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02
202화. 칠흑의 바다와 현혹하는 달빛 (3)
뱃머리에서 시작된 불길은 선체를 좀먹을 기세로 번져 나갔다. 백이현이 서둘러 파도를 일으켜 점화하려 했으나 따라서 치솟은 바람이 말썽을 부렸다.
그로 인해 더욱 빠르게 번진 화마로 인해 선체 내부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새카맣게 변한 뱃머리는 모서리가 부서진 채 허공에 검은 재를 흩뿌렸다.
탕!
그때 상황을 주시하던 안진영이 장총을 들고 맞은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총구가 가리킨 곳에는 반인반어의 괴물 케토가 흔들리는 물살에 유유히 떠올라 있었다.
수초처럼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축 늘어뜨린 녀석은 탄환이 박힌 팔을 움찔거리며 활을 느슨하게 쥐었다. 날카로운 눈매를 깊이 감았다 뜨는 순간 샛노란 동공이 드러났다.
자연스레 시선을 낮추고 보니 광대까지 길게 찢어진 입가와 툭 불거진 길고 날카로운 치아가 눈에 띄었다. 쉴 새 없이 파도를 내리치며 중심을 잡는 듯한 꼬리와 하체는 검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휘익―
탓!
녀석이 다시 한번 활을 들어 올리더니 금세 화살을 걸고 활시위를 당겼다. 이번에는 화살이 선체의 돛에 꽂히면서 화르륵 달아오르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서 불씨가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뒤이어 케토의 주위를 맴돌던 아귀와 뱀장어 형태의 몬스터가 선체를 향해 떼를 지어 달려들었다. 녀석들은 자신이 섬기는 주인의 곁에서 의기양양해진 듯 그르릉거리는 울음소리를 내며 선체의 하단을 물어뜯었다.
당황한 헌터들의 발소리를 따라 물을 잔뜩 먹은 나무판자가 요란스러운 소음을 내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불길에 뒤덮인 선체를 지켜보던 이들은 우왕좌왕하던 끝에 각자의 무기를 통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총성이 들리고 파도가 높이 치솟으면서 무차별적인 공격이 쏟아졌으나 케토는 단발적인 공격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악!”
그때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렸다. 뱃머리 근처에서 스킬을 전개해 공격을 퍼붓던 김미솔의 팔뚝에 불화살이 스치고 지나간 듯 그녀는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새로운 몬스터가 등장한 뒤 선체 내부가 아수라장이 된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 또한 스킬을 통해 미리 확인한 것이었다.
놀란 기색을 보이는 대신 차분하게 전방을 주시하며 해결책을 고심하던 나는 안개보다 짙게 드리운 회색 연기를 손으로 헤집었다. 이내 숨을 고르면서 선체 내부를 크게 둘러보았다.
첫 번째 공략 일정을 수행하기 위해 이 던전을 고른 이유는 간단했다. 바다를 항해하는 동안 선체의 좁은 공간에서 전투를 진행하며 팀원들의 협동심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학생일 적 현장 실습을 진행할 때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으니 수월한 협동이 가능했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개개인의 실적을 올리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크고 작은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존재했다.
탕!
탕! 탕!
이윽고 검게 불탄 뱃머리 근처 난간에 서 있던 안진영이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맞은편에서 활시위를 당기려던 케토는 연이은 공격에 주춤거리더니 복부에 서너 개의 탄환이 몸에 박힌 순간 몸을 웅크리면서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선배, 지금 바로 선체 내부를 치유 필드로 지정하고 방어막을 내려 줘.”
뱃머리 맞은편에서 빠르게 걷던 나는 배의 가운데 있던 설연호에게 지시했다. 설연호는 곧바로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뒤에는 뱃머리 근처에 있던 안진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진영은 근처에 선 나에게 눈짓을 건네며 장총의 총구를 아래쪽으로 내렸다.
