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07
207화. 마주한 진실 (1)
긴 시간을 달려 도착한 목적지는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높은 빌딩 숲을 지나쳐 도시의 외곽으로 향한 차량이 멈춘 건 정수희의 사유지로 추정되는 어느 부지였다. 인적이 드문 공간에 서 있는 직사각형의 거대한 건축물은 창문을 비롯하여 흔한 장식 하나 없이 검게 칠해져 있었다.
“이렇게 생긴 건물은 처음이죠. 저도 익숙해지기까지 꽤 걸렸습니다.”
그때 곁에 서 있던 김수호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나는 그 말에 가볍게 미소를 지었으나 웃음의 끝이 길지 않았다. 이윽고 입안에서 쓴맛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과 함께 전생에서 지나온 기억이 떠올랐다.
과거의 내가 이곳에 방문했던 건 김수호의 정체가 발각된 후 그가 내 손에 사망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당시 사양 길드가 이능청 내부에 스파이를 심어 두었다는 소식이 공공연하게 알려지면서 차진명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사양 길드를 고발하고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그때 나한테 명령을 조달한 건 차진명이었지만, 그걸 지시한 사람은 차정주라고 했었지.
얼핏 떠오른 기억을 따라서 눈가를 찡그리고 있으니 김수호가 정면을 손짓했다. 나는 그를 따라서 걸음을 옮기며 차진명이 나에게 내렸던 명령의 세부 사항을 상기해 보았다.
사양 길드를 대상으로 한 수사에 검찰뿐만이 아니라 나까지 동원된 건 지금 김수호와 함께 향하는 이 공간이 마력으로 만든 특수한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차진명은 보안 장치에도 강한 마력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나를 수사에 파견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 무렵의 나는 차정주와 정수희의 관계를 알지 못했었다. 차정주가 차진명을 통해 지시를 내린 건 그저 사양 길드가 이능청에 정면으로 대적했다는 사실에 분노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때 차정주가 여기서 찾아내려고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들어가 보면 알 수 있겠지. 어쩌면 정건후조차도 알지 못하는 내막을 전해 들을 수도 있고.
나는 김수호와 함께 입구를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건물 안쪽에서 미약한 진동 소리가 울리는 듯하더니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이쪽으로 오면 됩니다.”
김수호는 육중한 철문 너머로 개방된 길목을 성큼성큼 가로지르며 나를 안내했다. 입구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긴 복도였다.
“이 복도를 도해월 마스터와 함께 걷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나네요. 마스터님이 이곳에 생면부지의 타인을 초대하신 건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저였죠.”
온화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던 김수호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는 큰 기대감과 지난날을 향한 그리움이 어린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그런 중요한 공간에 다른 분도 아닌 김수호 헌터와 함께하고 있네요. 저야말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어서 내가 전한 대답은 있는 그대로의 진심이었다. 그가 맞이해야 했던 참혹한 과거와 완전히 멀어진 이곳에서 나누는 대화가 오래도록 기억될 듯했다.
지잉―
머지않아 걸음을 멈춘 곳에서 다시 한번 진동 소리가 울리더니 이내 거대한 문이 열렸다. 그곳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코끝에 상쾌한 풀 향기가 스쳐 지나갔다.
이어서 시야에 담긴 건 고르게 다듬은 산책로였다. 김수호와 함께 다시 걸음을 내디딘 순간 비가 막 그친 하늘에서 부는 듯한 서늘한 바람이 전신을 휘감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히고 보니 건물의 천장이 아닌 실제 하늘과 흡사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김수호는 나를 곁눈으로 살피면서 길을 안내했다.
“신기하죠. 저도 처음 들어왔을 때 무척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는 김수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마저 둘러보았다. 이곳은 분명 건물의 내부였으나 마치 관광용으로 개발한 F급 던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산책로 주변에 심긴 다수의 식물 또한 공들여 관리한 흔적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보면 볼수록 헌터 아카데미에 있는 필드랑 비슷한 것 같네.
문득 스며든 기시감의 정체는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필드의 존재를 떠올리고 이곳의 전경을 살펴보니 더더욱 비슷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셨군요.”
김수호는 정면을 바라보면서 깍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는 정면에 놓인 분수대 앞에 서 있는 정수희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백색의 대리석으로 만든 둥근 분수대 앞에서 나를 바라보던 정수희는 김수호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오랜만입니다, 도해월 마스터. 그동안 소식은 잘 전해 들었어요.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몸소 입증해 주었더군요.”
투명한 궤적을 그리며 쏟아지는 물줄기를 배경으로 선 정수희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꼿꼿하고 곧은 자세로 선 그녀와 손을 맞잡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기꺼이 믿고 협업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선선히 대꾸하는 동안 총기로 빛나는 눈동자가 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꿰뚫는 듯한 눈빛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손을 놓은 뒤 분수대 너머를 내다보았다.
“헌터 아카데미에도 이곳과 비슷한 환경의 훈련 시설이 있습니다. 자세한 건 잘 모르겠지만, 이 공간을 구동하는 방식도 헌터 아카데미에 있는 훈련 시설과 흡사해 보이네요.”
