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03
203화. 칠흑의 바다와 현혹하는 달빛 (4)
어둠 속에서 들여다본 그의 얼굴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앳되어 보였다. 그는 말을 꺼내기에 앞서 망설이는 듯했으나 표정은 묘하게 들뜬 감정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었다.
나한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예나 지금이나 나보다 어린 상대를 대하는 건 늘 난제였다. 물론 백이현과 나는 길드의 마스터와 소속 헌터의 관계에 불과했으나 그가 문제혁과 같은 나이라는 걸 생각하면 어쩐지 조심스러워졌다.
“왜 사람들이 오늘을 간절히 기다렸는지 알 것 같아요. 이렇게 합을 맞춰 보니까 마스터가 없는 현장이랑 지금 이 현장이 뭐가 어떻게 다른지 확실하게 느껴져요”
머지않아 백이현이 말문을 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매가 올라갔다. 그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긴장이 풀린 듯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
“특히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던 미래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정말 짜릿했어요.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미리 알고 움직이니까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사실 지유 누나한테 마스터님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마스터님의 능력이 어떤 건지 크게 실감이 안 났거든요.”
이어서 그는 도해에 입사하기 전에 자신이 어떻게 지냈었는지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그가 몇 해 전에 B급으로 각성한 뒤 곳곳에서 주목받으면서도 줄곧 혼자 움직였던 건 헌터로 살아가는 제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얘기를 남들이 들으면 복에 겨워서 현실을 보는 눈이 멀었다고 흉을 보겠죠. 남들은 어떻게든 각성하고 싶어서 안달인 와중에 평생 먹고살 걱정 없는 B급으로 각성했으면서 말이 많다고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한테는 이전의 삶을 떠나오는 게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가 말하는 이전의 삶이라는 건 피아노를 전공하던 시절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아직 어린 백이현에게 그 시절은 그가 살아온 시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기억을 내려놓고 다른 삶을 사는 것은 말마따나 쉽지 않은 게 당연했다.
“분명 그랬는데……. 요즘 들어서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백이현은 자신의 앞에 있던 난간을 두 손으로 힘껏 쥐면서 말했다. 때마침 불어온 바닷바람이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들추었다.
“음, 마저 얘기하기에 앞서서 그동안 마스터님을 몰래 지켜봤던 건 이번 기회에 정식으로 사과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이윽고 허공을 바라보면서 고민하던 그가 무언가 떠오른 듯 자세를 바르게 가다듬은 뒤 나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런 모습마저도 딱 그 나이다운 모습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불쾌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그 부분에 관한 건 한참 전에 현선민 헌터와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으니 이제 괜찮습니다. 마저 말해 보세요.”
나는 숨을 길게 내쉬면서 그에게 대답했다. 지금 백이현은 그동안 김미솔에게 전해 들었던 것과 다르게 유난히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다른 분도 아니고 마스터님 앞에서 제 생각을 얘기하려니까 자꾸 긴장하게 되네요. 사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간단해요.”
줄곧 뻣뻣하게 굴던 백이현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어서 그는 쉴 새 없이 요동하는 바다처럼 검고 깊은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도해 길드에 들어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저를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짓는 것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나는 결국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달싹이면서 대답을 망설였다.
지금 이 던전의 환경이 회귀 직후에 처음으로 들어왔던 던전과 무척 흡사해서일까. 방금 백이현이 나에게 했던 말은 마치 회귀한 다음의 내 삶을 누군가 들여다보고 성적을 매긴 뒤에 주는 보상처럼 느껴졌다.
“언제 들어도 좋을 말이네요. 고마워요, 백이현 헌터.”
언제 들어도 좋을 그 말을 전생의 나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었지. 그걸 깨닫고 보니 방금 백이현이 했던 말을 이번 생에서 다시 만난 부대원과 동료들에게 꼭 한 번쯤은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다음 몬스터는 언제 나타난다고 하셨죠? 중심부까지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을 생각해 보면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민망했던 건지 짧은 헛기침을 하던 백이현이 말했다. 나 역시 감상적인 기분에서 벗어나 하늘에 뜬 달을 올려다보았다.
“잘 기억하고 있군요. 백이현 헌터의 예측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세 개 달린 상어 떼가 나타날 겁니다.”
나는 상공에서 시선을 거두고 앞으로 나타날 녀석들의 특징을 상기해 보았다. 맞은편에 있던 백이현 또한 내 목소리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앞서 처리한 바다 괴물 케토보다는 비교적 약한 편이지만, 꽤 질긴 녀석이라 대치하는 시간이 제법 소요될 거예요. 움직임이 무척 빠르기도 해서 이번 전투에서는 파도를 다룰 수 있는 백이현 헌터의 역할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백이현과 함께 뱃머리 쪽으로 걸음을 옮긴 뒤 다음 전투의 전략을 곱씹었다.
난간에 기대어 앉아 쉬고 있던 헌터들이 나를 발견하고 하나둘씩 일어설 즈음 멀리 떨어진 곳에서 파도가 수상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곧 두 번째 전투가 시작될 겁니다. 지금부터 전투 시 유의 사항을 설명하겠습니다. 반복하지 않을 예정이니 모두 집중하세요.”
나는 이내 뱃머리에서 몸을 틀고 말문을 열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인원들은 반듯한 자세로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사양 길드 사무실.
죽향과 참나무 향이 가득 밴 훈련실 너머에는 정수희만 접근할 수 있는 개인 공간이 존재했다. 그곳에는 수십 년 동안 그녀가 수집한 수백 개의 검이 각각의 벽면에 꽂힌 납작한 선반에 가로로 길게 놓여 있었다.
