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11
211화. 전사의 발자취 (2)
맞붙은 손바닥에서 시작된 빛이 순식간에 시야를 물들였다. 수천 갈래의 빛줄기가 폭죽처럼 터지면서 둥근 막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그녀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본능적으로 팔을 힘껏 비틀었다.
“가만히 있어요. 아직 안 끝났으니까.”
그러자 나디아가 내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통증이 느껴지는 나머지 눈살을 찌푸리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데없는 힘겨루기에 맥없이 밀릴 처지는 아니었으나 우선은 손에 힘을 풀었다.
“D급에서 A급으로 등급이 상승했다는 게 허튼소리는 아니었나 보네요. 이런 경우는 생전 처음 보는 터라 거짓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그녀가 중얼거리는 동안 맞은편에 있던 나디아의 얼굴까지 감출 만큼 환하게 번졌던 빛이 차츰 걷히기 시작했다. 덩달아 하얗게 물들었던 주변 기물이 본래의 색감을 되찾는 동안 나는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뒤이어 둥근 방어막 위로 물그림자가 유유히 흘러 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방어막은 순전히 나를 보호하기 위해 생성된 듯했다.
“방어막을 세운 걸 보니 도청이나 급습을 막으려 했던 듯한데……. 이건 좀 무례한 처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지만 처음 마주한 상대의 허점을 공략하는 건 의도가 어떠했든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붙잡혔던 손을 쥐었다 펼치고 있으니 사람의 온기와 구분되는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느껴졌다.
“첫 만남부터 결례를 범한 점은 사과할게요.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도해월 마스터의 소식은 국외에서도 활발하게 언급되고 있는 만큼 영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하게 해 두고 싶은 것도 있었고.”
그 말을 끝으로 입매를 올려 미소 짓던 나디아가 고개를 가볍게 까딱였다. 사방이 은은한 물빛으로 물든 가운데 그녀의 연한 초록색 눈동자가 고유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일순 의아해진 나는 턱을 기울이면서 그녀가 했던 말을 되짚어 보았다. 분명하게 해 두고 싶은 게 있다는 건…….
뭐지? 등급 상승 말고도 궁금한 게 더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의문이 드는 순간 머릿속을 되짚어 나디아가 지닌 아킬레우스의 방패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때까지 세간에 알려진 건 아킬레우스의 방패가 그 이름과 걸맞는 강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정도였다. 그 외에 칭호 부가 스킬과 부가 기능에 관한 건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금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일전의 나디아가 나와 악수하는 순간 빛이 퍼져 나왔던 건 이 공간에 방어막을 세우기 위한 것뿐만이 아닌 듯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오늘 제가 도해월 마스터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짐작한 것 같군요.”
시선을 비스듬하게 틀고 있던 나는 다시 나디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에 담긴 내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저는 도해월 마스터가 유스티티아의 검을 소지했다는 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냐고 묻는다면…….”
그녀가 말끝을 흐리면서 슬며시 미소 짓는 순간 입가에 옅은 잔주름이 새겨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아직도 서늘한 기운이 맺힌 손을 쥐었다가 펼쳤다.
“성물에 부여된 칭호 스킬과 그 부가 기능을 이용했습니다. 이 정도면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겠죠.”
그녀의 의도는 절반 정도는 이해가 되었으나 절반은 아직 오리무중이었다. 몇 년 전에 아킬레우스의 방패의 부가 기능을 통해 내가 성물을 소지했다는 걸 알아챘으면서도 나를 직접 찾아오지 않았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 그런 와중에 나를 만나러 왔다는 건.
“여기까지 직접 찾아오신 건 제가 소지하고 있는 검 때문이 아니라 또 다른 성물 때문인 거군요.”
소리 내어 말하고 보니 짐작만 하던 가정이 한층 명확해졌다. 이때까지 잠잠하던 나디아가 나를 만나기 위해 갑작스러운 방문을 결심한 건 그만큼 석연치 않은 이유 때문일 것이었다.
“혹시 그 성물의 새로운 주인이 나타난 겁니까?”
게니우스의 창이라는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으나 나디아는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그녀가 나를 찾아온 목적이 분명해졌다.
“도해월 마스터가 유스티티아의 검을 발견한 뒤로 한동안 잠잠하던 방패가 최근에 다시 반응했습니다. 오래전에 게니우스의 창을 처음으로 습득했던 주인이 사망한 뒤로 새로운 주인이 나타난 것 같더군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상한 점을 한 가지 발견했습니다.”
직전까지 여유로운 태도로 대화에 임하던 나디아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이어서 그녀는 성물의 부가 기능을 통해 자신이 보았던 장면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도해월 마스터와 창의 이전 주인이 성물을 습득했을 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그 물건이 던전이 아닌 실험실 같은 곳에 보관되어 있더군요. 창은 거대한 유리 케이스 안에 보관되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수십 갈래의 전선이 연결된 상태였습니다. 그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은 도해월 마스터와 비슷한 연배인 것처럼 보였고요.”
차분하게 이어 나가는 언사 속에서 내 귓가에 또렷하게 박힌 건 ‘두 사람’에 대한 언급이었다. 나디아 또한 미묘한 기색을 알아챈 듯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을 더했다.
