곳에 넘어온 이유는 마력 연구소 측에서 거액의 연봉을 조건으로 자신에게 스카우트를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성물 연구자의 관점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를 설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물 연구소에서 모종의 사명감을 품고 일하던 그는 마력 연구소의 제안에 적잖이 당황했었다. 두 연구소에서 다루는 범위가 전혀 다를뿐더러 마력 연구소 사람들이 성물 연구소를 업신여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같은 팀에 속해 있던 다른 연구원에게도 같은 제안을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 연구원은 마력 연구소가 지향하는 것과 자신의 가치관이 일치하지 않는다면서 제안을 거절했다고 했다.
‘가치관 차이는 무슨. 듣기로는 한마연이 제안하는 것도 거절하고 얼마 안 지나서 퇴사까지 했다던데. 그러고 나서 무슨 길드에 들어간다고 했었지?’
같은 제안을 받았던 또 다른 연구원을 떠올리던 그는 마음을 은근히 짓누르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짧은 합리화를 끝으로 남몰래 한숨을 내쉰 뒤 수석 연구원을 바라보았다.
“내일부터는 복용량을 좀 더 늘리도록 해요. 자세한 건 다른 연구원……. 아, 연구원님 오셨어요.”
그리고 그때 한참 떨어진 맞은편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수석 연구원은 곧장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곁에 있던 연구원 또한 자연스레 그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두 사람이 마주한 건 지하에서 진행 중인 모든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인 성민주였다. 몇 달 전에 지하에 내려온 연구원은 아직 내부 사정을 명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그녀가 박호재 연구소장이 아주 오래전에 기획한 ‘레드 문 프로젝트’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꼬리가 밟힌 것 같습니다. 연구소에서 방생한 피험자들 대부분이 추적망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행방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자신의 곁에 서 있던 수석 연구원은 성민주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어느새 그와 거리를 두고 선 연구원은 차트를 고쳐 쥐면서 드문드문 들리는 대화를 그들 몰래 귀담아들었다.
‘이 프로젝트가 조만간 끝날 수도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그럼 이제 다른 프로젝트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건가?’
연구원이 맡아서 진행하고 있는 건 레드 문 프로젝트였지만 지하의 다른 구역에서는 또 다른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주워들은 것들을 종합해 보면 현재는 특정 던전을 지정한 뒤 그 안에 등급이 높은 마석을 묻어 두고 경과를 지켜보는 중인 듯했다.
그것 말고도 또 다른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듯했으나 그 부분은 지하에 있는 연구원들 사이에서도 기밀로 통하는 듯했다.
“순차적으로 진행 중이니 이대로 실행만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예상 일자는 다음 주 내로 발표할 겁니다.”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전하는 수석 연구원과 달리 성민주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그녀의 반응만 보면 프로젝트 관련 내용이 외부에 유출되는 것조차 계획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됐으니까 가서 일 봐요.”
잠시 뒤 수석 연구원이 연구원을 향해 손짓해 보였다. 그제야 연구원의 존재를 인지한 성민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 * *
자신을 부르는 휘파람 소리를 따라 한 아이를 만나고 돌아온 나는 서둘러 원장실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앞에 앉은 문제혁에게 보육원의 열약한 사정에 관해 열변을 토하던 최성일이 나를 돌아보았다.
“어, 해월아. 통화는 다 끝난 거니? 그렇지 않아도 제혁이한테 사정은 다 전해 들었다. 요새 많이 바쁘다며? 확실히 잘되는 길드는 뭔가 다르긴 한가 보구나. 대단해, 아주. 어서 앉아라.”
그는 다정한 말투를 가정하고 있었으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자신을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것에 대한 불평이 가미되어 있을 듯했다.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문제혁의 옆에 앉은 나는 앞서 만난 아이를 잠시 떠올렸다.
다른 아이들은 신관에 모여 있다고…….
머릿속으로 판단을 끝낸 나는 적절한 수를 고민하면서 최성일을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말에 호응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계속해서 보육원에 물질적 후원이 필요하다는 논지의 말을 이어 나갔다.
“저희가 어렸을 때 선생님이 종종 말씀하셨죠. 어른이 돼서 돈을 많이 벌게 되면 보육원을 잊지 말고 찾아와 달라고. 앞으로 도해 길드에서 주기적으로 하늘 보육원에 후원 물품을 전달해 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에, 그게 정말이니? 선생님은…….”
나는 화색이 되어 반문하는 최성일을 향해 손을 뻗어 저지했다. 이어서 문간 너머 조용한 복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아이 한 명을 꾸준히 후원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지내는 모습부터 보고 바로 결정하도록 할게요.”
이어서 문제혁에게 눈짓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서 일어선 뒤 최성일을 향해 문가를 눈짓해 보이자 그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주춤거리며 문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