그 목소리를 듣던 정수희는 나를 따라서 시선을 옮기는 대신 뒷짐을 진 자세로 입매를 올려 웃었다. 미소 짓는 그녀를 재차 마주한 순간 나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단번에 눈치채는군요. 도해월 마스터라면 그럴 줄 알았습니다.”
흡족하게 웃어 보이던 그녀는 분수대를 둥글게 감싼 산책로 쪽을 손짓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서 걸음을 내디뎠다. 근처에 있던 김수호는 공손하게 인사한 뒤 어디론가 모습을 감췄다.
“짐작했던 대로 헌터 아카데미의 필드와 이 공간의 작동 원리는 상응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이곳을 방문했던 차정주 후보에게 정보를 주었던 것이 나였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느릿하게 발을 맞춰 걷던 정수희는 차정주의 이름을 언급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나보다 한참 작은 체구라는 것이 의식되지 않을 만큼 단단한 눈빛이 나를 관통했다.
“밀린 안부도 나누었고, 이 공간의 소개도 마쳤으니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나는 그녀와 마주했던 시선을 거두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장에 마주 선 상대와 탐색전을 끝낸 뒤 검을 겨누기 직전의 순간처럼 긴장되었다.
“나에게는 긴 시간 동안 간직해 왔던 염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 염원을 이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맸지요.”
“그 염원을 이뤄 줄 수 있는 사람이 저라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듯하군요.”
이곳에 발을 들인 이상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면서 재차 내려다보니 정수희가 고개를 한차례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이루고 싶으시다던 숙원이 혹시 차정주 후보와 관련된 일인 겁니까?”
정수희는 다시금 팔을 뻗어 정면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끝이 향한 곳에는 아담한 규모의 유리 온실이 우두커니 놓여 있었다.
“들어가서 마저 얘기합시다. 긴 이야기가 될 테니.”
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그녀를 따라 환한 빛이 사선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는 투명한 공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별장이 자리한 숲속에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낮은 조도로 내부를 밝힌 별장에 남아 있던 서애란과 고정인은 각자의 자리에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해월이는 언제쯤 도착한다고 했지?”
둘 사이의 긴 침묵을 깨뜨린 건 고정인이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태블릿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서애란을 보았다.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은 채 손등에 턱을 괴고 있던 서애란이 자세를 바르게 하며 대답했다.
“부산에서 바로 올라온다고 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 같아요.”
서애란은 이어 시간을 확인한 뒤 고정인이 내려놓은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에는 익숙한 누군가의 이름이 적힌 자료가 띄워져 있었다.
“다시 봐도 당황스럽지. 나도 그래. 내가 뭘 봤나 싶다.”
그들이 살펴보던 자료는 최보윤과 다른 연구원들이 떠나간 뒤 고정인이 따로 입수한 것이었다. 그들을 먼저 돌려보낸 뒤에 이 자료를 찾아낸 건 조사를 지시한 도해월이 먼저 알아야 하는 사안이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따 해월이 오면 어떤 것부터 얘기할지 정리해 볼까?”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서애란을 향해 고정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서애란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면서 고정인을 마주 보았다.
“김성민 연구원이 추가로 알아낸 바에 의하면 레드 문 프로젝트는 사실상 박호재 연구소장이 자리를 비운 시점에 잠정적으로 종료되었다는 거죠. 성민주 선배가 실험을 지속시킨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그저 피실험자를 마구잡이로 늘리기 위해서였고요.”
“맞아. 그동안 차진명이랑 강효서 뒤에 가려져 있어서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성민주 걔도 참……. 아니다.”
팔짱을 끼우고 앉은 고정인이 혀를 끌끌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서애란은 고정인을 힐긋 쳐다본 뒤 자료를 내려다보았다.
“참, 그 창은 다시 찾는 대로 정건후 선생님한테 다시 돌려준다고 했지? 선생님도 알고 계신대?”
“거기까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조만간 만나지 않을까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뒤 주변에 놓인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느긋하게 일어선 고정인도 서애란을 따라 손길을 보탰다.
“음, 이건 그냥 나 혼자서 생각하고 있던 건데 말이야.”
사락거리는 종잇장을 뒤적이던 고정인이 허리를 곧게 세우면서 입을 열었다. 서애란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위험한 물건을 계속 남겨 둬도 괜찮을까? 심지어 그 창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뀐 걸로 추정되는 상태라 더 위험하다면서. 그 물건만 있으면 도시 하나는 거뜬하게 날려 버릴 수도 있고, 그 이상도 충분히 가능한 거라면 차라리…….”
말끝을 흐리던 고정인의 시선이 덩그러니 놓인 태블릿을 향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건 자료 화면 속에 적힌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별장의 문을 두드렸다. 무어라 대답하려던 서애란은 고정인에게 문가를 턱짓했다. 뒤이어 고정인과 함께 나타난 건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도해월이었다.
“오는 길이 좀 복잡하지. 그래도 금방 왔네.”
“이 정도는 괜찮아. 그나저나 최보윤 헌터랑 다른 연구원들은 돌아갔다고?”
고정인과 나란히 걸어오던 도해월이 서애란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응, 그러고 나서 자료를 하나 더 찾았어. 근데 그건 해월이 네가 먼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먼저 부른 거야.”
복도를 지나쳐 거실로 들어선 도해월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은편 창문을 내다보았다. 어둑한 창문 너머로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