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18
218화. 초월자의 편지 (2)
어느덧 평택 던전 브레이크 사태가 발생한 지 사흘이 지났다. 사태의 여파로 안팎이 여전히 소란한 가운데 차진명은 피의자를 수사하는 조사실과 흡사한 공간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고요를 느끼며 두 번째 실험이 가져온 후폭풍을 가만히 헤아려 보고 있었다.
조도가 낮은 조명 아래에서 반쯤 그늘진 얼굴로 앉아 있던 그는 다리를 꼰 채 발목을 까딱거렸다. 이내 꼬았던 다리를 풀고 내내 감돌던 엷은 웃음기를 삼킨 채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주위를 잠시 둘러보았다.
널찍한 공간 가운데 놓인 직사각형의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조명에 시선을 두고 있으니 오래전 강효서와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순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차진명에게 있어 강효서는 여러 방면에서 두고두고 기억될 만한 인물이었다. 특히 차진명이 제조한 독주를 처음으로 권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물론 그가 첫 번째 희생자로 강효서를 선정한 데는 큰 의미가 있진 않았다. 그저 독주의 제조법을 완성한 뒤 효능을 시험해 볼 만한 적합한 때를 기다리던 와중에 강효서가 사고를 친 것뿐이었다.
소소한 실험에 임하는 마음으로 권했던 독주는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있는 장면을 만들어 냈다. 제 앞에 놓인 독주와 자신을 바라보던 강효서의 허망한 눈빛이나 그동안 숨겨 왔던 진실을 악에 목소리로 쏟아 내는 모습은 예상치 못했던 신선한 장면이었달까.
“도해월이 진정 노리는 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라고 했었나?”
등받이에 몸을 느슨히 기댄 채 팔짱을 끼우던 차진명이 중얼거렸다. 고작 그따위 언사를 유언으로 남기는 어리석음에 차진명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강효서를 떠올릴 때마다 맥없이 웃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차진명은 독주를 제조하는 데 더욱 공을 들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행보를 방해하거나 방해할 법하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사람에게 독주를 건넸다.
그리고 눈앞에 놓인 독주를 확인한 이들은 대부분 강효서처럼 화를 내면서 발악했다. 때때로 목이 터질 듯 오열하면서 차진명에게 용서를 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뭐가 됐든 머지않아 자신의 세상이 끝난다는 걸 직감한 사람이 온몸으로 고통을 표출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차진명에게 기이한 희열을 안겨 주었다.
그와 동시에 그에게 아주 고약한 습관이 하나 생겼다. 차진명은 눈앞에서 독주를 들이켠 이들이 완전히 숨을 거두고 나면 자연스럽게 도해월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스스로 계획한 긴 여정의 끝에서 독주를 들이켤 도해월이 보일 반응을 상상해 보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자신을 이토록 집요하게 노리는 건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한번 맞붙은 이상 도해월에게 그는 자신에게 있어 티끌보다 하찮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해 주고 싶었다.
‘겁대가리 없이 내 계획에 훼방을 놓았으니 마땅한 책임을 지게 해야지. 뭐 묻은 개처럼 사납게 짖어 대는 꼴을 지켜보는 게 슬슬 지겹기도 하고.’
이때까지 차진명이 도해월의 행보를 지켜보기만 했던 건 사실상 부친인 차정주 때문이었다. 이제 그는 부친에게 더는 아쉬울 것도 없어졌으니 오랫동안 구상했던 계획을 펼쳐 놓을 차례였다.
똑똑―
그때 누군가 닫힌 문을 두드렸다. 차진명은 느긋하게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문간을 힐긋거렸다. 노크 소리가 울린 뒤에도 한참을 잠잠하던 문은 그가 들어오라는 대답을 남긴 뒤에야 천천히 열렸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조금 더 소요될 것 같습니다.”
뒤이어 나타난 건 곤란한 얼굴을 한 강준희였다. 문을 반쯤 열어 두고 들어선 그는 깍듯한 자세로 차진명에게 고개를 숙였다. 열린 문틈 너머로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그렇겠지. 오늘 데려온 놈은 제대로 아는 게 없을 거야. 적당히 하고 이쪽으로 보내.”
