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199
199화. 도약의 시간 (6)
등급 상승을 기점으로 시작된 파동은 날마다 궤적을 넓히며 멀리까지 나아갔다. 뉴스룸 인터뷰 이후 사람들은 내가 지나온 과거의 시간을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헌터 아카데미 내에서 오래도록 등급 변동이 없던 내가 B급으로 졸업했다는 사실을 수시로 언급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범람에서는 헌터 아카데미 재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와 길드의 이름이 언급된 뉴스와 기사를 시간 순서대로 재배열한 게시물이 꾸준히 올라왔다.
내가 이끄는 도해 길드를 향한 관심 또한 날이 갈수록 뜨거워졌다. 집무실에 앉아서 고예성을 통해 받아 본 서류 또한 각종 기업에서 보내온 투자 제안서가 바로 그 방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많지?”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확인하고 있으니 맞은편에 서 있던 고예성이 말을 걸었다. 잠시 그를 올려다보니 어깨를 비스듬하게 기울인 자세로 씩 웃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어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를 따라서 피식거리며 웃던 나는 다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비각성자가 운영하는 기업의 도움을 받고 성장하거나 보유 자본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는 길드가 적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때까지 잠잠하던 기업들이 우리에게 투자를 선뜻 제안했다는 건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나의 사례가 돈이 제법 될 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터였다.
국내에서도 소수에 불과한 A급 헌터 대열에 오른 것으로 모자라 그 시작점이 D급이었다는 희귀한 서사는 전례가 없었을뿐더러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더욱 구미가 당겼을 것이다.
“일단 들어온 대로 다 가져온 거야. 천천히 봐도 돼.”
추후 안진영처럼 이름값 있는 헌터를 더 데려오려면 그만큼의 자금이 필요했다. 내가 데려오고 싶은 헌터 중에는 안진영을 제외한 또 다른 부대원도 존재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제안은 충분히 달가운 것이었다. 하지만 기업에 의지하다 보면 언젠가 그들이 뜻하는 대로 휘둘릴 가능성 또한 존재했기 때문에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다.
“음, 우선 예성이 네가 다시 보면서 1차로 분류해 줘. 목록이 좀 추려지면 그 안에서 결정하는 게 낫겠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고예성에게 대답한 뒤 서류를 마저 넘겼다. 계속해서 보고 있으니 정원 전자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여기 정원 전자도 있네?”
“어, 나도 그거 보고 깜짝 놀랐어. 뉴스룸 인터뷰 나가고 나서 생각보다 반응이 훨씬 좋은 건 알고 있었는데, 여기서도 연락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듣기로는 그쪽 부회장이 예전부터 우리 길드를 관심 있게 보고 있던 것 같더라고.”
고예성은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얼마 전에 다녀온 평택에 대규모 공장 단지를 두고 있는 정원 전자는 게이트 시대 이전에도 굴지의 대기업이었다.
이전부터 사리가 밝았던 그들은 게이트 시대가 시작된 뒤 헌터들이 던전에 들고 들어가는 기본 장비와 보급품 제작 사업에 뛰어들면서 기세가 더욱 상승했다.
“그리고 정원 전자에서 기본 장비랑 보급품을 최상급으로 지원하고 싶다고 했어.”
이어서 고예성이 정원 전자가 보낸 서류의 내용을 간단하게 전달해 주었다. 지금 우리 길드는 장비를 자체적으로 제작하고 수리하는 시설이 부재한 나머지 필요한 물품을 전부 외부에 있는 전문 업체에서 사들이는 중이었다. 만약 정원에서 물품을 제공해 준다면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금액도 줄어들고 물품의 품질 또한 상향될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조건을 요구한다는 건 뭔가 더 바라는 게 있다는 뜻일 텐데…….”
나는 말끝을 흐리면서 서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정원 전자에서 전해 온 소식은 뜻밖인 만큼 내심 기다려 왔던 것이었다.