“모두 집중하세요. 당장 선체가 부서지거나 침몰하는 일은 없을 테니 혼란스러워할 필요 없습니다. 당황스러운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갑작스럽게 전투 설계를 이탈하기 시작하면 예기치 못한 부상이 발생할 수 있으니 지금부터는 다시 지시대로 움직입니다.”
말문을 맺는 순간 선체 바닥 전체에 환한 빛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포말처럼 얕게 밀려 나가는 빛이 난간과 뱃머리를 적셨다. 동시에 배의 기둥을 타고 오르던 빛이 돛의 끄트머리까지 닿았다가 둥글게 퍼지면서 방어막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미솔이가 좀 다친 것 같기는 한데, 이거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잠시 뒤 바닥에 고인 빛을 가르며 나타난 설연호가 말을 전했다. 그의 말대로 난간을 움켜쥔 채 웅크려 있던 김미솔이 느릿하게 호흡을 고르면서 회복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조금씩 지친 기색을 보이던 다른 헌터들 또한 안정을 되찾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휘익!
탁! 탁!
그때 등 뒤에서 케토의 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한꺼번에 날아든 다섯 개의 화살 중 두 개의 화살이 설연호의 방어막을 뚫고 배의 기둥에 꽂히며 불꽃을 피워 올렸다.
처음 설계 스킬을 시전했을 때랑 상황이 또 달라졌어.
화살에서 시선을 거둔 나는 총을 고쳐 쥐면서 생각했다. 곧바로 스킬을 통해 보았던 미래의 장면과 대조해 보면서 뒤바뀐 상황에 맞는 새로운 전투 설계를 구상한 뒤 눈을 감았다.
[사용자가 지정한 ‘설계’ 스킬이 발동됩니다.]다시 한번 설계 스킬이 발동되면서 혼란스러워하며 흩어져 있던 헌터들이 각자의 위치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나는 근처에 있던 서애란을 돌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애란이 넌 지금부터 날아오는 화살의 방향을 반대로 틀어 줘.”
서애란은 금세 고개를 끄덕인 뒤 눈을 감았다. 뒤이어 맞은편에서 수십 개의 화살을 날리는 몬스터와 나를 힐긋거리던 최보윤과 손을 쥐었다 펼치면서 파도를 가라앉히던 백이현에게 말했다.
“그리고 최보윤 헌터, 백이현 헌터는 풍랑을 동시에 조절하면서 서애란 헌터가 방향을 바꾼 화살로 몬스터를 공격합니다. 꼬리 근처에 있는 비늘이 약점이니 그 부분을 집중해서 공격해 주세요.”
쿵!
쿵!
재차 나타난 아귀와 뱀장어 형태의 몬스터가 선체의 옆구리를 가격하기 시작했다. 난간 너머로 시선을 틀고 내려다보던 나는 금세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선체를 공격하는 소형 몬스터 처리 및 전체 서포트는 제가 맡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김미솔과 안진영은 내가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뱃머리 근처에서 줄기를 길게 뻗은 김미솔이 수십 개의 불화살을 날리던 케토의 전신을 옭아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어서 그녀가 뻗은 줄기 위로 자신의 줄기를 겹쳐서 뻗은 안진영이 독성이 가미된 가시덤불로 녀석의 목덜미를 옥죈 뒤 빠른 손놀림으로 장총을 들고 총구를 겨눴다.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걷히고 재개된 전투는 이전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최단 시간 내에 몬스터를 처치할 수 있는 설계는 난이도가 제법 있는 편이었으나 이번 공략에 참여한 인원들 모두 실력이 출중했기에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었다.
탕! 탕!
[어둠을 삼킨 변형 아귀 (E)를 처치했습니다.] [어둠을 삼킨 변형 아귀 (E)를 처치했습니다.] [어둠을 삼킨 변형 뱀장어 (E)를 처치했습니다.] [어둠을 삼킨 변형 뱀장어 (E)를 처치했습니다.]어느새 불길이 잦아든 선체를 거닐며 소형 몬스터를 처치하던 나는 이따금 다른 헌터들의 행적을 주시하면서 그들의 전술을 눈에 익혔다. 때에 따라서 버프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체력 증진 스킬을 시전하기도 했다.
