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10
210화. 전사의 발자취 (1)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까. 하려던 이야기가 남아 있는 듯한데.”
의자에 느슨히 기대어 앉아 있던 정건후가 등을 곧게 세우면서 말했다. 평소의 기색을 완전히 되찾은 한도일도 온화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사라졌던 창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다는 건 그 창을 되찾을 의사도 있다는 거겠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도해 길드가 창의 행방을 뒤쫓았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먼저 듣고 싶네요. 도해월 마스터도 창을 찾고 있다는 건 정건후 선생님을 통해 이미 전해 들었지만, 그 이유까지는 알지 못했거든요.”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으면서 자연스럽게 상체를 기울인 한도일이 나에게 물었다. 내가 성물을 소지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로서는 무척 궁금했을 것이었다.
“처음부터 창의 행방을 추적하던 건 아니었습니다. 저보다 헌터 아카데미를 먼저 졸업한 이관부의 차진명 헌터의 뒤를 밟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성물의 행방을 알게 된 겁니다.”
입술을 달싹이면서 한도일에게 할 수 있는 말을 고른 뒤 차분하게 전달했다. 한도일은 차진명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반쯤 기울였다. 이내 정건후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무언가를 더 묻는 대신 느릿하게 끄덕거렸다.
“사라졌던 창이 한마연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접한 순간부터 제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저는 그 창을 본래의 주인과 가장 가까웠던 정건후 선생님에게 돌려드릴 생각입니다.”
이어지는 말을 듣던 한도일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정건후를 힐긋거렸다. 정건후는 그 정도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표정 변화 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방금 하셨던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더 궁금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한도일을 향해 재차 물으니 그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그거면 충분해요. 차진명 헌터의 이름이 언급된 게 좀 의외지만, 전 정건후 선생님처럼 두 사람을 가르쳤던 스승도 아니니 여기서 더 물어볼 건 없을 것 같네요. 꼭 알아야 하는 게 있다면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겠죠. 계속 얘기해 봐요.”
곁에서 찻잔을 내려놓은 정건후도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두 사람과 눈을 마주치면서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럼 다시 사라졌던 창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창을 동원한 실험은 몇 년 전에 종료된 상태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정건후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찻잔의 테두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 실험에서 성물이 쓰임을 다했다는 건 차정주 후보와 박호재 연구소장은 완전히 손을 거뒀다는 의미겠군. 그럼 그 물건은 지금 어디에 보관되어 있지? 아직도 한마연에 있는 건가? 만약 우리가 되찾기 전에 새로운 주인이 생긴다면 그것대로 골치 아파질 듯해서 묻는 거다.”
찻잔 위를 배회하는 손가락에 시선을 두었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정건후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눈을 감았다.
“제가 우려하던 것도 바로 그런 지점이었어요. 조사 과정에서 만났던 성물 연구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주인이 없는 상태에서는 물건을 그대로 가져와도 큰 문제가 없지만, 만약 새 주인이 생겼다면 그 주인에게서 물건을 강제로 탈취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거기까지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한도일은 자세를 바꿔 앉으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허공을 바라보며 무언가 고민하던 그는 나와 정건후에게 시선을 옮겼다.
“누가 됐든 그 창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만발의 준비를 해 두겠군요. 그런 사람과 대적해서 물건을 다시 가져오려면 우리 쪽에서도 그만큼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할 텐데……. 그 부분은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한도일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있던 정건후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만약 차진명이 게니우스의 창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면 언젠가는 그와 정면으로 대치해야 할 터였다.
“답을 찾고 있는 거라면 멀리 갈 것도 없지. 성물만큼 강력한 건 다른 성물밖에 없으니.”
차진명과 대치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고 있을 즈음 맞은편에 있던 정건후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국에 아킬레우스의 방패를 소지한 S급 헌터가 있어. 스퀘어 길드라는 이름은 뉴스에서도 간혹 나왔으니 너도 알고 있을 거다. 풍문에 듣기로는 그 헌터와 정원 전자의 이성욱 부회장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더군.”
나는 정원 전자의 이름을 듣는 순간 고개를 들고 정건후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언급했던 헌터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보고 있으니 금세 답이 나왔다.
“아, 그 헌터라면 잘 알지. 이름이……. 나디아 라인하트였나?”
생각하고 있던 답을 소리 내어 내뱉은 건 한도일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나 역시 전생에서부터 분명 기억하고 있던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그동안 떠올리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전생에서 그녀는 차진명이 유스티티아의 검을 얻기 두어 해 전에 S급 던전에서 사망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으니 그녀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한동안 떠들썩했던 기억이 차츰 선명해졌다. 이후 그녀가 소지했던 아킬레우스의 방패는 그녀가 이끌던 스퀘어 길드 산하의 성물 연구소에서 보관되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조만간 이성욱 부회장을 만날 수 있게 된다면 그의 앞에서 나디아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언급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의 앞에서 사라진 성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순 없겠지만, 일이 잘 풀린다면 그녀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될지도 몰랐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녀에게 예견된 미래를 바꿀 기회를 마련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무턱대고 그 헌터한테 도움을 청할 수는 없는 노릇인 건 두 사람 다 잘 알 거다. 성물을 다시 가져올 계획을 세우기 전에 정말 새로운 주인이 생긴 게 맞는 건지부터 확인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군. 오늘은 그걸 확인할 방법부터 논의하도록 하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질 무렵 정건후가 입을 열었다. 나는 눈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나와 설연호는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자리한 정원 전자의 본사를 방문했다. 이성욱 부회장의 뜻으로 정원 서초 사옥이라 불리는 고층 건물에 초대된 우리가 도착한 곳은 통창 너머로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회의실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저희 직원들과 협의하시죠. 대화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면 될 듯한데……. 아, 추가로 궁금한 부분이 있다면 뭐든 물어보셔도 됩니다.”
