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97
197화. 도약의 시간 (4)
최보윤은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비스듬히 틀었다.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서애란의 부탁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라진 성물의 행방을 추적하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품고 왔었기에 그녀의 제안이 무엇보다 달가웠다. 몇 년 전에 학계를 원치 않게 떠나왔으나 성물을 향한 애정만큼은 달라진 것이 없기도 했고.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했던 제안은 너무 어렵고 위험한 일인 것 같아. 작은 기대를 품고 고정인 헌터까지 이 자리에 불러내기는 했지만 새로운 제안은 거절당할 수도 있겠어.’
그녀는 서애란이 성물을 추적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서애란은 자신은 그저 도해월의 지시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었다.
도해월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사라진 성물을 직접 연구하던 자신이 품은 것보다 간절한 마음이 담긴 것은 아닐 듯했다.
그럼에도 최보윤에게는 이 두 사람의 능력이 꼭 필요했다. 이때까지 자신과 다른 연구원들이 성물의 행방을 나름대로 추적하던 시간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연구실에 갇혀서 연구만 하던 학자들에게 유의미한 소득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두 사람만 있으면 더는 연구에 있어 난항을 겪지 않아도 될 텐데. 제발 거절하지 말았으면 좋곘다.’
그리고 그때 한참 침묵하던 고정인이 서애란을 돌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음, 사전에 서애란 헌터를 통해 듣기로는 게니우스의 창과 관련된 자료가 한성연 도서관 내부에 흩어져 있다고 하던데요. 여러분이 오늘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신 것도 뿔뿔이 흩어진 그 자료를 조금이라도 빨리 찾아내려고 도움을 청했다고 알고 있었고요.”
고정인은 이내 다른 연구원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어서 최보윤과 눈을 마주친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혹시 안 된다고 하려는 건가? 그럼 어떻게 하지.’
최보윤은 남몰래 마른침을 삼키면서 생각했다. 곁을 슬쩍 돌아보니 선배 연구원 두 사람도 그녀와 같은 심정인 듯했다.
“만약 그 초기 자료라는 게 한마연에서 보관하고 있는 거라면 거기까지는 접근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한마연에 접근하는 건 무리일 듯해서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어지던 고정인의 말을 듣고 있던 선배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거듭해서 시선을 주고받던 그들 중에서 느릿하게 입을 뗀 건 김성민이었다.
“고정인 헌터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저희가 그런 위험한 일까지 부탁드리려는 것은 아니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어서 그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삼 년 전, 한국마력연구소에서 보관되어 있던 자료 중 일부가 한국성물연구소의 도서관으로 옮겨진 적이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때 옮겨진 자료는 2020년 이전까지 한국마력연구소에서 작성된 것으로, 레드 문 프로젝트가 게니우스의 창이 사라진 2014년 이후에 시작된 것이라면 초기 연구 자료 역시 한국성물연구소 도서관에 함께 보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얘기를 들은 고정인은 그제야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희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이미 말씀하셨던 그대로입니다. 게니우스의 창과 관련된 자료와 접근 금지 구역에서 보관 중인 레드 문 프로젝트의 초기 연구 자료를 찾는 일을 도와주셨으면 해요.”
한참 긴 이야기를 들려주던 김성민이 마지막으로 정중하게 요구했다. 고정인은 그 말을 듣고도 쉽사리 답을 내리기 어려운지 손등으로 턱을 매만지기만 했다.
“그 도서관에 보관된 도서 수가 십만 권이 넘는다고 했었죠? 접근 금지 구역에 있는 자료까지 포함하면 어마어마하겠네요. 그만큼 도서관 규모가 상당한 편이라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할 거예요. 그래도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최보윤의 예상과 달리 판단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정인이 명쾌하게 답을 내놓자 김성민과 정지윤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줄곧 무표정으로 대화에 응했던 서애란도 당차게 끄덕거리는 고정인을 바라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두 연구원의 모습을 살펴보던 최보윤은 고정인과 서애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도해월 마스터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하니 천만다행이지. 하지만 이렇게 쉽게 결정할 만한 일은 결코 아니라고 봐. 서애란 헌터가 나한테 와서 성물 얘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내색은 안 했지만 제법 놀라기도 했고.’
그렇게 생각하던 최보윤은 서애란과 옥상에서 대화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녀는 대화를 마무리하며 서애란에게 질문했던 것이 있었다.
‘사라진 성물의 행방을 추적하는 일을 지시했던 게 도해월 마스터라고 했었죠. 그렇게 위험한 일을 지시받았을 때 곤란하거나 난처하진 않았나요? 두 분이 가까운 사이인 건 알지만, 그래도 선뜻 수락할 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 같아서요.’
질문을 들은 서애란의 대답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간단했다. 길드 마스터인 도해월의 지시였으니까. 그게 전부였다.
그 간결한 답변의 의미를 다 파악하지 못한 최보윤이 서애란에게 되물었으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고정인 역시 서애란과 비슷한 생각인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이 도해월 마스터한테 느끼는 충성심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최보윤은 도해 길드가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길드를 함께 창설한 일곱 명의 헌터들의 몫 또한 상당하다고 생각했다. 이건 자신뿐만 아니라 도해에 소속된 다른 헌터들도 여러 번 언급했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설연리 헌터가 도해 길드를 추천했던 것도 이래서였나…….’
그녀는 몇 달 전에 만난 설연리와 나눴던 기억을 어렴풋하게 떠올렸다. 과거의 설연리는 리호에 입사하려던 최보윤에게 솔직한 감상을 내놓았었다.
