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92
192화. 도움닫기 (6)
같은 시각, 한국마력연구소.
연구소 지하에 마련된 피험자의 병실에 누워 있던 여자아이가 온몸을 바르작거리며 눈을 떴다. 아이는 자신의 옆자리에 다녀간 연구원이 완전히 모습을 감춘 것을 확인하기 위해 내부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대략 십여 분 전, 자신의 옆자리에 누워 있던 어른과 연결된 기계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아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행여 눈을 뜨고 있었다면 연구원이 자신을 데려가 바늘이 굵은 주사를 놓거나 커다란 의자에 앉혀 놓은 뒤 기다란 선이 연결된 패치를 팔다리에 잔뜩 붙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을 붙이고 나면 온몸에 불쾌한 전류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전신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누군가 머리를 올가미로 조이는 것 같은 통증을 호소하며 식은땀을 흘리다 보면 결국에는 자신도 모르게 까무룩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최소 이틀, 길게는 나흘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훌쩍 지나간 날들을 셈해 보며 섬뜩함과 두려움을 느꼈다.
‘그나저나……. 저 언니는 다시 안 오는 건가?’
아이는 자신의 침상과 한참 떨어진 곳에 놓인 빈 침상을 건너다보며 머리를 가누었다. 삐뚤빼뚤하게 잘린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스치면서 살갗이 따끔거렸다. 두어 달 전,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 긴 머리카락은 실험에 방해가 된다면서 묶은 머리를 강제로 자른 탓이었다.
베개를 고쳐 베면서 침상에서 시선을 거둔 아이는 며칠 전까지 저곳에 있던 비각성자 여성을 떠올렸다. 자신보다 한참 전에 들어왔다던 그녀는 손이 얼음처럼 차갑고 때때로 극심한 분노에 사로잡혔으나 자신에게만큼은 친절하고 다정했다.
‘혹시 죽은 건 아닐까?’
오전에 섭취한 약물의 효력이 전신을 타고 감도는 것을 느끼던 아이는 다시 눈을 감고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녀가 사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연구소에 들어오기 전까지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이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날마다 고통에 찬 비명을 듣고 그런 그들을 무표정하게 관찰하는 연구원들을 지켜보다 보면 죽음이 얼마나 기이하고 무서운 것인지 마음속 깊이 실감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홧홧해지면서 눈물이 맺혔다. 어느새 목이 멘 아이는 보육원에 두고 온 친구들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울음을 그치기 위해선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차가워진 손을 눈에 얹는 것보다 그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 것이 훨씬 나은 방법이었다.
‘살고 싶어. 살고 싶어.’
그럼에도 어느 날에는 두고 온 친구들을 생각해도 울음을 참기 어려운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의 아이는 지금처럼 살고 싶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웠다.
입안에 단내가 날 정도로 중얼거리다 보면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끔찍한 일을 무사히 이겨 낼 수 있을 만큼 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버티다 보면 반드시 자신을 찾으러 오겠다고 약속한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사무실을 나온 우리는 본관 위층이 아닌 신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제혁과 함께 그의 뒤를 따라서 향한 곳에는 아이가 일러 주었던 대로 보육원에 머무르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누구지? 손님인가?”
“야, 인사부터 해. 안녕하세요. 근데 여기는 왜 온 거예요?”
“뭐지? 원장 선생님이 우리 여기 있으라고 했는데…….”
급하게 몰아넣은 것인지 신관 입구 근처 로비에 흩어져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나와 문제혁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고개를 엉성하게 숙이며 인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누나, 그럼 우리 다시 본관으로 넘어가도 돼? 여기 너무 추워.”
“나도 잘 모르겠어. 너 예전에 신관 와 보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래, 오늘 같은 날 아니면 언제 다시 와 보겠어. 근데 생각만큼 좋진 않다. 그치.”
그러자 아주 오래전 교회로 사용했을 적부터 남아 있던 낡은 의자에 앉아 있던 아이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힐긋거리며 무어라 속닥거렸다.
문제혁은 멀리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앞서 걷던 최성일을 향해서 툭 던지듯 말했다.
“웬일로 보육원이 조용하다 했더니. 전부 여기에 있었네요.”
“그,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그만……. 너희들 오기 직전까지 본관을 청소하느라고 잠깐 여기에 모여 있게 한 거야. 하하, 그보다 아이들부터 만나기 전에 후원에 관해서 선생님이랑 대화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부를 쭉 둘러보며 일전에 나와 마주쳤던 아이를 찾고 있으니 최성일이 곁에서 굽신거렸다. 이어서 그는 아이들을 향해 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세차게 저어 보이더니 문제혁의 팔을 붙들면서 말을 걸었다.
“제혁이 네 생각은 어때. 너도 선생님이랑 비슷한 생각이지? 해월이 얘가 언제 또, 다시 올 지 몰라서 마음이 급한가 봐. 그렇지 않니?”
한참을 둘러보았으나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문제혁은 아이들과 최성일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나를 힐긋 살피면서 말했다.
“형은 여기저기 둘러본 다음에 결정하고 싶은가 봐요. 저희가 들고 온 후원 물품들도 밖에 그대로 있던데. 우선 그것부터 옮겨야 하지 않을까요? 얘들아, 여기 있는 삼촌이 너희 주려고 장난감이랑 책 잔뜩 가져왔어. 같이 가서 구경할래?”
