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95
195화. 도약의 시간 (2)
김미솔이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손가락을 하나씩 구부리며 무언가를 셈해 보던 그녀가 말했다.
“두 달이라고? 그럼 정말 코앞에 닥친 거잖아. 시간이 너무 촉박한 것 같은데.”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보던 설연호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내 그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그것도 그렇고……. 우리가 지난 던전 브레이크를 막을 수 있었던 건 여러 가지 우연이 우리한테 유리하게 작용한 덕도 있었다고 생각해. 그 당시에 현장 실습을 주관하는 길드가 성문으로 바뀌지 않았다면 애초에 문제의 던전에 들어갈 이유도 없었겠지. 들어갈 일이 없었다면 거기서 벌어질 일을 막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고.”
조심스레 말을 잇는 그가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그가 우려하는 대로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다.
“선배들 말대로 시간이 촉박한 것도 맞아. 과거의 우리가 그 사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건 기막힌 우연이 따라붙었기 그랬다는 의견도 동의해.”
나는 그들에게 대답하면서 보고 있던 태블릿 화면을 조작했다. 파주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차량 내에서 작성했던 자료 화면을 띄운 뒤 가운데로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사태를 막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방금 자료 하나 더 보냈으니까 확인해 봐.”
상체를 반쯤 기울이며 화면을 살펴본 두 사람이 각자의 태블릿을 만지작거렸다. 그대로 이어지던 침묵을 깨뜨린 건 김미솔의 짧은 감탄사였다.
“던전 브레이크 발생 예상 지역? 이건 다 어디서 뽑아 온 자료야? 스킬로 본 거야?”
순간 눈을 크게 뜨고 감탄하던 김미솔이 나와 태블릿을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설연호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계속 훑으면서 자료의 내용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스킬로 본 건 아니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던전 브레이크는 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발생하지만, 지난 용산 던전 브레이크처럼 고의로 발생시키려는 경우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을 거야. 그 가정을 전제로 지역 몇 군데를 특정해서 정리해 봤어.”
나는 팔짱을 끼우면서 등받이에 느슨히 기대었다.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은 자료를 천천히 넘기면서 내용을 확인했다.
“그치. 이번에도 우리가 들어갔던 던전처럼 중심부에 S급 마석을 묻어서 브레이크를 발생시킨다고 가정해 본다면 구하기 어려운 마석을 아무 던전에나 집어넣진 않겠지.”
잠시 뒤 설연호가 자료에서 시선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목소리에서 한숨이 섞여 나왔다.
“애초에 우리가 사무실 위치를 용산으로 고른 이유도 회의실 창문 때문이었잖아. 저 밖에 서 있는 남산타워가 우리한테는 일종의 전리품 같은 거였으니까.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S급 마석 값을 치르려면 타워 하나 정도는 무너져야 하는 건가 싶네.”
잠시 몸을 틀고 남산타워를 바라보던 김미솔이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전생의 차진명이 고의로 발생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던전 브레이크 사태는 그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부차적인 사건을 동반했었다.
“그나저나 이 자료 작성하는 데 얼마나 걸렸어? 파주에서 서울까지 오는 길에 작성한 거면 길어야 두 시간 좀 넘게 걸린 것 아니야? 급하게 적은 것치고는 생각보다 훨씬 자세한 것 같아서. 피해 규모나 대응 방식도 굉장히 현실적이고.”
자료를 전부 훑어본 듯한 설연호가 태블릿에서 손을 거두면서 말했다. 김미솔 또한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거야……. 거기 적힌 던전 브레이크 사태 현장을 전부 내가 지휘했으니까 자세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용산 던전 브레이크 때부터 던전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어. 예전에 강효서 선배가 관리했다던 마석의 행방이 오리무중이 된 이후에는 이 자료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겠다 싶더라. 그때부터 떠오르는 대로 무작정 메모해 뒀던 걸 다 합쳐서 정리한 거야.”
