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04
204화. 칠흑의 바다와 현혹하는 달빛 (5)
최종 목적지인 달 아래에 도착하기 위해선 대략 사십 분 정도 더 나아가야 했다. 전투 상황이 완전히 정리된 다음 선체 내부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축축하게 젖은 선체 내부를 활보하며 부상이나 열외 인원이 없는지 확인해 보았다. 팀원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상태를 확인한 다음에는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서애란의 근처로 다가갔다.
“예전에 던전 멸절의 설산에 들어갔을 때 우리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기억나?”
내가 물은 건 그 당시 설연호가 부상을 얻고 쓰러졌을 때 다른 동료들을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하고자 서애란의 스킬을 사용했던 순간의 일이었다.
덩달아 지나간 시간을 곱씹어 보는 듯 눈가를 미약하게 찡그리던 서애란이 음, 하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 이번에도 그때처럼 사람들이 달빛에 현혹되지 않고 전투에만 임할 수 있게 의식을 조종했으면 하는 거지?”
“맞아, 정확해.”
서애란은 금세 내 의도를 알아채고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내 대답을 듣고 희미하게 미소 짓던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면서 무언가 고민하더니 재차 입을 열었다.
“그때도 얘기했지만 내 스킬은 연호 선배가 구사하는 힐이랑 성격이 완전히 달라. 공격 스킬을 일종의 버프 스킬처럼 치환해서 쓰려고 하는 거라 사람을 조종 대상으로 포섭하는 건 마찬가지라서 사전에 동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말을 마친 서애란은 바닷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잠시 침묵했다. 그대로 한참 고민하던 기색을 보이던 그녀는 낮게 떠오른 달을 힐긋거리면서 한 걸음 나아왔다.
“그렇게 하려면 내가 사용하려는 스킬이 어떤 건지 충분히 이해시킨 상태에서 동의를 구하는 먼저겠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내가 얘기하고 올게.”
잠시 뒤 팀원들과 대화를 마친 서애란이 맞은편에서 손을 흔들었다. 이내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팀원 모두가 자신의 의견에 동의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최종 보스가 기거하는 던전의 중심지까지 도착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마지막 전투와 관련한 설명을 시작할 테니 모두 집중해 주기 바랍니다.”
서애란의 신호를 확인한 나는 서늘한 바닷바람을 가르며 몇 걸음 나아간 뒤 모든 이들의 이목을 모았다.
“사전에 전달했던 것처럼 이 던전의 최종 보스인 돌연변이 메두사와의 전투에서는 무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전투에서는 개개인의 스킬만을 활용하여 최대한 짧은 시간 내에 공략을 마무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움직이겠습니다.”
말문을 여는 순간부터 하나둘씩 일어서기 시작한 헌터들이 내가 서 있는 기둥 아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심각한 표정을 짓던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는……. 이 던전의 최종 보스에 관해 설명하는 게 좋겠군요.”
짤막하게 숨을 고른 뒤에는 곧바로 최종 보스인 돌연변이 메두사에 관한 배경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 던전의 최종 보스인 돌연변이 메두사는 고대 서사시에서 처음 등장한 본래의 메두사가 사망하는 과정에서 흘린 핏방울에서 태어난 존재였다.
시공간을 넘어 이 던전에 정착한 그녀는 자신의 원형인 메두사만큼 강한 힘을 갖진 못한 나머지 눈을 마주치면 돌이 되는 저주를 내리진 못하는 상태였다. 대신 다른 저주를 내릴 수 있었는데.
“무기를 소지한 사람이 메두사와 눈을 마주치면 그 무기로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공격하게 되는 저주에 걸릴 수 있다. 운 좋게 그 저주는 피해 가더라도 달빛에 현혹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고, 그걸 대비하기 위해 서애란 헌터가 우리를 상대로 스킬을 사용할 거다. 제가 이해한 바가 맞을까요?”
안진영의 요약은 군더더기 없이 정확했다.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 유능한 그를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다른 이들을 둘러보았다.
“네, 정확합니다. 지난 두 번의 전투에서처럼 최종 보스와의 전투 또한 각 헌터들의 스킬을 연계하며 진행하겠습니다. 단시간 내에 처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만큼 앞선 순서에서 스킬을 시전하는 헌터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걸 명심하세요.”