그들과의 협상을 잘 마무리하고 상호 간의 적절한 신뢰까지 얻게 된다면 던전 브레이크 당일에 평택에 자리한 정원 전자의 공장 단지를 비울 수 있는지 제안해 볼 수도 있을 터였다.
지잉―
그때 근처에 놓여 있던 휴대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뉴스룸 인터뷰가 방송되고 맞이한 또 다른 여파가 있다면 온갖 곳에서 연락이 온다는 것이었다.
“정리하려면 시간이 좀 걸렸겠네. 수고했어. 필요한 일 있으면 다시 부를 테니까 나가 봐도 돼.”
“이 정도쯤이야. 아무튼, 나가 볼게.”
그 말을 끝으로 고예성은 눈인사를 전한 뒤 집무실을 벗어났다. 나는 휴대전화를 들고 잔뜩 쌓여 있는 연락을 하나씩 확인해 보았다.
등급 상승 소식이 알려진 뒤 가장 먼저 연락한 건 취우의 한도일이었다. 내 소식을 접한 그는 자신이 겪은 일처럼 기뻐하면서 축하해 주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그때 정건후 헌터 대신 제가 헌터 아카데미에 갈 걸 그랬다는 겁니다. 그랬으면 해월 학생을 제자 삼을 수 있었을 텐데. 이거 참 아쉽네요.’
한도일과 했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으니 아쉬워하는 그의 음성이 귓가에 되풀이되었다. 이따금 나를 학생이라고 부르는 그는 반쯤은 농담조로 말했으나 영 거짓은 아닌 듯했다.
이어서 리호의 설연리와 사양의 김수호 또한 소식이 전해진 날 저녁에 전화를 걸어왔다. 설연리는 통화의 서두에서 내 소식을 언급하는 대신 설연호의 안부부터 물었다. 그리고 김수호는…….
‘저희 마스터께서도 축하한다는 말씀을 대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도해에 과감하게 투자하기로 했던 게 틀린 선택이 아니었다고 말씀하시기도 하더군요. 앞으로 관광용 던전을 맡고 있는 다른 길드에서도 도해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역시 안도할 만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의미한 소득이 있다면 사양에서 도해에게 관광용 던전을 양도할 무렵 반발이 거셌던 다른 길드들이 어느 정도 잠잠해졌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황선규를 비롯한 여러 길드의 관계자들이 소식을 전해 왔었다.
지금까지 상기한 건 등급 상승의 여파로 찾아온 긍정적인 영향에 관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득과 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시간 될 때 통화나 할까]이런저런 상념을 이어 나가던 나는 정건후에게서 도착한 문자를 내려다보면서 호흡을 차분하게 정돈했다. 이어서 통화 버튼을 누른 뒤 몇 신호음이 몇 번 지나갈 무렵 그가 전화를 받았다.
―그래, 오랜만이지. 소식 들었다. 이러다 나도 곧 따라잡히겠는데.
언제나처럼 인사는 생략한 그는 곧장 본론부터 꺼냈다. 묘하게 웃음기 어린 음성을 듣던 나는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면서 그의 일과를 가늠해 보았다.
“선생님도 참. 뭐, 그렇게 됐습니다. 식사는 하셨어요? 지금쯤이면 점심시간일 것 같아서요.”
―한참 전에 먹었다, 인마. 졸업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걸 잊어버려.
이어서 나는 정건후와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았다. 잠시 뒤 길어지려던 침묵을 깨고 정건후가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그보다……. 물건은 문제없이 잘 가지고 있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정건후가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그는 지금 상황에서 성물의 존재를 돌려서 언급하고 있었다.
정건후가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세간에 내 이름이 유명해지는 만큼 그와 비례하게 적이 늘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려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뭐가 됐든 앞으로 더 조심해야 할 거다.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어. 네가 가진 물건을 탐내는 놈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항상 대비하도록 해.
