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17
217화. 초월자의 편지 (1)
다시 눈을 떴을 땐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헛웃음을 지으면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나는 걸음을 뒤로 물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억하던 대로 이곳은 던전의 내부도 그 바깥도 아닌 제삼의 공간, 이전에도 다녀간 적 있던 만화경의 내부인 듯했다.
[사용자가 시간의 궤도를 이탈하여 □□□의 피안(彼岸)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만화경 내부의 규칙과 대칭의 원리를 이해한 뒤 의 설계를 완성하면 바라던 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이윽고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눈앞에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그쪽에 잠시 시선을 두었던 나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여기에 왔던 게 언제였더라.”
혼자서 묻고 있으니 성물을 다루는 법을 익히기 위해 설연호와 함께 들어왔던 던전에서 ‘언약의 무지개’라는 이름의 아이템을 사용했던 것이 금세 떠올랐다.
“그것도 벌써 한참 전이네.”
그때를 떠올려 보며 정면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속해서 걷다 보니 눈앞에서 수만 갈래의 빛이 교차하면서 천장과 벽면에 독특한 문양을 새겨 넣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보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고개를 반쯤 젖히고 빛의 행렬을 지켜보던 나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내 탄환에 관통당했던 등허리를 문질러 보았다. 전신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은 여전했으나 상흔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긴 한숨을 내쉬면서 눈을 감고 만화경 바깥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해 보았다. 총성과 함께 탄환이 신체를 꿰뚫고 난 뒤 서서히 전신을 타고 번지던 고통은 독주를 마시고 숨이 멎어 가던 순간에 느꼈던 감각과 상응하는 것이었다.
생의 마지막 호흡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예감하며 느낀 허무함과 비로소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묘한 해방감이 교차하는 순간을 잊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내가 죽었거나, 아니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건데…….
손등으로 이마를 문지르면서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초조함을 느끼며 이리저리 배회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언약의 무지개’ 아이템을 사용하고 나면 현실의 내 몸은 의식을 잃고 정신만 이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지난번에는 설연호가 곁에 있어 주었기에 염려할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내가 머물렀던 곳이 던전 브레이크 현장의 한복판이었던 만큼 바깥의 상황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제기랄. 이게 다 차진명 그 개자식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꼬여 버린 건 전부 차진명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치솟는 분노와 함께 그의 이름을 곱씹어 보던 나는 무수히 교차하는 빛으로 그린 문양 아래에서 생각을 이어 나갔다.
머지않아 내가 떠올린 건 나를 관통했던 탄환에 관한 것이었다. 그 탄환은 분명 등급이 높은 몬스터를 짧은 시간 내에 사살하기 위해 제작되었을 터였다.
십수 년 전에 사망한 취우의 전 마스터도 내가 당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번에 나를 노린 놈들도 성물 사냥꾼일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에 상황을 보자면 분명 차진명의 지시를 받았을 터.
“그건 그렇고……. 왜 거기서 그 향기를 맡았던 거지?”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간신히 깨어난 뒤 나에게 남은 건 수많은 의문이었다. 불현듯 차진명의 독주에서 나는 화한 향기를 맡고 난 뒤 나는 단숨에 이성을 잃고 근원적인 욕망만 남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런 다음에는 머릿속을 지배한 욕망을 따라서 차진명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맨정신이었다면 절대로 행하지 않을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할 무렵 머릿속으로 잠정적인 결론이 떠올랐다. 당시의 내가 무력하게 총에 맞을 수밖에 없었던 건 아마도 차진명이 사용한 스킬에 현혹되었기 때문인 듯했다.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움켜쥔 채 분노로 온몸을 떨던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호흡을 바로잡았다. 만화경 내부의 풍경은 여전히 눈이 부실 만큼 환하고 아름다웠다.
그 순간에도 모양을 달리하는 무수한 문양에 시선을 거둔 뒤 인벤토리에 들어가 ‘언약의 무지개’ 아이템 설명 화면을 띄워 보았다.
[획득 아이템 ― 언약의 무지개 (등급 추정 불가)전용 아이템입니다. 사용 즉시 시간의 궤도를 이탈하여 □□□의 피안(彼岸)으로 이동합니다. 만화경 내부의 규칙과 대칭의 원리를 이해한 뒤 의 설계를 완성하면 바라던 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 해당 아이템의 사용 가능 횟수는 총 3회입니다. (2/3)
‣ ‘□□’이 사용자에게 남긴 전언을 확인하시겠습니까?]
눈앞에 떠오른 푸른 활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이전과 달리 가려져 있던 글자들의 내용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여전히 가려져 있는 글자는 이 공간의 주인과 나에게 전언을 보낸 존재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 봤던 전언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건가?”
어느새 통증이 절반쯤 가신 몸을 가볍게 풀면서 손을 쥐었다가 펼쳐 보았다. 그러자 이 공간이 품고 있는 마나의 기운이 체내에 부드럽게 흡수되면서 신체가 서서히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스킬을 전개했다.
[사용자가 지정한 ‘천리안’ 스킬이 발동됩니다.]딸깍.
