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22
222화. 반격의 시간 (3)
설연호의 의문에 반응한 ‘시간’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일깨우기 위한 풍경을 펼쳐 놓았다.
순식간에 낯선 숲으로 진입한 설연호는 줄지어 선 나무 사이로 언뜻 비친 호수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접하는 풍경을 낯설어하던 것도 잠시, 물가에 가까이 다다른 그는 자세를 낮춰 앉아 얼굴을 비춰 보았다.
손으로 물살을 저어 보고 있으니 살갗이 시원하게 식으면서 전신을 뒤덮은 근심과 괴로움이 말끔하게 치유되었다.
이곳의 호수가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순간 가장 선명하게 각인된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윽고 언젠가의 도해월이 그러했던 것처럼 물가에 손을 완전히 집어넣은 뒤 자신의 신성력을 흘려보냈다.
그때 손끝에서 번진 빛이 단숨에 호수를 뒤덮었다.
[초월자가 지정한 사명을 인지하였습니다.] [‘거룩한 조력자’에게 주어진 의 기억을 개방합니다.]물가에 몸을 낮춘 설연호에게 도해월과 함께 지나쳐 왔던 모든 생의 기억이 흘러들어 왔다.
기억의 끝에서 설연호는 자신에게 허락된 마지막 숨을 내쉬기 직전, ‘시간’이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을 깨달았다.
초월자가 그에게 부여한 역할은 ‘거룩한 조력자’였다. 그에게 주어진 신성력이 바로 그 방증이었다. 때때로 그 자신조차도 성가시게 여겼던 신성한 힘은 그를 못내 사랑한 신이 내린 가호였다.
* * *
환영에서 깨어난 설연호는 헛숨을 토하면서 휘청거렸다. 가을밤의 서늘한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오며 열이 오른 살갗을 식혀 주었다. 이내 심장 부근에 손을 얹으며 눈을 감았다.
그는 이윽고 손바닥 아래로 터질 것처럼 박동하는 심장을 따라서 직전에 보았던 환영 속 장면들을 순차적으로 곱씹어 보았다.
설연호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망각의 샘물’을 사용한 건 도해월의 조력자로서 본능적으로 그가 느꼈던 고통을 온전히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생을 수십 번도 넘게 반복하며 불거진 고통을 상쇄할 수 있는 건 망각뿐이었다.
설연호는 도해월의 조력자로서 그가 여러 생을 지나오면서 중첩된 고통에 짓눌려 스러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건 두 사람에게 특별한 역할을 부여한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건가 했는데…….”
느릿하게 눈을 뜬 설연호가 중얼거렸다. 그는 지난 서른 번의 생을 도해월의 곁에서 함께한 동시에 그가 겪은 고통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설연호는 주먹을 힘껏 움켜쥐면서 어둠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도해월에게 하고 싶었던 많은 이야기를 정리하려면 밤을 다 지새워도 시간이 모자랄 터였다.
* * *
다음 날, 에덴 길드 사무실.
평택 던전 브레이크 사태가 발생한 지 어느새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로부터 시작된 여파는 날마다 다양한 방향으로 파문을 넓히고 있었다. 그 물결에 휘말리게 된 건 해당 사태의 중심에 있던 도해 길드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껏 도해월의 행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번 사태를 기점으로 그가 근미래의 일을 내다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에덴 길드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들과 도해 길드의 수준을 견주는 일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여겼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지고 말았다.
그간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가장 먼저 미묘한 위기감을 감지한 건 단연 주해나였다. 그녀는 지난겨울 이브 호텔에서 간담회를 진행한 이후 도해월을 지켜봐 왔었다. 그리고 두 달 전에 마무리된 던전 배부 심사에서 그와 경쟁하며 헛물을 켜게 하려 했으나 그쪽에서 황선규 의원과 연을 맺으면서 그녀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태블릿을 들고 금일 진행하는 간부 회의에 사용할 자료를 훑어보던 주해나는 상념을 거두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태블릿을 내려놓은 뒤 곁에 있던 비서를 곁눈으로 힐긋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죠?”