날것의 소음이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내젓던 차진명이 말했다. 고개를 반쯤 숙인 강준희는 그런 그를 힐긋거리면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 도해월 마스터는 아직도 차도가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그쪽 사무실이랑 병원 앞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고 들었어요. 여론도 그쪽으로 완전히…….”
그때 차진명이 한쪽 손을 들고 강준희의 말을 저지했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을 새삼스러운 것처럼 떠들어 대는 그를 탐탁지 않은 눈길로 살피면서 혀를 끌끌 찼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식은땀을 흘리던 강준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서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 그것 말고는, 음……. 본부 내부에서도 이런저런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곧바로 고발장을 접수할 예정이었는데, 일이 꼬이는 바람에 혼선이 생겼다면서 이원석 헌터가 특히 분노한 상황이라고 했, 했습니다.”
강준희의 입에서 이원석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차진명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면서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차진명은 그 늙은 구렁이 같은 인간의 속셈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던전 브레이크 사태를 기점으로 이능단속‧관리본부를 이능청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계획에 착수한다는 사실을 접한 그는 지난 두 달 동안 차정주와 자신의 곁에서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고는 했다.
“그리고 또……. 아시다시피, 음, 후보님께서…….”
차진명의 곁에서 조마조마해하던 강준희가 뒤이어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그제야 그를 돌아본 차진명은 아예 눈을 감고 허공에 손짓했다. 이제 됐으니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뜻이었다.
“그럼 조금 이따 다시 오겠습니다.”
강준희는 그 말을 끝으로 문간을 넘어섰다. 그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은 차진명은 오늘 오전에 만났던 차정주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현재 언론에서는 도해월을 습격한 범인을 찾기 위해 온갖 가설을 내놓고 있었다. 추측에 열을 올리는 건 이능단속관리본부 소속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완전 범죄에 이를 수 있었던 자신의 계획을 알아챈 유일한 사람은 자신의 부친인 차정주였다.
―네 아비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훤히 아는 놈이 그따위 패악을 부려? 하등 쓸모없는 자식. 그러니 내가 도해월 그 녀석을 그때…….
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으니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지겨운 언사가 되풀이되는 듯했다.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힘껏 움켜쥔 차진명은 언젠가 도해월 역시 자신에게 비슷한 말을 했던 것을 연이어 상기했다.
차정주는 차진명의 행실과 인격을 깎아내리고 욕보일 때마다 도해월의 이름을 언급했다. 평소와 같았다면 점차 쌓여 온 묵직한 분노를 느껴야 했으나 원하던 물건을 손에 넣은 차진명은 더는 타격을 입지 않았다.
차진명이 며칠 전에 도해월을 피습한 목적은 그에게 경고를 전하기 위함이었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일부러 요란한 때를 노려 도해월을 공격한 건 차정주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도 있었다. 물론 성물 사냥꾼을 다시 소집한 뒤 도해월에게 보낸 일은 계획의 시발점에 불과하다.
쿵!
잠시 뒤 벽면 너머로 무언가 넘어지는 듯한 소음이 울렸다. 차진명은 그 너머에 함께 있을 강준희의 최근 행보를 곱씹어 보았다.
한동안 독주를 마시는 이들을 지켜보면서 잔뜩 겁에 질려 있던 그는 요즘 들어 묘하게 의기양양한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과 차정주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도해월을 자극하는 동시에 그의 대체품으로 삼기 위해 데려온 강준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쓸모가 없었다. 나름대로 용을 쓰는 건 알고 있었으나 도해월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강준희가 죽은 걸 알면 도해월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그런 하릴없는 생각에 잠겨 있으려던 찰나…….
“크흑.”
직전까지 멀쩡하게 앉아 있던 차진명이 낮은 신음을 내며 통증을 호소했다. 그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머리 위에 달려 있던 조명이 드러난 뒷덜미를 환히 비췄다.