이윽고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듯한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천천히 눈을 뜨고 정면을 바라보자 사방에서 어지럽게 부유하던 패턴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 * *
한편 바깥에서 이 모든 소식을 전해 들은 정건후는 일정을 마무리한 뒤 곧바로 도해월이 입원해 있다는 병원으로 향했다. 오늘 그가 이전부터 예정되었던 볼일을 보는 사이 벌어진 많은 일들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방금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겼어 의식은 아직 안 돌아왔고]로비를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정건후는 휴대전화를 꺼내 한도일이 남겨 놓은 메시지를 확인해 보았다. 그가 이 메시지를 남겨 놓은 것이 벌써 한참 전이었다.
―문이 열립니다.
잠시 뒤 단조로운 음성이 울리면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재킷 안주머니에 휴대전화를 집어넣은 정건후는 지금쯤이면 도해월이 깨어나 있기를 바라면서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병실 문을 열어젖힌 정건후가 말했다. 안쪽에 있던 설연호와 한도일은 주춤거리며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오셨어요, 선생님. 그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먼저 입을 뗀 건 설연호였다. 그는 한도일을 힐긋 쳐다본 뒤 정건후를 바라보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반면 한도일은 행색이 잔뜩 흐트러진 채로 도해월이 누워 있는 침상 옆 간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다른 건 뉴스에서 보셨던 그대로예요. 그리고 정인이가 현장에 있었던 드론 영상들 몇 개 입수하는 대로 바로 보내 준다고 해서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그걸 보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알았다. 다른 상황은 다 정리됐고?”
“네, 사무실 일은 우선 미솔이한테 넘기고 왔어요.”
어느새 침상 근처로 다가온 정건후는 미동 없이 누워 있는 도해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일전에 전해 들었던 대로 그는 의식을 잃고 난 뒤 몇 시간째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다.
―오늘 평택에서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 현장에서 도해 길드의 도해월 마스터가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피습을 받은 사실이 알려져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발견되는 즉시 병원으로 이송된 도해월 마스터는…….
그때 맞은편에 놓여 있던 티비에서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건후는 사고 당시 도해월이 발견되었던 현장의 모습을 취재한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이관부 쪽에서도 도해 길드를 당장 고발하진 못할 거야. 해월 학생이 피습당한 게 알려지고 나서 비난 여론은 잠잠해진 상태이기도 하고. 그보다……. 대체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네.”
작은 의자에 걸터앉아 몸을 웅크린 한도일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면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건후는 입술을 짓씹으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런 상황은 그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건 의식 없이 누워 있는 도해월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조금 알아보니 차정주 후보가 이 사안을 접하고 나서 무척 당황했다고 하더군. 이관부 내부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아마 이런 일을 꾸민 건…….”
지잉―
정건후가 말문을 맺기도 전에 어딘가에서 진동 소리가 들려 왔다. 그의 말을 경청하던 설연호는 움찔거리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말씀하시는 와중에 죄송해요. 음, 방금 드론으로 촬영한 영상이 확보된 것 같아요.”
“그럼 그것부터 확인해 보도록 하지.”
정건후는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서 휴대전화를 턱짓했다. 병실에 모여 있던 세 사람은 침상 근처에 있던 소파로 자리를 옮긴 뒤 고정인에게 전송받은 영상을 확인해 보았다.
화면 속 도해월은 누군가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어느 순간 초점이 반쯤 나간 얼굴로 거동을 멈췄다.
잠시 뒤 그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총구를 겨누는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공격당한 것으로 보였다.
“왜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총구를 겨눈 거지?”
그때 한도일이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를 힐긋거리던 정건후는 도해월에게 총알이 날아오는 순간 영상을 정지한 뒤 화면을 확대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이걸 자세히 봐.”
정건후가 입을 열자 한도일과 설연호가 화면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화면의 가운데 떠오른 총의 생김새를 유심히 살펴보던 한도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 총은 분명……. 그놈들이 왜 해월 학생한테?”
“그놈들이요?”
그런 그의 곁에서 화면을 내려다보던 설연호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둔 정건후는 복잡한 심경이 되어 잠들어 있는 도해월을 돌아보았다.
* * *
스킬을 시전하는 순간 복잡한 패턴이 걷히면서 수많은 장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벽면과 천장을 가득 메운 각각의 장면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번에 내가 보았던 건 성물을 가지고 던전을 활보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타난 건 각기 다른 상황을 보여 주고 있었다.
“예전에 봤던 것들이랑 완전히 달라졌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장면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려던 나는 금세 어지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정면을 바라보니 눈에 띄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무수한 장면 중에서도 절반 이상은 지금처럼 길드를 세워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능단속‧관리본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내가 지금처럼 길드의 마스터로 분하게 되는 경우 매번 비슷한 시기에 나를 피습하는 이들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그것 말고도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던 많은 장면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장면이 하나 더 있었다.
그 장면 속에서 나는 전생에서처럼 집무실이 아닌 공간에서 차진명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화한 향기가 나는 독주가 놓여 있는 채였다.
저건 내가 겪은 일이 아닌데…….
수수께끼 같은 장면에 현혹된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그 장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지가 닿는 순간 눈앞의 장면이 흐릿해지면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사용자가 지정한 ‘기억’은 현시점에서 접근할 수 없는 시간대입니다.]기억? 접근할 수 없는 시간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초월자의 편지’ 아이템을 사용하여 해당 ‘기억’의 잠금을 해제하시겠습니까?]의아해하는 사이 또다시 푸른 활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수락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단단하던 발밑이 부드럽게 푹 꺼지면서 모래알이 차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