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96
196화. 도약의 시간 (3)
며칠 뒤, 경기도 평택.
설연호와 김미솔을 만나 대화를 나눴던 날을 기점으로 시간은 다시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그날 만든 자료를 토대로 김미솔과 함께 내달 던전 공략 일정을 구상했다.
일정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에 앞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미뤄 두었던 각성자 등급 측정을 진행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유월의 첫 번째 일정이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앞으로 소속 헌터들과 공략을 진행할 때 그들이 나에게 품는 신뢰를 상승시키고 길드의 내실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진행해야 했다.
그리하여 며칠 전 이능단속관리‧본부에 방문하여 진행한 등급 측정 결과는…….
―오늘 오전에 기사 터지고 지금까지 계속 난리야. 이관부 직원이 측정 결과 나온 것 보고 여기저기 흘리고 다닌 건지 네 소식 안 다루는 방송사가 없더라. 신문사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길드 사무실 앞에 모인 기자만 해도……. 하나, 둘, 셋, 넷, 다섯, 어우,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네.
예상했던 대로 A급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큰 파급을 몰고 왔다. 나는 휴대전화를 귓가에 붙인 채 익숙하면서도 낯선 도시의 전경을 둘러보면서 고예성의 목소리를 들었다.
“사무실까지 찾아온 기자들은 정중하게 돌려보내. 오늘 내로 공식 입장 낸다고 하고. 그리고 이번 일로 길드 소속 헌터들이나 직원들이 피해받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도 대신해서 전해 줘.”
―보도 자료는 진작 준비해 뒀어. 우리는 등급 판정 결과에 일체 관여한 적 없고, 부당한 방식으로 성장한 것도 절대 아니라고 확실하게 적어 뒀으니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는다고 할게. 아, 그리고 예전에 우리 도와줬던 오한빈 기자도 인터뷰할 수 있냐고 연락했더라. 그건 어떻게 할까?
간만에 소식을 전한 오한빈의 이름을 들으니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한참 전에 전해 듣기로 그는 효신 그룹 주가 조작 사건을 터뜨린 뒤 이달의 기자상을 받고 승진했다고 한다. 방송국 내부에서도 다시 자리를 잘 잡은 듯해 다행이었다.
그때 초여름의 미지근한 바람을 따라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날렸다. 반도체 공장을 비롯한 수백 개의 공장이 밀집한 길목에 서 있던 나는 가볍게 숨을 골랐다.
“음, 이번 달 내 일정 참고해 보고 시간 될 때 오한빈 기자랑 인터뷰 일정 잡아 줘. 안 그래도 조만간 만나야겠다고 생각 중이었거든.”
훗날 이때까지 추적하던 일들을 세상에 퍼뜨리기 위해서는 오한빈의 도움이 필요할 터였다. 그는 이번에도 우리의 목소리를 가장 크게 출력할 수 있는 스피커가 되어 줄 것이었다.
―오케이. 그것도 날짜 정해지면 알려 줄게. 그나저나 사무실도 오늘 해월이 네 얘기로 시끌시끌해. 진작 나가 있길 잘한 것 같다. 안 그랬으면 피곤했을 거야, 너.
전화기 너머로 키득키득 웃으며 고예성이 전해 준 반응을 곱씹고 있으니 어쩐지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전생에서는 D급으로 학교를 졸업하기도 했고, 그 이후에도 차진명과 그 일가에서 지원받으며 최대한 조용히 지냈던 터라 더욱 그런 듯했다.
물론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지금보다 파장이 더욱 컸다. 사령관 자리에 앉힐 만한 재목이 없어서 골머리를 앓던 차에 차진명의 도움을 받고 성장한 S급 헌터가 떡하니 나타났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외국에도 소식이 알려져서 한창 시끄러웠을 때였나. 그때가 아마 부임 초반이었었지.
전생의 기억을 되짚고 있으니 사령관으로 부임한 뒤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 다수의 대규모 길드가 뜻을 모아 헌터 특수 정예 부대 설립에 반발하며 이능청을 상대로 성명문까지 발표했었다.
―아, 미솔 선배한테 들었는데 안진영 헌터한테 연락하는 기자들도 있었대. 혹시 마스터가 A급으로 성장할 걸 알고 있었냐고 하면서, 그것 때문에 길드를 선택한 건 아니었는지 무진장 캐물었다더라. 기자들이 어디서 떨어지는 정보 없나 싶어서 여기저기 들쑤시나 봐.
부대와 얽힌 기억을 상기하고 있을 무렵 고예성이 안진영의 이름을 언급했다. 기나긴 협상 끝에 도해로 데려온 그 역시 내가 찾고 싶었던 부대원이었다.
“음, 다른 길드원들 입으로 뭐든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해 주고.”
―우리야 알아서 입단속 하는 중이지. 그리고 정인 누나랑 애란이는 그 연구원들 만나러 간다고 했어. 지금쯤이면 도착해서 얘기 나누고 있겠다.
고정인이 별장에서의 만남에 합류하게 된 건 서애란과 최보윤의 제안 때문이었다. 최근 한국성물연구소의 연구자들과 만난 그들은 새롭게 파악한 정황에 관한 진위 여부를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 고정인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날 나눴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보고받지 못한 상태였으나 그들의 요청을 우선 수락했다.
“오늘이 그날이었구나. 알겠어, 급한 일 생기면 다시 연락해.”
그 말을 끝으로 고예성과 통화를 마친 뒤 주위를 크게 둘러보았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매일 아침 수만 명의 사람이 왕래하는 거대한 공장 단지였다.