나는 그런 그의 조언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실제로 게니우스의 창을 소지했던 취우의 전 마스터가 성물 사냥꾼에게 습격당한 것도 그들의 입지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였다.
물론 그들이 그때와 비슷한 상황에서 나를 덮친다는 확률은 아직 계산조차 할 수 없었으나 정건후의 조언대로 경계 태세를 유지할 필요는 있었다.
―그게 아니어도 너희 길드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건 네가 제일 잘 알 거다. 항상 몸조심해.
정건후의 말대로 여전히 나와 길드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게이트 사고를 기점으로 형성된 부정적인 여론은 그 규모가 이전보다 작아지기는 했으나 완전히 외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범람에서도 헌터 아카데미에 재학할 무렵부터 돌던 소문들이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내가 마석을 가공해서 만든 약물을 먹고 등급 성장을 꾀했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근거 없는 소문을 사실이라고 믿고 그 뜻을 밀어붙이는 세력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금은 인터넷에만 상주하는 이들이 언젠가 현실에서도 타격을 입히려고 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두통까지 불거지는 기분이었다.
“명심할게요. 그리고 선생님, 조만간 학교가 아닌 곳에서 따로 뵙고 싶습니다. 드릴 말씀도 있고요.”
나는 잔가지처럼 뻗어 나가던 부정적인 생각을 거둔 뒤 정건후에게 대답했다. 머지않아 그를 만나서 사라졌던 창에 관해 새롭게 알아낸 부분과 앞으로의 계획을 공유할 생각이었다.
금세 알았다고 대답하는 정건후의 목소리를 끝으로 그와 통화를 종료했다. 자세한 일정은 차차 조율하면 될 듯했다.
“회의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휴대전화를 내려놓기 전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십여 분 정도 남아 있었다. 오전에 처리해야 하는 업무는 얼추 마무리되었으니 던전 공략 회의에 들어가기 전까지 잠시 쉬면서 머리를 식히는 게 좋을 듯했다.
들여다보고 있던 파일철을 전부 덮고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등급이 상승하고 난 뒤에 나타난 여러 변화를 하나씩 곱씹어 보고 있으니 문득 의아해지는 지점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생에서는 등급 측정을 진행할 때마다 결과에 별다른 이상이 없었어.
이때까지 측정한 기구 역시 한국마력연구소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전생에서와 달리 누구도 등급 측정 결과를 고의로 건드리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이번 생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았다는 건 내가 지나온 과거에 했던 선택이 현재에 영향을 미쳤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건 내가 이전부터 꾸준히 생각해 왔던 화두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등급 측정 결과를 건드릴 만한 사람은 오래전에 나를 포섭하려고 했던 차진명밖에 없는 것 같았다.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나니 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차진명이 등급 측정 결과를 조작해야겠다고 결심했던 시기는 대체 언제였을까.
아니, 그보다 차진명은 대체 나를 언제부터 지켜본 거지?
그렇게 묻고 있으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눈을 뜬 나는 입속에 가시를 품고 있는 것처럼 껄끄러운 심정으로 태블릿을 꺼내 회의 자료를 들여다보았다.
* * *
그로부터 두 시간 뒤. 던전 공략 회의도 어느덧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스크린 앞에 서서 회의를 주도하던 김미솔은 마지막으로 화면을 넘겼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내일 공략을 진행할 던전의 등급은 C급으로 만반의 대비가 필요합니다. 모든 팀원은 사전에 공지한 던전의 지형적 특성 그리고 최종 보스의 특성까지 꼼꼼하게 숙지해 주세요.”
스크린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블릿 화면을 들여다보며 전략을 구상하고 있으니 누군가의 시선이 옆얼굴에 닿는 듯했다.
“그럼 회의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자연스레 돌아본 곳에는 과거의 부대원이었던 안진영이 있었다. 여느 헌터들보다 체격이 좋고 인상 또한 상당히 뚜렷한 그는 김미솔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입매를 올려 웃어 보였다. 그마저도 내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