이내 옷깃이 반쯤 젖혀지면서 드러난 살갗 아래로 검푸른 핏줄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도드라졌다. 툭 불거진 핏줄이 울컥거리면서 두껍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동안 차진명은 전신을 관통한 끔찍한 고통에 허덕였다.
“콜록, 콜록.”
고통스럽게 기침하던 차진명이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넣어 뒤적이기 시작했다. 시야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나머지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조금 걷힌 소매 아래로 드러난 살갗은 오랜 고문과 같았던 실험이 남긴 흉터로 얼룩져 있었다.
똑똑―
그때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대답하지 않은 차진명은 간신히 숨을 고르면서 하얀 약통을 꺼낸 뒤 뚜껑을 열고 기울였다. 그의 손바닥 위로 쏟아지는 불투명한 캡슐들. 그 안에 담긴 검푸른 가루가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들어와.”
두어 개의 알약을 삼킨 뒤 여러 번의 심호흡 끝에 안정을 되찾은 차진명이 대꾸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면서 팔이 묶인 남성과 강준희가 안으로 들어섰다. 겁에 질린 눈으로 차진명을 바라보는 남성은 몇 달 전까지 다수의 보육원과 연계하여 한국마력연구소에 미취학 아동 실험체를 넘겨주었던 입양 브로커였다.
“저, 저, 저한테 대체 왜 이러시는 건지 이유는 도통 모르겠지만, 제가 정말 큰 잘못을 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용서를…….”
어느새 차진명의 맞은편에 앉은 남성이 온몸을 떨면서 사정하기 시작했다. 그 곁으로 다가온 강준희는 투명한 잔을 차진명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유? 글쎄, 그런 게 꼭 있어야 하는 건가?”
차진명은 고통에 몸부림치던 건 없었던 일처럼 멀끔한 행색으로 피식 웃었다. 안주머니를 뒤적이며 은색의 힙 플라스크를 꺼낸 그는 뚜껑을 열고 투명한 잔에 입구를 기울였다. 이윽고 화한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 * *
시야를 뒤덮었던 흰빛이 완전히 걷히고 눈앞에 나타난 건 드넓은 바다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이 푹푹 꺼지는 모래사장을 돌아다니던 나는 헛숨을 터뜨렸다.
“이건 또 뭐야…….”
인적 없는 바닷가를 가득 채운 건 부드러운 바람과 쉴 새 없이 밀려오는 파도 그리고 어두운 바다를 비추는 달빛뿐이었다. 맥없이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나는 하늘 높이 떠오른 커다란 달을 올려다보았다.
이상하게도 저 달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금세 시선을 거둔 나는 차갑고 단단하게 뭉친 모래를 가로지르며 파도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두 달 전에 평택에서 보았던 환상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바다인 듯했다. 밀려오는 파도와 마주 보고 서 있으니 그때 머릿속을 뒤덮었던 장면이 무의식 속에서 되풀이되는 듯했다.
그러다 내 주의를 사로잡은 건 그 환영 속의 내가 오래된 예언을 외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나는 무언가에 이끌린 듯 예언을 외우며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원하는 기억에 접근하려면 무슨 아이템을 사용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뒤이어 만화경 내부에서 보았던 시스템 안내 문구가 불쑥 떠올랐다. 아이템을 사용하여 이곳으로 넘어오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였다.
가만히 고민을 이어 나가던 나는 환영과 마찬가지로 예언을 외워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원하던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멸망의 전조가 대지를 무너뜨릴 때.”
조용히 중얼거리는 순간 물길을 머금은 바람이 팔과 다리를 옥죄기 시작했다.
“준비된 설계자가 마지막 수를 놓을지니.”
그 순간 바다 위로 쏟아지는 달빛이 더욱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궤멸한 세계의 기틀이 재정립될 것이다.”
달기둥이 길게 이어지는 모습은 마치 ‘설계’ 스킬을 사용했을 때 나타나는 긴 궤적을 떠올리게 했다.
[사용자가 지정한 ‘초월자의 편지’ 아이템이 개방되었습니다.]이윽고 눈앞에 푸른 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