날이 갈수록 거짓말이 청산유수가 되는 듯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진지한 기색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리고 이 자료는 어디에도 새어 나가면 안 돼. 내가 이런 자료를 만들었다는 것도 선배들만 알고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과 눈을 맞추며 진지하게 말했다. 덩달아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던 그들은 차례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월이 네 말대로 이 자료는 기밀로 남겨 두는 게 좋겠어. 혹여나 여기 적혀 있는 대로 일이 터지게 되고, 이런 자료가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그것대로 파장이 상당할 테니까. 이때까지 길드로서 막아 낸 건 게이트 사고가 전부고, 거기서 오는 여파는 잘 정리됐지만 던전 브레이크는 또 다른 문제이기도 하잖아.”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진 듯 허공을 바라보던 설연호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가 느릿하게 지압하는 사이 김미솔이 나를 돌아보았다.
“음, 그건 그렇고 던전 브레이크를 막아 낸 다음에는 어떻게 할지도 생각해 봤어? 현선민 헌터랑 그쪽 재단 헌터들까지 합세해서 추적하던 것도 확실한 증거가 다 모이면 전부 공론화할 생각이라며.”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으로 각각의 갈래를 따라 흩어진 물길의 형상이 그려졌다. 멀리서부터 쉼 없이 달려온 그 물길이 하나의 바다로 연결될 시점을 계산해 보았다.
* * *
어슴푸레한 새벽, 최보윤은 서애란과 함께 경기도 가평의 한 별장으로 향했다. 긴 숲길을 헤치고서야 모습을 드러낸 별장에서는 환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다 왔어요. 저쪽이에요.”
휴대전화의 불빛에 의지해 정면으로 나아가던 최보윤이 곁에서 걷던 서애란에게 속삭였다. 서애란은 일전에 그녀에게 들었던 설명을 곱씹어 보았다.
“저기가 거기죠? 예전에 자료 파기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 비상용 창고처럼 사용하려고 했던 곳. 별장 주인이 최보윤 헌터가 예전에 말했던 괴짜 연구원이라고 했던 게 기억나네요.”
“맞아요. 거기예요. 오늘 모이기로 한 사람 중에 그 선배는 없지만.”
“주인도 없는 별장에 들어가도 괜찮은 건가요?”
두 사람은 어느새 입구 근처까지 다다랐다. 최보윤은 가지고 있던 열쇠를 문고리 밑으로 밀어 넣으면서 끄덕였다.
“물론이죠. 애초에 이 별장은 후배 연구원들 쓰라고 남겨 놓은 거라고 했거든요. 지금처럼 사람들 눈 피해서 비밀 작전을 구상하려면 이 별장처럼 적당히 음산한 곳이 딱 적당하기도 하고요.”
최보윤은 ‘비밀 작전’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하면서 씩 웃어 보였다. 이윽고 문을 힘껏 잡아당기면서 서애란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선배들, 저 왔어요.”
서애란보다 몇 걸음 앞서 나아가던 최보윤이 거실에 모여 있던 이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저마다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 논의하던 두 사람이 일제히 일어섰다.
“아,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한국 성물 연구소 소속 정지윤 연구원입니다. 보윤 씨도 어서 와. 그래도 금방 왔네?”
서애란에게 먼저 손을 내민 건 복도 근처에 앉아 있던 여자였다. 자신을 정지윤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가벼운 악수를 마친 뒤 한 걸음 물러났다.
“반갑습니다. 김성민 연구원입니다. 뉴스에서나 보던 도해 길드 소속 헌터를 실제로 뵙게 되니 감회가 새롭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어서 자신의 이름을 밝힌 남자와도 악수한 서애란은 두 사람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저도 최보윤 헌터를 통해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자리에 앉아서 마저 얘기하실까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보윤은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뒤 부엌으로 향했다. 서애란이 나머지 두 사람과 자리에 앉아서 숨을 고를 즈음 최보윤이 다시 나타나 두 개의 잔을 내려놓았다.