이내 그녀는 두통이 느껴지는 듯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비서는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뒤 그녀에게 대답했다.
“이십 분 정도 남았습니다.”
주해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회의는 그녀가 부길드장으로 임명되어 진행하는 세 번째 회의였다. 그 사실을 상기하던 주해나는 첫 번째 회의를 진행하던 날 간부 중 전태무 이사장의 측근 몇 사람이 그녀의 의견에 족족 반기를 들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뭐, 특별한 의도를 담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사실 상황은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결정권은 마스터의 손안에 있기도 하고요.’
그중에서 십수 년 전 전태무와 함께 에덴 길드에 입사한 간부가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전태무는 자신이 이사장으로 부임한 뒤에도 마스터 자리를 사이에 둔 경쟁 구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지 잊을 만하면 그녀의 속을 긁어 놓았다.
그들의 무례는 이후에도 몇 차례씩 이어졌다. 게다가 전태무는 주해나가 도해 길드와 관련한 사안에 평소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뒤 도해월을 너무 의식하는 것이 아니냐면서 그녀를 자극했다. 주해나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비서에게 되물었다.
“그날 현장에 있었던 세 길드에 관한 건 어떻게 됐죠?”
하지만 이번 사태로 그녀의 견제가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에덴의 마스터가 특히 예민하게 반응한 건 던전 브레이크 현장에 도해 길드뿐만 아니라 다른 세 길드 소속 헌터들도 함께 파견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주해나는 그런 그의 심정을 알아채고 비서를 통해 자세한 내막을 조사해 두라고 지시했었다.
“상황을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조만간 네 개의 길드가 연합 세력을 결성했다는 공식 발표가 나올 거라고 짐작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는 걸 보면 영 허튼소리는 아닌 듯합니다.”
비서는 주해나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던전 브레이크 사태 당일 도해 길드를 따라서 현장에 소속 길드를 파견시킨 세 길드는 에덴과 지역구가 겹치지는 않지만 꾸준히 지켜보면서 견제하는 것이 마땅한 대규모 길드였다. 만약 세 길드와 도해 길드가 연합 세력을 결성한다면 헌터 사회에 완전히 새로운 판도가 열릴 것이었다.
비서가 내놓은 대답은 예상했던 대로 그녀가 원하는 수준의 대답은 아니었으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발표가 있을 거라는 예측은 무성하지만, 네 길드가 연합을 결성한 목적은 아직도 불투명한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더불어 차정주 후보 쪽에서도 해당 사안과 관련해서 신경을 곤두세우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주해나는 이어지는 비서의 말을 들으면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는 몇 년 전, 도해월이 학생이었을 적 차정주가 그를 포섭하려 했다는 사실을 최근에 전해 들어 인지한 상태였다.
또한 전태무가 헌터 아카데미 이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차정주가 에덴의 뒷배를 봐주기로 약속한 만큼 부길드장이 된 주해나는 입맛이 까다로운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그럼 전 잠시 아래층에 다녀오겠습니다.”
주해나의 모습을 살피며 눈치를 보던 비서가 말을 이었다. 그녀는 회의가 시작하기 십여 분 정도 남았을 즈음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요.”
간결한 대답을 들은 비서는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넓은 회의실에 혼자 남은 주해나는 소용돌이처럼 몰아치는 여러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가늠하던 것을 멈췄다. 이윽고 오래전에 차진명과 했던 약속을 떠올려 보았다.
그 두 사람이 처음 접촉한 건 지난겨울, 이브 호텔에서 용산구 내 길드 간담회를 진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주해나에게 만남을 요청한 차진명은 그날 행사장에 심어 놓은 자신의 측근을 통해 그녀와 도해월이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관계라는 사실을 눈치챘다고 말했다.
