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2
22화. 방학식
리호 길드에서 돌아온 뒤 한동안 정건후와의 대화를 계속해서 곱씹었다.
그의 당부대로 한국성물연구소에 성물을 등록하는 일은 장점과 단점이 뚜렷했다.
장점은 그 순간부터 성물 관련 법령에 의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점은 언젠가 그 법령에 발목을 잡힐 일이 반드시 생긴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나는 과거의 차진명이 이능청장의 지위를 통해 헌터와 관련된 여러 법안을 자신의 입맛대로 활용해 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차진명이 유스티티아의 검을 가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로 차진명에게는 내가 성물을 습득했다는 사실을 끝까지 숨겨야만 한다.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차진명은 나를 적수 삼아 성물을 빼앗으려 할 것이다.
순간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힘껏 움킨 나는 정건후의 또 다른 당부를 떠올렸다.
그는 내게 헌터 아카데미의 이사장 차정주를 경계하라고 했었다.
차진명도 아니고 차정주를 조심하라니. 처음에는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사정을 듣고 보니 굳이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이야기한 것이 이해되었다.
현장 실습에서 C등급 던전이 A등급으로 상승한 사태가 차정주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나를 정확히 집어서 주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차진명의 부친이자 헌터 아카데미의 이사장인 차정주 또한 슬하의 사람들을 장기 말처럼 굴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때는 차진명이 그의 방식을 답습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수집한 장기 말을 운용하는 방식이었다.
국회의원인 차정주는 자신의 권위를 크게 내세우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통솔했다.
반면 이능청장 차진명은 매 순간 우위를 점한 자신의 입지를 상기시키며 압박을 가했다.
같은 목적지로 나아가더라도 가는 방향이 다르면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는 법.
이토록 다른 부자가 서로 부딪히게 만들 수는 없나.
문득 떠오른 가능성을 곱씹으며 교복 넥타이를 가다듬었다.
한참 들여다보던 전신 거울에서 걸음을 틀어 창가를 내다보았다.
환한 여름빛에 익어 가는 아카데미 건물 전경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구름 한 점 없는 상공 너머로 우뚝 선 남산타워 또한 여전한 모습이었다.
어느새 7월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용산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날도 일 년이 채 남지 않았다.
다음 학기부터는 오래 비어 있던 저 침대에도 새 주인이 생기겠지.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 외출이 어려워질 테니 급한 일은 방학에 전부 해결해야 해.
벌써 사흘 뒤면 공희찬이 전달해 줬던 종이에 적힌 날짜였다. 적힌 대로 성문 길드에 가면 ‘지령’이란 걸 받을 수 있겠지. 그 뒤엔 보육원에 다녀올 예정이다. 그곳에 전생의 나와 함께 오랜 시간 동행한 문제혁이 있을 것이다.
나는 과거로 되돌아온 다음에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부대원들을 각별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묵묵히 곁을 지켰던 문제혁이 내 삶에 어떤 의미로 남아 있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설연호의 안위는 확보되었으니 이제 다른 부대원들을 찾아 나설 차례다.
* * *
“지금부터 2026년 1학기 하계 방학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나긋한 어조의 학생회장의 사회를 따라 식순이 차례로 진행되었다.
무대 중앙에 놓인 단상 좌측에는 내빈을 위한 좌석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평범한 방학식이었다면 그곳에는 외부 길드 마스터들이 자리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때껏 방학식에는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차정주가 앉아 있었다.
“나 이사장님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야.”
“나도. 차진명 선배랑 진짜 닮았다.”
“진명 선배는 학교에 언제쯤 돌아오려나.”
나는 얕게 속닥거리는 소리를 반쯤 흘려들으면서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식순의 첫 순서인 의례를 모두 마친 뒤 교장의 형식적인 연설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강당 내부를 빼곡하게 세운 행렬 사이사이를 들여다보고자 고개를 조금 젖혔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설연호를 비롯한 익숙한 얼굴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다들 잘 알고 계시다시피 이번 학기 현장 실습에서는 좋지 못한 사태가 발생했었지요. 그렇지만 우리 학생들이 큰 탈 없이 돌아와 주어서 어찌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해당 학생들의 뛰어난 실력과 기지 덕분에 실습이 잘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몇 마디의 덕담을 잇던 교장은 방학을 잘 보내라는 인사말을 끝으로 물러났다.