중앙에 놓인 고동색 원목 책상에는 검집을 벗긴 검과 휴대전화가 가지런하게 놓인 상태였다. 그 앞에 앉은 정수희는 전용 천으로 검날을 닦으면서 휴대전화에서 새어 나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음, 비결이라고 할 만한 건 없습니다. 전 그저 허튼 수를 쓰지 않고 매사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거든요. 물론 무기와 아티팩트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겁니다.
정수희가 어느덧 세 번째로 반복해서 듣고 있는 건 얼마 전에 도해월이 진행한 인터뷰 영상 속 음성이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서슬 퍼런 검날을 문지르던 그녀는 인터뷰의 마지막 대목에 접어들 때마다 예외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허튼 수를 쓰지 않고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
얼핏 듣기에는 한없이 정석적인 대답에 불과했으나 정수희는 그 안에 담긴 의도를 단번에 간파했다. 이때까지 방송을 비롯한 매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도해월이 이런 인터뷰를 진행한 건 누군가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일 터였다.
손에 쥐고 있던 천을 내려놓은 뒤 칼자루를 쥔 정수희가 환한 빛 아래에 검날을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露積成海]그녀의 손짓을 따라 검날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칼자루 위에 새겨진 선명한 각인이 덩달아 빛을 발했다. 노적성해. 한 방울의 물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룬다는 뜻이었다.
정갈하게 새겨 넣은 글자를 한참 들여다보던 정수희가 검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오늘 그녀가 이 검을 꺼낸 건 순전히 도해월 때문이었다.
“그래, 도해월 마스터는 누구한테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
이어서 정수희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누구도 듣지 못할 질문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누군가의 대답을 듣는 대신 자연스럽게 자신의 머릿속 한편을 차지하고 있던 차정주의 이름을 떠올렸다.
도해월은 정수희에게 있어 김수호의 다음으로 자신의 밑으로 직접 들여 가르치고 싶은 인재였다. 과거의 차정주가 도해월을 포섭하려고 했던 걸 보면 그 또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던 정수희는 자신의 앞에 놓인 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차정주는 얇은 물줄기에 불과했던 도해월이 이토록 넓은 바다를 일구어 낼 줄 알았을까. 스스로 건넨 질문의 답은 명확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쯤 배가 아프다 못해 속이 쓰릴 지경이겠지. 꿈에서나 그릴 법한 인재가 버젓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서도 제 손에 넣지 못했으니.”
그대로 눈을 감은 정수희가 조소를 드리우자 입가의 잔주름이 또렷해졌다. 그녀는 한때 자신과 뜻을 나란히 했던 젊은 차정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차정주와 자신이 갈라선 이유가 헌터 아카데미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생긴 이념 차이 때문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건 정말이지…….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이었어.’
그 이유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정수희가 차정주를 증오하는 데 오랜 세월을 소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녀가 가슴 깊이 증오하는 건 차정주뿐만 아니었다. 그의 곁에서 모든 일에 가담한 박호재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던 분노가 차오를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을 뜬 정수희는 숨을 길게 고르면서 손가락을 순서대로 하나씩 쥐었다가 펼치기를 반복했다.
소란한 속내를 차분하게 가라앉힌 그녀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도해월을 떠올리며 몇 년 후의 계획을 상기해 보았다.
‘이대로 일이 잘 풀리기만 한다면 그 계획을 굳이 실행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렇게 되면 큰 수고를 덜 수 있겠지…….’
그녀가 떠올린 계획은 현재의 이능단속‧관리본부가 이능청으로 승격한 이후에 실행할 예정이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대로 몇 년 내에 청으로의 승격이 완료되면 정수희는 그 안에 자신의 심복을 몰래 심어 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해월이 자신이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염원을 이루는 데 일조해 준다면 그 계획을 접고 다른 방편을 마련해도 충분할 듯했다.
이 모든 가정을 현실에서 성립하게 하려면 도해월을 다시 만나서 그의 속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편으로 포섭해야 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정수희는 칼자루를 쥐고 칼날을 검집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이어서 검을 본래의 자리에 내려놓은 뒤 자리로 돌아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일세. 조만간 온실에 손님을 초대하도록 하지.”
정수희는 김수호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자신의 온실에 들어설 도해월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 * *
두 번째 전투가 시작된 지 어느덧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쉴 새 없이 불어나는 상어 떼와 대치하던 헌터들은 전투의 막바지에 이르러 지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코끝에서는 역한 피 냄새가 점점 선명해졌다.
“고지가 코앞입니다. 여기서 흔들리면 기세가 뒤집힐 수도 있으니 정신 똑바로 다잡고 밀어붙이세요.”
선체를 활보하며 눈에 띄는 잡다한 몬스터를 처치하고 서포트를 도맡았던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외쳤다. 이윽고 선두에서 몬스터를 처치하던 백이현과 최보윤을 향해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탕! 탕!
두 가지 버프 스킬을 덧입은 레몬 빛 탄환이 그들의 어깨에 꽂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더뎌지던 움직임에 활력이 붙으며 처치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제 마지막이에요!”
“뒤쪽도 전부 정리했습니다!”
휘익―!
퍽!
좁은 선체를 한참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이들의 발소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마지막까지 집요하게 들러붙던 상어의 대가리에 창을 꽂아 넣은 최보윤이 거칠게 숨을 고르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쪽도 전부 처치했습니다. 이놈 다음이 최종 보스라고 하셨죠.”
벅찬 숨을 견디지 못한 듯 눈가를 찡그린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달 아래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거리를 셈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