차진명과의 만남에서 그가 주해나에게 건넸던 제안은 명확했다. 이전부터 에덴 길드에서 탐탁지 않게 여기던 도해 길드가 더는 멋대로 날뛰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일에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날 차진명 헌터는 도해 길드의 이름만 언급했지만, 실상은 그게 전부가 아닌 것처럼 보였어. 차진명 헌터가 진정 노리는 건…….’
상념에 잠긴 채 손가락을 테이블을 두드리던 주해나가 떠올린 건 도해월의 이름이었다. 차진명이 했던 제안은 대외적으로는 이능단속‧관리본부의 이능청 승격에 제동을 걸 수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세력을 미리 정리하자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주해나는 그 기저에 깔린 깊은 심연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렇지만 현재의 자신은 도해월과 어떤 관련도 없기에 입 밖에 꺼내 놓지 않았다. 도해월에게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관해서도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해나는 차진명과 함께 도해 길드를 향한 수많은 시민의 신임을 흔들어 놓을 만한 자극적인 사건을 하나 구상했다. 해당 계획은 오늘 진행하는 간부 회의에서 다뤄야 하는 중요한 사안이기도 했다.
“아, 그 피습당했던 도해 길드 마스터가 깨어났다고 하던데.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물론이죠. 이관부 쪽에서 고발하겠다는 소식을 듣고도 태연한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건지…….”
그때 회의실의 문이 열리면서 주해나의 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뒤에서 목소리를 내던 두 명의 간부가 주해나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면서 대화를 멈췄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주해나는 익숙한 이름이 들린 순간 표정을 굳혔으나 이내 본래의 기색을 되찾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내의 환한 조명 아래서 그녀의 태연한 미소가 한층 선명하게 떠올랐다.
* * *
병실에 남아 있던 정건후와 앞으로의 계획을 간략하게 정리한 나는 의식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길드 사무실에 가장 먼저 알렸다. 고예성을 통해 안팎의 상황을 간단하게 보고받은 뒤에는 퇴원 수속을 진행한 뒤 가평에 있는 별장으로 향했다.
“드디어 일어났군요, 도해월 마스터. 그동안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저희 쪽 마스터님께서도 도해월 마스터가 대체 언제쯤 깨어날 수 있는 건지 몇 번이고 물어보셨어요.”
별장에 들어선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건 김수호였다. 나에게 손을 내밀면서 다가온 나는 가벼운 포옹을 하며 등을 다독여 주었다. 곁에 있던 설연호와 한도일 또한 반가운 얼굴로 나를 반겼다. 정건후에게 전해 들었던 대로 이들 모두 나를 무척 걱정했다는 것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을 담아 건넨 간결한 대답을 들은 네 사람이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나는 그들을 안쪽 자리로 안내한 뒤 각각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지나온 서른 번의 생에서 나는 이들을 전부 마주쳤었다. 그러나 바로 직전 생에서 만났던 김수호와 마찬가지로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까지의 나는 길드를 만들어 내 세력을 키우는 대신 언제나 이능청으로 돌아가 내부를 파멸시키려 했을 뿐이었다.
아군으로 만나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네.
학생일 때부터 나를 지켜봐 왔던 이들과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니 새삼스러운 감상이 들었다. 가볍게 숨을 고른 나는 이들과 연합 세력을 결정하게 된 목적을 재차 상기해 보았다.
이곳에 있는 네 사람 모두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원한이 시작되는 지점은 전부 차정주였다. 그리고 나 역시 차진명이 차정주가 주도한 실험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지나온 과거의 일을 보게 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성물을 사용해 세상을 멸망시킨 건 차진명이었지만,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리도록 밀어붙인 건 사실상 차정주였다. 그런고로 나 역시 이제는 이곳에 모인 이들과 마찬가지로 차정주를 새로운 과녁 삼아 화살을 겨눌 생각이었다.
“오늘 다뤄야 하는 사인이 많으니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나는 화살촉을 날카롭게 가다듬는 심정으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흩어져 있던 각자의 시선들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