첫 번째 던전 공략 일정을 이곳에서 진행하기로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제 겨우 합을 맞춘 지 석 달에 접어드는 인원들이 서로를 빠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킬을 연계하며 전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각자 소지한 보급품 점검을 시작해 주세요. 무기 없이 전투에 임하는 만큼 평소보다 많은 보급품이 필요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서애란과 함께 대화하면서 떠올렸던 과거의 기억을 재차 더듬어 보았다. 당시의 내가 던전 공략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유스티티아 검의 부가 스킬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 스킬 자체에 포함된 부가 기능 때문이었지. 일명 ‘천칭의 심판’이라고 불리는 부가 기능을 전개한 순간 주변이 온통 환한 빛으로 물들면서 상황이 전복되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기능을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사용해 볼 수 있을까. 확실히 익혀 두면 앞으로도 요긴하게 쓸 수 있을 텐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칠 즈음 정면에 떠오른 달이 이전보다 더욱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 *
돌연변이 메두사와의 대치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순간 바로 시작되었다. 녀석은 달빛이 쏟아지는 검은 물살을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며 온갖 형태의 파도를 일으켰다. 동시에 헌터들의 공격을 자유자재로 피해 다니면서 선체를 뒤집어 전복시킬 기세로 거칠게 흔들어 놓았다.
콰직―
쿵―!
결국 돛대를 달고 있던 기둥이 거센 파도를 이기지 못하고 선체의 가운데를 길게 가로지르며 쓰러졌다. 가운데 놓인 경계선을 기준으로 좌우로 나뉘어 선 헌터들은 바닷물을 잔뜩 뒤집어쓴 채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대로 두면 기둥이 내려앉아서 선체가 절반으로 쪼개질 겁니다!”
그때 기둥 근처에 서 있던 누군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때까지 파도를 부유하던 소형 몬스터와 침착하게 전투를 이어 나가던 헌터들은 그 소식을 듣는 순간 표정이 굳더니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멋대로 내 바다를 침범했으니 그 정도 죗값은 달게 받아야지. 하지만…….
헌터들을 향해 무어라 전하려 입을 떼려 했으나 머릿속에 울려 퍼진 메두사의 음성으로 인해 모든 움직임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어서 녀석이 말끝을 흐리자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내가 만족할 수 있을 만한 선물을 준다면 바다를 함부로 어지럽힌 죄를 기꺼이 사해 줄 의사가 있다.
메두사는 검붉은 비늘로 뒤덮인 수백 개의 뱀을 머리카락처럼 달고 있었다. 얇고 창백한 피부 아래로 푸르스름한 혈관이 덤불처럼 얽혀 있는 모양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옆에서 헌터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듯했으나 나의 시선은 메두사에게 묶여 버린 터라 주변을 돌아볼 수 없었다.
―어디 보자. 너희들 중에 쓸 만한 녀석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말을 끝으로 허공에 떠 있던 메두사가 검은 물살을 가로질러 뱃머리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웬만한 성인 남성의 몸집보다 두 배는 커다란 듯한 녀석은 선체 내부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래, 역시 네놈이 좋겠구나.
이윽고 녀석의 어깨에 팔 대신 달려 있던 기다란 구렁이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왔다.
“큽!”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며 긴 혀를 날름거리던 녀석이 낚아챈 건 다름 아닌 내 목덜미였다. 순간 숨이 막힌 상태로 허공에 떠오른 나는 뱃머리 끄트머리에 간신히 발을 디디고 선 채 녀석을 마주했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이 네놈이었어. 네놈이 아주 재미있는 물건을 들고 내 바다에 들어왔더구나.
허공에 날아오른 채 뱀의 아가리로 목덜미를 물고 있는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머리카락을 대신한 뱀처럼 검붉은 눈동자에 칼날처럼 길게 박힌 동공이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전신에 오한이 들면서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 천칭의 심판을 사용한다면 녀석을 바로 해치울 수 있을 텐데. 부가 기능을 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래에서 난리가 난 듯한데 정신이 없어 팀원들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일단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다.