“다정한 말씀으로 독려해 주신 교장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다음으로 이번 학기 현장 실습 결과 보고 및 최우수 실습 조장 시상을 진행하겠습니다.”
그 말에 지루하게 가라앉아 있던 강당의 분위기가 단숨에 달라졌다.
학생회장이 현장 실습 결과 보고를 잇는 동안 곳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대 아래를 휩쓴 작은 소란에도 내빈석에 앉은 차정주는 미동이 없었다.
은은한 빛이 감도는 회색 머리카락을 포마드로 말끔하게 넘긴 채 채도가 짙은 차콜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유명 헌터답게 특유의 기세가 두드러졌다.
그의 곁으로 자리한 외부 길드의 마스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실습을 진행하기 직전 잠시 마주쳤던 리호 길드의 설연진 마스터는 일련의 사태에 굴하지 않는 듯 언제나처럼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외에도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길드의 마스터들 또한 저마다의 개성과 기세를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이따금 학생들의 모습을 둘러보는 이들도 존재했다.
저들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헌터 아카데미의 실습 결과 보고를 확인하고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들을 일찍이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어느 방면에서든 그저 무난하던 나와 달리 실습에서 괄목한 성과를 거둔 이들에게는 여러 길드 스카우터의 관심이 쏟아졌다.
스카우터가 존재하고 있음에도 이 자리에 마스터들이 직접 모습을 보인 건 일종의 존중이자 무언의 권유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나와 조원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조용히 성물만 가지고 나온 뒤 적당한 점수를 얻으려고 했던 나의 계획은 난데없이 나타난 스킬라로 인해 완전히 뒤틀려 버렸다.
달라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실습 이전에는 과거에 인연이 닿아 있었던 설연호만 나의 세력으로 만들고자 했다면 이번 계기로 재능을 발견한 다른 조원들 또한 포섭하고 싶어졌다.
같은 학년인 홍원하와 강준희는 나와 같은 해에 졸업할 테니 그렇다고 쳐도.
다음 학기를 끝으로 졸업할 김미솔이나 설연호는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그 두 사람은 졸업하자마자 외부 길드에서 활동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특히 설연호는 추후의 내가 데려오려고 한들 리호 측에서 놓아주려 하지 않을 터였다.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내가 걷는 것과 같은 방향으로 정진할 구성원을 데려와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고민이 길어지는 기분이었다.
“이상으로 2026학년도 1학기 하계 현장 실습 보고를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순서는 현장 실습 최우수 조장 시상이 있겠습니다.”
마구잡이로 이어지려던 상념을 뚝 자른 건 학생회장의 목소리였다.
수많은 갈래로 뻗어 나가던 계획은 잠시 접어 두고 눈앞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럼 지금부터 이번 실습에서 세 번째로 우수한 성과를 거둔 조의 조장부터 호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호명된 학생은 무대 위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시상은 교감 선생님께서 진행해 주시겠습니다.”
그 순간 여기저기서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서 있던 자세 그대로 어깨를 들먹이며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8조의 조장 7학년 정미진 학생은 무대 위로 올라와 주세요.”
그때 어딘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정미진이라 불린 여학생은 박수 치며 소리를 지르는 무리 사이를 가로질러 나아갔다.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누구였더라.
무대로 이어지는 간이 계단을 밟고 오르는 모습을 보니 알아챌 수 있었다.
묘하게 구부정한 어깨와 단정하게 내려 묶은 머리카락을 보니 확실해졌다.
정미진은 내가 총사령관으로 재직할 당시 이능청에서 근무하던 헌터였다.
그녀는 부대원으로 지목할 만큼 특별한 지점이 있지는 않았지만 던전 공략이 필요할 경우 우선순위에 배치되는 인원 중 하나였다.
그 고집스럽고 단단하던 정미진이 저렇게 수줍어하는 걸 보게 되다니.
내가 정말 과거로 돌아온 게 맞긴 하구나.
무대 위에 달린 강렬한 조명에 상기된 정미진의 뺨이 한층 더 붉게 보였다.
