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21
221화. 반격의 시간 (2)
감정이 격해진 듯한 설연호는 결국 고개를 돌린 채 숨을 골랐다. 침상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던 나는 그를 위해 시선을 틀고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그보다 몸은 좀 어때? 어제 담당 주치의랑 만났을 때 들어 보니까 몸은 다 회복됐고 이제 의식만 되찾으면 된다고 하기는 했는데.”
설연호가 옆에 놓인 간이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그는 얇은 이불 끝자락을 손에 쥔 채 고르게 다듬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병원에서 선배랑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
나는 고개를 양옆으로 꺾으면서 뭉친 근육을 자극해 보았다. 이내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환자복 차림을 내려다보며 공연히 팔뚝을 쓸어내렸다.
“그러게. 그래도 난 너처럼 죽을 고비까지 넘을 수준은 아니었어. 일주일 동안 잠들어 있지도 않았고. 알지?”
그렇게 말하던 설연호가 장난스레 눈을 흘겼다.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잠들어 있었던 일주일의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체감상으로는 만화경에 진입한 이후 다시 눈을 뜰 때까지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평소보다 긴 꿈을 꾸고 일어난 것 같은데, 막상 눈떠 보니 일주일이나 지났다고 해서 좀 머쓱해. 아, 바깥 상황이랑 사무실 얘기는 선생님 통해서 전해 들었어. 고생했어, 선배.”
손을 쥐었다 펼쳐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한 뒤 설연호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뭘. 그래도 지난 일주일 내내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컨디션이 좀 상하긴 했나 봐. 아까 선생님한테 전화 받기 전에 이상한 걸 봤어.”
“이상한 거?”
손으로 덜미를 감싼 채 주무르던 설연호가 대답했다. 그의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묻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긴장하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면 설연호 또한 지난 생의 기억을 되찾은 건가 싶은 생각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병원으로 오기 전에 회의실에서 정인이랑 예성이랑 얘기 중이었거든. 그러다 잠깐 혼자 남아 있을 때 갑자기 그늘이 드리우더니 바깥이 밤처럼 어두워지더라고. 하늘에 달도 떠 있고. 그리고 또 미개방 스킬이……. 아니, 그냥 잘못 본 거였어.”
거기까지 말하던 설연호는 순간 아차 싶은 듯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익숙한 단어가 들리는 순간 상체를 앞으로 반쯤 기울면서 되물었다.
“선배, 방금 미개방 스킬이라고 한 것 맞지. 언제부터 있던 거였어? 그게 뭘 어쨌는데?”
“어? 아니, 그냥 예전에. 정말 피곤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내 질문을 듣고 당황한 듯한 설연호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그런 그를 말없이 가만히 쳐다보니 한숨을 푹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알았어. 말하자면 긴데, 예전에 우리가 처음 같이 들어갔던 현장 실습에서 빠져나오고 난 뒤에 새로운 스킬이 두 개 생겼어.”
이어서 설연호는 자신이 얻은 두 개의 스킬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나는 그가 지금까지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는 치유 스킬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개방인 채로 남아 있던 스킬이라고 했다.
“습득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별다른 반응이 없어서 크게 신경 안 쓰고 있었거든. 근데 여기 오기 몇 시간 전에 스킬 해금을 위한 분기점에 다다랐다는 시스템 안내문이 떴어. 그 분기점이라는 게 뭘 의미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건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 말아 줘.”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한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진 채로 창가를 내다보았다. 작은 창문 너머로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기억을 되짚었다.
설연호가 그동안 계속해서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도 특정한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는 건 생각해 보지 못한 터였다.
“그것 말고 또 다른 일은 없었어?”
“일이야 많이 있었지. 사무실도 계속 정신없고.”
“그것 말고. 선배한테 말이야. 정말 다른 일은 없었어?”
집요하게 묻는 모습을 의아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설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잠시 뒤 말문을 열었다.
“나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어. 그건 그렇고 얘기할 게 하나 있었는데…….”
자연스레 말끝을 흐린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손가락으로 화면을 두드렸다. 이내 그가 내게 보여 준 건 현선민에게서 도착한 문자 메시지였다.
“아까 낮에 받은 연락이야.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것 보면 급한 일인 것 같아서 이따 밤에 조용히 다녀오려고.”
그의 말마따나 현선민의 성격상 이런 식으로 소식을 전했다는 건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라는 뜻일 터였다. 나는 어딘가 묘하게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가 깨어났다는 건 언제 알릴 거야? 우선 한도일 마스터랑 김수호 헌터한테는 바로 얘기하는 게 좋을 듯한데. 그리고 우리 누나한테도.”
이어진 설연호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래야지. 정건후 선생님이랑 그 세 사람이 내일 별장에서 만날 거라고 들었어. 상황 보면서 괜찮으면 나도 합류할 거야.”
드르륵―
그때 문이 다시 열리면서 정건후가 문간을 넘어섰다.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던 설연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오셨어요. 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병원 쪽에서도 비밀을 지켜 주겠다고 했어. 하지만 오고 가는 환자들 입에서 새어 나가는 건 막을 수 없다고 했으니 오늘 내로 정리하고 내일 오전에는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게 좋을 거다.”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던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연호는 고개를 끄덕인 뒤 나에게 눈인사를 전했다.
“그게 좋겠네요.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선생님 오셨으니까 난 슬슬 나가 볼게.”
“그래, 잘 다녀와.”
설연호가 모습을 감춘 뒤 침상 가까이 다가온 정건후가 창가를 돌아보았다. 바깥이 완전히 어두워지면서 유리창에 병실 내부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치고 있었다.