목덜미를 옥죈 뱀의 송곳니가 살갗을 파고들면서 아릿한 고통이 퍼지기 시작했다. 흐릿해지려는 의식을 간신히 다잡은 나는 상황을 곱씹어 보면서 부가 기능 ‘천칭의 심판’이 시작될 수 있었던 조건이 무엇이었는지 추정해 보았다.
그리고 그때 머릿속으로 가장 이상적인 수가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뱃머리를 디딘 두 발에 힘을 주었다.
[사용자가 지정한 ‘공정한 판별자’ 스킬을 발동합니다.] [‘공정한 판별자’스킬의 부가 기능 ‘천칭의 심판’을 행하기 위한 특수 발동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눈앞에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이내 발치에서부터 황금빛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내가 네놈의 잔꾀 따위에 넘어갈 것 같더냐? 난 너처럼 신의 무기를 가진 놈을 절대로 살려 두지 않아. 게다가 넌!
내 목덜미를 물고 있던 구렁이가 허공에 번쩍 떠오르면서 발밑에 닿던 감각이 사라지고 말았다. 잔뜩 분노한 녀석의 머리통에 달린 수백 마리의 뱀이 덩달아 분개하며 살갗에 박힌 구렁이의 송곳니에서 독이 퍼져 나가려 했으나.
―아악! 악! 이게 대체! 컥! 커컥!
절반쯤 파괴된 선체에서부터 환한 빛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메두사의 전신을 휘감았다. 녀석이 그 빛에 깃든 강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온몸을 뒤트는 사이 거대한 파도가 떠오르더니 칼처럼 날이 선 채 구렁이의 머리통을 베어 버렸다.
“헉!”
이윽고 반듯하게 잘린 머리통에서 녹색 혈흔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나 역시 자연스레 허공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막혔던 숨이 간신히 트이면서 호흡을 고르려는 찰나 다시 한번 치솟은 파도가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면서 뱃머리 쪽으로 나를 이끌더니 순식간에 선체 가운데 몸이 내려앉았다.
“마스터는 이쪽으로 데려오세요! 치료는 제가 맡을 테니 다른 분들은 최종 보스 처리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바닷물을 잔뜩 삼킨 나머지 귓가가 먹먹한 가운데 설연호의 음성이 또렷하게 전해졌다. 간신히 눈을 뜨고 돌아본 곳에는 최보윤과 백이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두 사람은 나를 설연호에게 넘긴 뒤 뱃머리 쪽으로 내달렸다.
“괜찮아? 지금 의식은 있는 거지?”
다급하게 묻던 설연호의 손끝이 나의 목덜미를 짚었다. 부드럽게 닿은 살갗이 상대적으로 뜨거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온몸을 움찔거렸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설연호는 차가운 이마에 손을 얹은 채 그대로 힐을 시전했다. 나는 그 손길을 따라서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는 채로 맞은편 뱃머리에서 빠른 속도로 오가는 헌터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의 다 됐습니다! 다음 순서는 안진영 헌터님 맞죠? 바로 가면 될 것 같아요!”
“이쪽도 백이현 헌터가 전부 정리했습니다!”
“그럼 저도 바로 움직일게요!”
바닥에서 올려다본 나머지 그들의 표정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허공에서 색색의 빛이 수도 없이 얽히는 모습만큼은 선명하게 담아 볼 수 있었다.
―감히 네놈들 따위, 컥, 꺽, 끅! 아악!
펑―!
쉼 없이 이어지는 타격을 견디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신음하던 메두사는 결국 안진영의 마지막으로 뻗은 씨앗 형태의 폭탄을 떠안고 폭발해 버렸다. 뒤이어 갈가리 찢겨 나간 사지가 조각조각 흩어진 채 어두운 바다에 흩날렸다.
“됐다, 됐어요! 마스터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아까 저기 부길드장님이랑 같이…….”
폭발음이 잦아든 뒤 누군가 허공을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이어서 뱃머리에 몰려 있던 헌터들이 나에게 달려오는 순간.
[던전 의 최종 보스를 처치하였습니다.] [던전 공략이 완료되었습니다.]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눈앞에 떠올랐다. 젖은 몸으로 축 늘어져 있던 나는 안도하면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