“그곳에 있던 건 흰 가운을 입은 여성과 정장 차림의 남성이었어요. 창을 직접 손에 쥔 건 여성이 아닌 남성이었고요. 분위기로 볼 때 이때까지 그 창을 보관하고 관리한 건 여성인 듯해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내가 유스티티아의 검을 습득했다는 걸 알게 된 차진명이 그 대체물로 게니우스의 창을 택한 듯했다. 그렇다는 건 그가 검을 소지했을 때 맞이했던 미래와 이번 생에서 내가 맞이하게 될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도해월 마스터는 그 두 사람 중에서 창을 가져간 남성에 관해 알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얼마나 알고 있는 건지 묻고 싶군요.”
그리고 어쩌면 나디아가 이번 생의 결말을 바꿀 수 있는 열쇠이자 마지막 변수가 되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고개를 들었다.
* * *
같은 시각, 평택의 어느 던전.
호흡을 좀먹는 지독한 화염이 사방에서 일렁이는 불 속성 던전의 내부. 짙은 회색 작업복을 입은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곳곳에서 화산이 끓어오르는 길목을 천천히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몇 달 전에 묻어 놓은 S급 마석의 여파로 공기 중에서도 강한 마력이 깃들어 있는 채였다. 그때 특수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전문 업자들과 함께 걷던 한국마력연구소의 연구원이 자신의 곁에 있던 누군가에게 말했다.
“몇이나 찍혔어요?”
“이전보다 가파른 폭으로 상승 중입니다. 예상 수치에서 빗나가지 않은 걸 보면 예정일이 어긋나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한국성물연구소에서 거처를 옮겨 온 신입 연구원이 손목에 착용한 기계를 들여다보면서 수석 연구원에게 대답했다. 그런 그들은 지켜보던 전문 업자들은 주변에 몬스터가 나타나진 않는지 경계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들 또한 손목에 채운 기계의 액정과 정면을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점검은 이쯤에서 마치면 될 것 같습니다. 슬슬 복귀할 준비 하시죠.”
그때 수석 연구원이 나란히 걷던 이들에게 말했다. 신입 연구원은 노련한 그의 태도를 곁눈질로 살피면서 던전의 전경을 크게 한번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잠시 멈춘 곳은 던전의 중심부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저기에 S급 마석이 묻혀 있다니……. 직접 와서 보고도 믿기지 않네.’
신입 연구원은 저 너머를 바라보기만 해도 께름칙한 기분이 드는 탓에 고개를 금세 저었다. 오늘 그가 들어온 이 던전은 오래전부터 D급으로 유지되고 있었으나 내부에 있는 몬스터의 등급은 조금씩 상승하고 있었다.
특수한 힘으로 봉인해 둔 던전의 최종 보스 또한 S급 마석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계속해서 등급이 상승하는 상태라고 했다. 실험 예정일을 한 달 정도 앞둔 지금은 내부를 채운 공기에도 독성이 섞이면서 점점 매캐해지고 있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을 걸까? 이 던전이 터지고 나면 밖에 있던 사람들이…….’
신입 연구원은 문득 양심의 가책 혹은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마저도 잠시, 몇 걸음 앞서 걷던 수석 연구원이 그에게 빨리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래, 그게 다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나는 그냥 받은 만큼 일하고 빠지면 돼.’
그즈음에서 생각을 마무리한 그는 수석 연구원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쉼 없이 일렁이는 화염 속을 지나치는 동안 머릿속으로 몇 달 전에 윗선에 의해 처리된 연구원을 떠올렸다.
자신들의 행각이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도망을 시도했던 그 연구원은 며칠 뒤 연구소 지하의 한 실험실에서 숨을 거둔 채로 발견되었다. 그녀의 사인은 ‘음독’이었다.
“다른 던전 상황도 확인해 봤어요?”
그날 그 연구원의 시신을 발견했던 건 다름 아닌 신입 연구원이었다. 그는 시신을 마주하는 순간 코끝을 파고들었던 화한 향기를 상기하며 몸을 떨었다. 이내 자신에게 질문한 수석 연구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오전에 확인했습니다. 말씀하셨던 대로 같은 날에 실험을 진행할 수 있도록 조치한 상태입니다. 수치도 원활하게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요.”
보고를 듣던 수석 연구원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뒤이어 긴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신입 연구원과 그의 곁에서 걷던 이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전신을 휘감는 고온의 열기를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 * *
나디아의 질문으로 시작된 대화는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녀는 성물의 새 주인을 알고 있다는 내 대답을 듣고 차진명에 관해서 이것저것 캐물었다.
“그렇군요. 제가 오늘 도해월 마스터를 만나러 온 건 부가 기능을 통해서 창의 새 주인에 관한 걸 파악할 때 느꼈던 이상한 기운 때문이었습니다. 그 환영 속에서 보았던 새 주인과 또래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쩐지 도해월 마스터라면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믿고 찾아왔죠.”
잠잠히 경청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나디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어서 그녀는 머리 위에 드리운 방어막을 힐긋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듣고 보니 제가 봤던 환영을 도해월 마스터와 함께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직접 확인해 보고 마저 얘기해 봅시다.”
나디아가 눈을 감는 순간 얕은 바람이 불어왔다. 이윽고 물빛의 방어막 위로 당시의 그녀가 보았던 장면이 반사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환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예상했던 대로 차진명과 성민주였다. 그리고 차진명이 창을 거머쥐는 순간 나디아가 앞서 언급했던 ‘이상한 기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그건 전생의 차진명이 유스티티아의 검에 저장하여 사용했던 ‘악의’와 흡사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