지금의 정미진은 제 나이답게 행동하는 것이겠으나 내게는 낯설게만 느껴졌다.
시상을 진행하는 교감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정미진은 종종거리며 무대를 내려갔다.
“이어서 이번 현장 실습에서 두 번째로 우수한 성과를 거둔 조의 조장을 호명하도록 하겠습니다. 7학년 강효서 학생은 무대 위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시상은 교장 선생님께서 진행해 주시도록 하겠습니다.”
이전과 달리 한층 또렷하고 굵직한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강효서는 자신의 주위에서 환호하던 이들에게 손을 내저어 보이고 무대에 올랐다.
김미솔이 전해 준 바에 의하면 저쪽도 만만치 않았다고 했었지.
만약 우리 조의 활약상이 두드러지지 않았다면 1등은 강효서의 몫일지도 몰랐다.
과거에 내가 가장 부러워했던 것이 바로 강효서였다.
강효서는 모든 방면에서 탁월했다.
B급이었지만 스킬 활용 능력이 다른 학생들보다 뛰어난 것이 강점이었다.
그뿐 아니라 강효서의 집안은 그를 제외한 일원들이 전부 비각성자라고 했다.
심지어 그들은 굴지의 건설 기업을 대대로 운영하고 있으니 부유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주제에 욕심은 또 많아서 실습마다 최우수 조장으로 선정됐었지.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강효서 학생은 강당에 자리해 주신 모든 분들과 마주 보고 서서 인사해 주세요.”
이어서 교장과 악수를 마친 강효서가 몸을 돌린 뒤 허리 숙여 인사했다.
“마지막으로 이번 학기 현장 실습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조의 조장을 호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우수 조장의 시상은 헌터 아카데미의 이사장님께서 특별히 도와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모두 박수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학생회장의 신호를 기점으로 열화와 같은 박수 세례가 이어졌다.
“2026학년도 1학기 하계 현장 실습 최우수 조장으로 선정된 6학년 도해월 학생은 무대 위로 올라와 주세요.”
내 이름이 호명된 직후 장내에는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것도 잠시 곳곳에서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젠장.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괴상망측한 문어 자식은 왜 하필 그때 나타나서.
나는 구태여 바라지도 않았던 관심을 굳이 나서서 충족시켜 주려는 학교를 원망하며 무대에 올랐다.
지나치게 환한 조명에서 쏟아진 빛을 따라 달궈진 무대를 가로지르고 있으려니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진짜 너무 부담스럽다. 이거 안 하면 안 되나?
나도 모르게 주먹을 움키면서 꼿꼿하게 나아갔다.
단상 앞에서 기다리던 차정주가 나를 마주 보았다.
이어서 학생회장이 시상 내용을 읊었다.
“도해월 학생의 활약상은 익히 들었습니다. 처음 겪는 상황이 아주 무서웠을 텐데 용기 있게 상황을 잘 헤쳐 나갔다고 하더군요.”
나를 내려다보는 건 차진명과 꼭 닮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선이 짙고 중후한 느낌의 차정주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앞으로도 학생이 보여 줄 눈부신 성과를 저도 유심히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차정주가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그렇지만 난 이런 관심을 원하지 않았다고.
이 양반이 대체 왜 이래. 벌써 노망이라도 난 거냐고!
나는 대답하는 대신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면서 차정주와 악수했다.
“영광스러운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도해월 학생은 강당에 자리해 주신 분들과 마주 보고 서서 인사해 주세요.”
차정주에게서 등을 보이고 선 나는 강당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향해 인사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눈동자가 이곳에 선 나만을 지켜보는 감각이 상당히 낯설었다.
부대의 총사령관이었을 적 언론 앞에 서는 것과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혼란스러운 심정에서 비롯되는 한숨을 남몰래 흩뜨리면서 좌중을 마주 보았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조명이 너무도 밝은 나머지 맞은편이 어둡고 흐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저들 중에 내가 찾고 있는 부대원들이 몇 명 더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발을 딛고 선 무대의 경계선이 새로운 출발점처럼 느껴졌다.
저 너머에서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 거듭해 벌어진다고 해도 상관없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그게 무엇이든 기껍게 마주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