“아까 하시려던 말씀 마저 해 주세요. 작전 당일에는 계획대로 움직이신 거죠.”
따라서 고개를 돌린 나는 창문에 비친 그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한 날 출장을 이유로 잠시 자리를 비웠던 정건후는 사전에 협의했던 대로 나디아와 한국성물연구소 소속 김성민 연구원을 만났을 터였다.
“그래, 그 창에 관해서 잘 아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이야기가 수월하게 풀리더군.”
세 사람이 모여서 논의하기로 한 건 게니우스의 창을 차진명에게서 다시 가져온 뒤 어떻게 처리할지에 관한 것이었다.
창가에서 시선을 거둔 정건후는 그들과 나눴던 대화의 핵심을 정리해서 간단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건을 무사히 가져온다고 해도 누군가 그 창에 미리 손을 써 두었다면 그 물건은 자신에게 부여된 쓸모를 다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물건에 부여된 쓸모라면…….”
“그게 뭐가 됐든 좋은 그림은 아니겠지. 평범한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이상의 최악을 보게 될 수도 있다고 하더군.”
거기까지 듣던 나는 눈을 감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각각의 생마다 실행 방식이 조금씩 달랐을 뿐 매번 참혹하게 무너져 내리던 도시의 전경이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창이 지닌 쓸모란 바로 그런 것일 터였다.
“만약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면 그 물건을 갈취한 뒤에 곧바로 없애기로 했다.”
헛숨을 삼킨 뒤 느릿하게 눈을 뜨고 정건후를 돌아보았다. 성물을 없앤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이때까지 그런 경우는 못 봤던 듯한데…….
“위험하긴 하지만 확실한 방법이라고 하니 의심할 건 없어.”
그렇게 말하는 정건후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했으나 그 안에 담긴 강한 확신이 느껴졌다.
* * *
한편 파주에 자리한 재단 건물로 향한 설연호는 현선민과 마주 보고 앉았다. 도해월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한 뒤 그녀가 내어 준 차를 몇 모금 마시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현선민이 입을 열었다.
“큰 문제는 없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대체 누가 그런 짓을 벌인 건지 서둘러 밝혀져야 할 텐데.”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설연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착잡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현선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늘 부길드장님을 이곳까지 모신 건 몇 달 전부터 있었던 기이한 일에 관해 설명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문을 연 그녀는 제 입으로 말하기 망설여지는 듯 입을 달싹였다.
“지금까지 뉴스에 보도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몇 달 전부터 지금까지 한마연이나 이관부 내에서 음독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줄지어 나타나고 있다고 하더군요.”
거기까지 듣던 설연호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현선민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여기서 이상한 건 시신이 발견된 현장마다 화한 향기가 났다는 공통된 증언이 나왔다는 겁니다. 하지만 경찰에서는 전부 음독에 의한 자살로 처리했고, 내부에서도 관련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단속 중이라고 해요.”
화한 향기. 그 말을 듣는 순간 설연호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런 일이 한두 번 벌어진 게 아니다 보니 이제 두 기관에 재직 중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런 현상을 통칭하는 단어가 생겼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와중에 별칭까지 붙이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네요. 그래서 뭐라고 부르던가요?”
설연호는 머릿속에 떠오른 감상을 담담하게 내놓았다. 현선민도 그 말에 동의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사망자들의 사인이 전부 음독이었고, 그 사람들의 몸에서 다툼의 흔적이나 저항흔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그 현상을 체크메이트라고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정황만 보면 살해당한 게 분명한데, 대체 누가 벌인 짓인지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라고 해요.”
체크메이트. 그 단어를 입속으로 곱씹어 보는 순간 설연호의 머릿속에 맴돌던 장면이 한층 선명해졌다. 그가 떠올린 건 몇 달 전, 검찰 수사를 받던 도중 사망한 강효서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보육원과 결탁해서 한마연 쪽에 아이들을 넘겼던 브로커가 같은 방식으로 사망했다고 하더군요. 아마 최성일 원장도 이 소식을 들었을 겁니다.”
설연호는 그즈음에서 현선민이 자신이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쯤 최성일 원장은 자신이 다음 타깃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중이겠네요. 보육원에 숨겨져 있다던 자료나 아이들의 신변을 생각하면 서둘러 일을 진행하는 게 최선일 듯하고요.”
“네, 맞습니다. 그럼 이제 저희 쪽에서 어떤 계획을 준비했는지 설명해 드릴게요.”
그 말을 들은 현선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앞에 놓인 파일을 펼쳤다. 설연호는 그녀가 펼친 파일 속 자료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자정이 넘어설 무렵 재단 건물을 빠져나온 설연호는 여름밤의 눅눅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현선민과 나눴던 대화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 고개를 드니 하늘엔 커다란 보름달이 떠올라 있었다. 환한 빛을 내뿜는 달을 바라보던 설연호는 문득 병실에서 빠져나오기 전 도해월이 자신에게 당부했던 사안을 상기해 보았다.
‘혹시라도 뭔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바로 얘기해 줘. 뭐든 괜찮아.’
사실 도해월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정확히 이해한 건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간절해 보였던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게 다 무슨 의미였을까. 그렇게 말하는 해월이는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지.”
조용히 중얼거리던 설연호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게 갠 밤하늘에 떠오른 달이 유난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미개방 스킬 ‘망각의 샘물’이 해금되었습니다.] [초월자가 지정한 ‘거룩한 조력자’ 전용 스킬 ‘망각의 샘물’이 발동됩니다.]그는 평소와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달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뒤이어 눈앞에 푸른 활자가 떠오르더니 그 너머의 달빛이 점점 환해지면서 시야를 온통 하얗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