그때까지 잠잠하던 아이들은 장난감이라는 말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머무르는 아이들의 연령대는 비교적 다양했으나 대부분 미취학 아동들이었기에 한꺼번에 움직이게 하려면 이 방법이 적합할 터였다.
개중에 몇 없던 청소년들 또한 바깥에 새로운 물건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맏이로서 어린아이들을 진정시켜야 했으나 그들 또한 오랜만에 맞이하는 손님이 반가운 건지 하나같이 들뜬 얼굴이었다.
“그럼 제혁이 네가 아이들 통솔해서 본관으로 데려가 줘. 바깥에 있던 짐도 하나씩 옮겨 놓고. 저는 여기서 조금만 더 고민해 보다가 본관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선생님.”
눈에 익은 아이를 찾던 나는 문제혁과 최성일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대답했다. 아무래도 아이는 다른 공간에서 나를 기다리는 듯했다. 아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선 여기 있는 사람들을 내보내는 게 우선이었다.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지, 원……. 그래, 그러자. 얘들아, 오늘 오신 손님들이 너희한테 주려고 선물 가져왔대. 같이 가서 보는 게 좋겠지? 다들 뛰지 말고, 큰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이동하자.”
손으로 얼굴을 감춘 채 혼자서 중얼거리던 최성일이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그는 문제혁을 따라서 아이들을 데리고 신관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왁자지껄한 소리를 내며 빠져나가는 인파를 통솔하던 문제혁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어서 그가 서 있는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속닥거렸다.
“아까 나갔다가 만났던 아이가 있어. 걔를 좀 찾아보려고 해. 혹시 원장이 나 찾으면 적당히 둘러대고,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해. 알겠지?”
문제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 * *
내부를 절반쯤 살핀 뒤 상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이전에 마주쳤던 아이는 생각보다 꽁꽁 숨은 건지 이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아이는 나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주위를 살펴보던 나는 또한 아이에게 들려줄 말을 곱씹어 보기 시작했다. 아이에 대해서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떠오른 건 현선민의 이름이었다. 지난번 만남에서 그녀가 보육원에서 연구소로 차출된 아이들을 구출하고 나면 재단에서 보호할 수 있을 거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낸 나는 과거의 내가 수도 없이 왕래하던 복도에 들어서기 전, 현선민에게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
입구에서 잠시 마주쳤을 때는 아이의 사정을 전부 전해 듣지 못했지만, 잔뜩 긴장한 얼굴이나 힘껏 쥐고 있던 주먹을 떠올리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이윽고 그 아이가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실험에 관해서 보고 듣게 된 것들이 있고, 그것들이 유의미한 가치를 지녔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해 보았다.
만약 그렇다면 아이가 지닌 기억은 언젠가 연구소에서 벌인 비윤리적인 행태를 결정적으로 증명해 줄 수 있는 주요 증언으로서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잉―.
그때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바로 확인해 보니 현선민에게 가능하다는 내용이 담긴 답장이 도착해 있었다.
복도에서 우두커니 멈춰 있던 나는 답장을 생략한 뒤 눈앞에 보이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년 전에 이곳에서 문제혁을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문이 반쯤 열려 있는 상태였다.
“여긴 어떻게 알고 들어와 있었어.”
그대로 열고 들어서니 불을 밝힌 방 안에서 앞서 보았던 아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맞은편에 선 나의 그림자 아래에 선 아이는 잘근거리며 물어뜯던 손을 떨구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뉴스에서 아저씨가 나오는 걸 봤어요. 사람들이 신촌 게이트 사고랑 이천 게이트 사고도 아저씨가 해결했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인터넷으로 인터뷰한 기사도 읽었어요. 아저씨가 도해 길드의 도해월 마스터죠.”
눈으로 보기에 초등학교 2, 3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는 또래보다 체구가 왜소해 보였다. 아이는 나와 눈을 마주친 채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원장실에서도 아저씨 사진을 봤어요. 원장님은 아저씨가 엄청 대단하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또……. 아저씨, 저랑 제 친구들 좀 도와주세요.”
아이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말을 고스란히 꺼내 놓으려는 듯 무척 빠른 속도로 말했다. 마침내 말문을 맺을 무렵에는 숨이 모자랐던 건지 아니면 심하게 긴장한 건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얕게 헐떡였다.
“도와달라고? 그게 무슨 뜻이야? 지금 신관에는 너랑 나만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얘기해도 돼.”
나는 식은땀에 젖은 짧은 머리카락에 시선을 두었다가 아이를 향해 말을 건넸다. 아이는 눈길을 의식한 건지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작년 겨울부터 저랑 같이 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어요. 처음에는 그 친구들이 각성해서 신관에 넘어가는 거라고 했어요. 헌터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여기서 쭉 지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지난달에 사라졌던 애는 저랑 제일 친한 친구고, 걔는 각성도 안 했는데 신관으로 넘어갔어요.”
씩씩하게 말하던 아이는 끝내 목이 멘 건지 입을 꾹 다물고 어깨를 들썩였다. 붉어진 눈을 여러 번 깜빡이던 아이가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다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얼마 전에 원장 선생님이 통화하는 걸 몰래 들었는데, 그때 선생님이 이번 달에는 제가 신관으로 넘어갈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각성자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아저씨가 저를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제발 저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 주세요.”
말문을 맺은 뒤에도 온몸을 잘게 떨던 아이가 나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제발 도와주세요, 아저씨.”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너무도 절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