“이제 슬슬 끝날 때가 됐는데…….”
선체 주변을 맴돌던 소형 몬스터의 기이한 울음소리를 끝으로 주변을 전부 정리한 뒤 시간을 가늠하며 중얼거렸다.
하늘을 힐긋 올려다본 뒤 뱃머리 근처를 돌아보자 예상했던 대로 몬스터는 만신창이가 되어 김미솔의 줄기에 묶인 상태 그대로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마지막으로 녀석의 숨통을 끊어 놓기 직전, 헌터들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총을 고쳐 쥐면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다른 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서니 장총의 총구를 높이 치들고 있는 안진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때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축 늘어져 있던 몬스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위태로운 자세로 간신히 호흡하던 녀석이 우두커니 서 있던 헌터들을 둘러보았다. 그런 녀석의 시선이 대열의 뒤쪽에 있던 나를 향하면서 샛노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공정과 정의의 수호신이 너와 함께하는구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는 생전 처음 듣는 것이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야.
―지금 너를 돌보는 건…….
온몸에 소름이 돋아난 나머지 주먹을 힘껏 움켜쥐면서 몬스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녀석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거듭해서 울려 퍼지는 동안 안진영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안진영의 탄환이 몬스터의 눈동자와 목덜미 그리고 복부를 관통하면서 녹색 혈흔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컥, 꺽, 꺼걱, 꺽―
온몸을 뒤틀며 사람의 귀로 듣기에 무척 거북한 소리를 내던 몬스터의 목소리가 더는 울려 퍼지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긴장을 풀면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메두사는 신이 선물한 무기를 가진 자를 살려 두지 않지.
그마저도 잠시 무언가 굵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면서 목을 꺾은 몬스터가 고개를 들었다. 축 늘어진 머리카락 틈으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샛노란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그런데 너는 신의 무기를 소지한 것뿐만이 아니라…….
―천□를 □조하는 완□한 □□의 가호□ 받고 □구나.
그 목소리를 끝으로 상공에 떠올라 있던 녀석의 몸이 축 늘어졌다. 나는 김미솔과 안진영이 합세하여 몬스터의 사지를 잘게 찢어 놓는 동안 멀거니 서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와, D급 몬스터를 이렇게 빨리 처치한 건 또 처음이네요.”
“저도요. 마스터가 서포트로 붙으니까 체감이 확실히 달라요.”
머릿속을 맴돌던 기이한 목소리를 곱씹고 있을 즈음 근처에 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돌아본 곳에는 모든 헌터들이 멀끔한 모습으로 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불길에 타들어 갔던 뱃머리 또한 조금 부러지고 말았을 뿐이었다. 돛대를 매단 기둥도 군데군데 그을린 자국이 있었지만 다행히 멀쩡했다.
다들 괜찮은 것 같네. 이제 다음으론…….
다음 전투까지 남은 시간을 셈해 보고 있을 즈음 선체가 평화로워진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서 몸을 틀고 그들의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내 인적 없이 한적한 난간에 기대어 몬스터가 나에게 남긴 말을 곱씹어 보았다.
공정과 정의의 수호신은 아마도 유스티티아의 검을 말하는 거겠지. 마지막 말은 자세히 들리지 않았지만, 내가 누군가의 가호를 받고 있다고 했고.
빠르게 생각을 이어 나가고 있을 무렵 누군가 근처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곳에는 머리카락이 조금 젖은 백이현이 서 있었다.
“마스터님.”
“아, 백이현 헌터. 아까는 고생 많았습니다.”
백이현은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난간에서 팔을 거두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아, 다른 분들은 저쪽에서 휴식하고 계세요. 그리고, 음…….”
이내 그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한 표정으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