이성욱과 마주 보고 앉은 자리에서 대화를 나눈 지 어느덧 두어 시간이 지났다. 그는 깍지 끼운 손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음,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말씀해 주셨던 것처럼 자세한 사항은 협의를 거치면 될 듯합니다.”
나는 손으로 쥐고 있던 서류의 밑부분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곁에 앉아 있던 설연호 또한 별다른 질문이 없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전 이때까지 도해 길드를 꾸준히 지켜봐 왔습니다. 본의 아니게 이제야 연락을 드리게 되었지만,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눠 보니 훨씬 만족스럽네요.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건후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이성욱은 날카로운 눈매와 밝은 갈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전형적인 미남이었다. 만족스러운 기색을 보이는 그에게 가볍게 웃어 보이며 지금까지 확인했던 서류를 마지막으로 뒤적거렸다.
이번 미팅을 통해 전체적인 사항을 다시 조율한 결과 정원 전자 쪽에서 우리에게 처음 제시했던 것보다 조건이 훨씬 상향되었다. 상향된 조건 대부분은 부회장이 즉흥적으로 제안한 것들이었다. 그 외의 자세한 사항은 고예성에게 넘기면 될 듯했다.
서류에서 손을 거둔 뒤에는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정원 전자가 사전에 전달했던 시간까지 한참 남은 나머지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 얘기한 시간을 다 채울 거라더니. 생각보다 일찍 끝났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이성욱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미팅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당황하신 것 같군요. 사실 예정된 일정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예상하지 못한 언사에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보다 먼저 이성욱에게 질문한 설연호가 나에게 무언가 알고 있었냐는 듯 눈짓을 보냈다. 나는 그를 곁눈으로 보면서 고개를 작게 저어 보였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도해월 마스터님을 기다리고 계신 다른 손님이 한 분 더 계셔서요.”
그런 나와 설연호를 지켜보던 이성욱이 슬며시 웃으면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계시면 저희 직원이 안내하러 올 겁니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서 이동하면 도해월 마스터님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손님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우리는 나중에 다시 만나죠. 오늘 즐거웠습니다.”
이성욱은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누군지 알려 주지 않고 미팅룸을 빠져나갔다.
“여기 계속 있어도 괜찮겠어? 누가 더 온다는 말은 따로 없었잖아.”
설연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나는 이성욱이 데려온 손님이 누구인지 고민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괜찮을 것 같아. 혹시라도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싶으면 바로 연락할게.”
뒤이어 설연호까지 빠져나간 미팅룸 내부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혼자가 된 나는 통창 근처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 뒤 서울의 전경을 내다보았다.
똑똑―
머지않아 누군가 문을 두드린 뒤 모습을 드러냈다. 문간을 넘어서서 나에게 다가온 건 말끔한 정장 차림의 여성이었다.
“지금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마지막으로 살펴본 나는 그녀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뒤 한참이 지나서 다다른 곳은 이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 자리한 스카이 라운지였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낯선 공간으로 나를 안내한 여성은 넓고 한적한 공간의 입구에서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 모습을 감췄다. 그녀에게 눈인사를 전한 나는 한눈에 보아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내부를 가로질러 걸음을 옮겼다.
직원들을 위해 마련된 미니 바를 지나쳐 다다른 공간의 가운데 서 있던 건 금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성이었다. 팔짱을 끼운 채 고개를 반쯤 기울인 그녀는 뒤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감지한 건지 반사적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 도해월 마스터. 드디어 왔군요. 도해월 마스터를 만나려고 여기서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영어로 말문을 연 그녀는 반갑게 미소 지으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순간 스쳐 지나갔던 무표정한 얼굴에 깃들어 있던 서늘한 기색은 완전히 걷힌 채였다.
“정식으로 인사하죠. 스퀘어 길드의 마스터 나디아 라인하트입니다.”
이윽고 나와 키가 엇비슷한 장신의 여성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그녀의 모습과 눈앞에서 마주한 얼굴을 겹쳐 보았다. 이어서 그녀가 내민 손을 조심스레 맞잡는 순간…….
맞붙은 손바닥 틈에서 환한 빛이 번지더니 순식간에 긴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수십, 수백 개의 갈래로 퍼져 나간 빛줄기가 사방을 뒤덮으면서 나와 그녀를 중심으로 크고 둥근 막을 형성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