‘음, 리호 대신 도해 길드에 서류를 넣어 보는 건 어때요? 도해는 창설한 지 얼마 안 됐지만, 같은 시기에 창설된 다른 길드에 비하면 아주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그 기세가 찰나에만 그칠 것 같지도 않아서 미래가 기대되는 길드이기도 하고요.’
당시의 최보윤에게 그건 생각지도 못한 조언이었다. 그보다 인상적으로 남은 건 이어진 설연리의 조언이었다.
‘무엇보다……. 최보윤 헌터라면 도해 길드의 도해월 마스터와도 상성이 잘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가까이서 지켜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꾸준히 지켜본 바에 의하면 도해월 마스터는 주변 사람들을 이끄는 능력이 아주 탁월하거든요.’
최보윤과 가깝게 지내던 설연리는 그녀가 연구소를 떠나온 결정적인 이유가 연구소장과의 불화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뒤따른 조언 역시 자신의 성격을 고려해서 전했다는 사실이 몸소 느껴졌다.
설연리의 조언을 듣고 도해 길드에 입사했으나 최보윤은 아직 도해월에 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를 가까이서 본 것도 면접 자리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설연리가 리호 길드에 입사하려던 그녀에게 도해 길드를 추천한 이유만큼은 알 것 같았다. 도해월은 자신이 부재한 자리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재주가 있었다.
* * *
계속해서 걷던 나는 전생에서 평택 던전 브레이크 사태의 피해가 처음 보고되었던 지점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전생의 기억을 곱씹어 보면 이곳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는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몇 년 뒤였다.
그럼에도 내가 이곳을 첫 목적지로 삼은 건 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가장 바로잡고 싶었던 기억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전생의 평택 던전 브레이크는 이능청 승격 직전까지 발생했던 던전 브레이크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피해를 불러일으켰던 재난이었다. 추산된 사망자 수만 수천을 넘어섰고 부상자의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당시의 나는 이곳에서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던전 브레이크와 차이점이 있다고 보고 차진명에게 보고했었다. 하지만 그는 내 주장을 제대로 듣지도 않곤 내게 치욕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손이 말리면서 주먹에 힘이 실렸었다. 거대한 건물 사이에서 고개를 젖힌 뒤 화염처럼 서서히 전신을 뒤덮는 분노를 삼키고자 숨을 골랐던 기억이 있다.
무의식적으로 깊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주변 풍경은 여전히 평화롭기만 했다. 이따금 공장에서 시작된 소음이 귓가에 닿았으나 크게 거슬릴 만큼은 아니었다.
그대로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 시간이 제법 흘러가 있었다. 길드 사무실을 오래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인 만큼 볼일을 서둘러 해결해야 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마음이 되어 눈을 감고 스킬을 전개했다.
[사용자가 지정한 ‘천리안’ 스킬이 발동됩니다.]그 순간 눈앞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이내 발치에서 산뜻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오감이 열리면서 미래의 장면이 끝없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두어 번의 심호흡이 이어질 무렵 천천히 눈을 떴다.
이윽고 초여름의 미지근한 바람이 살갗을 간지럽히며 스쳐 지나갔다. 직전까지 스킬로 내다보았던 모습과 달리 눈앞의 풍경은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한편 내 심장은 스킬을 전개하던 순간부터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미래의 모습을 확인하게 되었을 즈음에는 전생에 느꼈던 고통스러운 감각까지 되살아나면서 점점 괴로워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심장을 조이는 듯한 통증까지 느껴졌다. 나는 이내 호흡을 가다듬는 데만 집중했다.
이번 생에서 반드시 일어날 일은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들이닥치기도 하는구나.
그런 깨달음을 얻는 순간 다시 한번 눈앞에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미개방 스킬 해금을 위한 특정 분기점에 도달하였습니다.] [‘선택된 예언자’ 전용 아이템 ‘□□□□ □□’ 획득을 위한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 [‘□□□ □□’가 ‘선택된 예언자’의 ‘염원’을 감지하였습니다.] [‘□□’의 전언이 전달되었습니다. 현시점을 기점으로 ‘준비된 설계자’의 ‘□□’이 일시적으로 개방됩니다.]그때 눈앞에 떠오른 건 생경한 문장들이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려는 순간, 주위의 풍경이 변모하기 시작했다.
* * *
과거 혹은 현재 또는 미래의 어느 날.
“다시 예측해. 절대로 포기하지 마.”
누군가의 간절한 음성이 파도 소리와 함께 불어온다.
“그래, 여기서 끝낼 수 없어. 한 번만 더……. 이번에는 반드시.”
맹렬하게 밀려오는 밤의 파도 위로 커다란 달이 떠 있다.
“멸망의 전조가 대지를 무너뜨릴 때.”
물기를 머금은 묵직한 바람이 팔과 다리를 옥죄기 시작한다.
“준비된 설계자가 마지막 수를 놓을지니.”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가르며 파도를 향해 내달리다 보면.
“그로부터 궤멸한 세계의 기틀이 재정립될 것이다.”
어느새 눈앞에 펼쳐진 건 거대한 물살에 달빛이 쏟아지는 풍경. 그리고 오래된 예언을 외우는 누군가의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인데…….
답을 찾으려는 순간 환한 빛이 시야를 뒤덮는다.
나는 이윽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환영 속에서 예언을 외우던 건 바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