“전후 상황에 관한 건 제가 먼저 설명했습니다. 아, 참고로 오늘 모신 두 분 모두 한성연에서 15년 넘게 근무한 베테랑 연구자들이에요. 뭐, 저한테는 대선배들이시죠. 모쪼록 믿을 만한 분들만 모셔 왔으니 서애란 헌터도 편하게 말씀하시면 돼요.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정지윤과 김성민을 돌아보던 최보윤이 서애란 근처에 놓인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서애란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잔과 최보윤을 번갈아 살피며 가볍게 고갯짓했다.
이로써 같은 자리에 둘러앉은 네 사람은 어딘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말을 아꼈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건 곧은 자세로 앉아 있던 정지윤이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물어볼게요. 게니우스의 창. 정말 한마연에서 보관하고 있는 건가요? 그 물건의 행방은 저희 연구자들도 꾸준히 찾아 헤맸던 터라 이 부분부터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네, 맞습니다.”
서애란은 망설임 없이 곧장 대답했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김성민이 탄식했다.
“그 창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 이때까지 저희 연구원들은 그 물건이 한국에 남아 있을 리 없다면서 계속 외국에서 찾아 헤맸거든요. 등잔 밑이 이렇게나 어두웠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때 자신의 자리에서 차를 몇 모금 삼킨 최보윤이 입술을 달싹이면서 말했다.
“사실 전 저희 팀 소속 연구원이 한마연으로 차출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의심은 하고 있었어요. 아, 서애란 헌터는 처음 듣는 얘기죠.”
순간 아차 싶은 듯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서애란에게 시선을 옮기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성물 연구소에서 퇴사하기 전에 한국마력연구소 측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었다고 했다. 당시에 같은 제안을 받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고 한다.
“결국 한마연에 차출된 건 그 연구원뿐이었어요. 같은 팀이기는 해도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자주 왕래한 사람은 아니어서 사정은 잘 모르지만 그렇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후에는 한성연 쪽 사람들이랑도 연락을 다 끊어서 뭘 하고 지내는지 알 길이 없다고 하네요.”
“그때 한마연 쪽 사람이 보윤 씨한테 뭐라고 했었지? 그쪽에서 비밀리에 기획 중인 프로젝트가 있었다고 했었나?”
최보윤의 설명이 끝을 맺는 순간 묵묵히 듣고 있던 정지윤이 끼어들었다. 최보윤은 정지윤을 힐긋 살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한마연에서 비밀리에 추진 중인 프로젝트가 있는데, 성물 연구자의 자문이 꼭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했어요.”
“성물 연구자의 자문이 필요하다니.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낯선 이들의 얼굴을 익히려는 듯 정지윤과 김성민의 얼굴을 연이어 바라보던 서애란이 되물었다.
“저도 처음에는 그게 의문이었어요. 한마연 쪽에서 성물을 보유한 것도 아닌데 제가 왜 필요하나 싶었거든요. 그래서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니까 성물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물건을 개발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완성하려면 성물이 가진 힘이 얼마나 되는지 구체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성물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물건. 그간 한국마력연구소의 행보를 생각하면 그들이 그런 물건을 개발한다고 나선다고 해도 의심할 만한 여지가 딱히 없었다.
“음, 사실 제가 예전에 이상한 소문을 하나 들은 적이 있습니다. 꽤 오래전에 들은 건데요. 한마연을 둘러싼 소문은 언제가 됐든 상상을 초월하는 편이라 그때는 그냥저냥 넘겼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최보윤 연구원, 아니, 최보윤 헌터 얘기를 듣고 보니 그 소문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때 김성민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네 사람의 오른편으로 난 창문 너머에서 산바람이 불어오는지 창틀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가 들은 소문에 따르면 한마연에서 비각성자를 강제로 각성시키려는 실험을 진행 중이라고 하더군요.”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 그 소문……. 저도 들어 본 것 같아요. 언제였지?”
김성민이 말을 끝내는 순간 최보윤과 정지윤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 두 사람을 차례로 돌아보던 서애란은 입을 굳게 다물고 김성민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직 진위 여부가 파악되지 않은 소문이에요. 지금부터 나눌 얘기는 이 별장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각별히 유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어서 김성민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의 엄중한 목소리가 넓은 거실을 메우는 순간 모두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