그리고 이곳의 주축이 되는 반도체 공장 단지를 운영하는 건 정원 전자였다. 게이트 시대가 시작되기 수십 년 전부터 굴지의 대기업으로서 분하던 정원 전자가 이곳에 공장 단지를 세운 것도 벌써 십수 년이 넘은 참이었다.
그즈음에서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이곳에서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이어서 주위를 둘러보니 사뭇 낯설기는 해도 영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는 아닌 듯했다.
이 근처에 처음 피해 상황이 보고됐던 공장이 있을 터였다. 생각을 마무리한 나는 화염 속에 뒤덮여 있는 기억을 따라서 걸음을 내디뎠다.
* * *
한편 경기도 가평에 자리한 별장에 모여 있던 이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오늘 새로 합류한 고정인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는 상태였다.
“우선……. 제가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한 건지 먼저 확인해 주시겠어요? 열심히 듣기는 했는데 도통 상상해 본 적 없던 일이라서 그런지 너무 당황스럽네요.”
한참의 침묵이 이어진 끝에 고정인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근처에 앉아 있던 김성민 연구원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기 계신 김성민 연구원의 말씀대로라면 오래전에 한마연에서 비각성자를 강제로 각성시키려는 실험을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어쩌면 지금 한마연에서 제조하고 있는 불법 마석 가공물도 그 실험 과정에서 제조된 약물일 수도 있다는 거죠. 그래서 그걸 먹으면 신체 능력이 비정상적으로 향상된다는 거고요.”
이따금 마른 입술을 축여 가면서 이전에 나왔던 이야기를 천천히 설명한 고정인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녀의 곁에 앉아 있던 서애란은 예의 그 표정 없는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최보윤이 짧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헤집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먹기만 하면 신체 능력을 상향시킬 수 있는 약이 존재하는 와중에 성물의 존재는 왜 언급되는지, 그 실험과 대체 어떻게 연결된 건지 궁금하시죠. 그 부분에 관한 건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그때 자신의 앞에 놓인 뜨거운 찻잔을 감싸 쥐던 고정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설명을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자세를 바르게 가다듬었다.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마석을 가공해서 제조한 약물만으로는 비각성자를 강제로 각성시킬 수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확언할 수 있는 건 성물 연구 또한 마력 연구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에요.”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보탤게요. 사실 전 몬스터한테서 축출한 마석을 가공해서 그걸 사람한테 직접 복용시킨다는 전제부터가 틀려먹었다고 봐요. 처음에는 설마, 하는 작은 가능성만 믿고 뛰어들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했고요. 박호재 연구소장이 물러난 지 한참이 지난 와중에도 그런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는 건 그저 다수의 사람을 마구잡이로 해치기 위함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최보윤이 말문을 맺을 무렵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정지윤이 언사를 더했다. 그 목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던 서애란은 시선을 떨구면서 눈을 감았다.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짓을 해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죠. 일단 지금까지 해 주신 말씀은 전부 이해했어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연구소에 숨겨 놓은 성물로 강제 각성을 시도하려고 했다는 건가요?”
“네, 저희가 생각하기로는 그렇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별장 내부에 다시금 침묵이 감돌았다. 생각에 잠긴 고정인과 서애란을 보면서 입을 뗀 건 최보윤이었다.
“두 분 혹시 전세계에서 첫 번째로 발견된 성물이 어떤 건지 아시나요?”
“아킬레우스의 방패라고 알고 있어요. 게이트 시대가 시작된 지 일 년이 조금 넘었을 때 미국에 있는 던전에서 발견된 거였죠.”
최보윤의 질문에 대답한 건 서애란이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최보윤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성물은 원체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아킬레우스의 방패는 그 이름처럼 공격형 스킬을 지닌 헌터가 소지했을 때 강한 시너지가 나타난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요. 성물에 깃든 강한 힘의 양상은 이름에 담긴 배경을 따라간다는 기본 원리도 당시에 처음 밝혀졌고요.”
어느새 고정인의 시선이 눈앞에 펼쳐 놓은 파일 쪽으로 향했다. 검은색 배경을 두고 창의 실물을 담아낸 사진과 흰 배경에 목업 형태로 구현한 검의 모습이 나란히 놓인 모습이 묘한 이질감을 자아냈다.
“나아가 아킬레우스의 방패를 단순한 무기로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품고 있는 힘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걸 박호재 연구소장이 입증해 냈었죠.”
뒤이어 최보윤은 박호재 연구소장이 게이트 시대 이전에 스위스에서 호메로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또한 그가 한창 권위를 떨치고 있을 무렵 게이트 시대가 시작되고 그다음 해에 아킬레우스의 방패가 발견되면서 그가 관련 연구에 뛰어든 것이 성물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설명까지 이어졌다.
“국내 최초의 성물 연구자는 박호재 연구소장이었지만 한성연을 세운 건 박 소장의 후배였습니다. 설립 이후로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한성연의 소장은 박 소장에게 꼼짝도 못 하는 신세고요.”
최보윤의 설명이 마무리될 무렵 정지윤이 말을 보탰다. 창의 실물 모습과 최보윤을 번갈아 바라보던 고정인이 고개를 들었다.
“다 듣고 보니 그 실험에 성물을 동원하려고 했던 이유가 뭐였는지 감이 잡히는 것 같아요. 정리하자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수호신의 힘을 빌려서 사람의 힘으로 실현할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하려고 했다는 거죠?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려고 했을까요?”
스스로 묻고도 답답한 건지 고정인은 눈살을 찌푸린 채 갸웃거렸다. 근처에 놓여 있던 잔을 들고 목을 축이던 최보윤이 고정인과 서애란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걸 알아내려면 불법 마석 가공물을 이용한 실험, 아마도 연구소 내부에서는 레드 문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실험의 초기 자료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