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23
223화. 반격의 시간 (4)
대화의 서두는 지난 일주일 동안 각자의 위치에서 벌어졌던 일을 나누는 것으로 이어졌다. 의식을 되찾은 뒤 곁에 있던 정건후를 통해 그간의 상황을 대략 듣기는 했지만, 각 길드 내부에서 겪었던 상황은 조금 다른 터였다.
공통적인 건 세 길드 모두 작전 당일 현장에서 철수한 뒤 지금까지 연락하지 않고 지냈다는 것이었다. 사태가 수습된 뒤 현장에 파견되었던 네 길드의 연합 결성과 관련한 이야기가 불거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길드 내부에서 소식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살피는 데 열중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흐르더군요. 그건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을 듯한데. 어떠셨나요?”
이윽고 설연리가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 말을 듣던 김수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저희도 비슷했습니다. 지금처럼 길드 내부에 출처를 알 수 없는 눈과 귀가 들러붙기 좋은 시기에는 침묵을 유지하는 게 마땅하죠. 도해월 마스터도 무사히 깨어났으니 이전 만남에서 기약했던 대로 연합의 활동 방향을 구체적으로 계획해 보는 게 좋겠네요.”
나는 그 두 사람을 차례로 바라보면서 고개만 느릿하게 끄덕였다. 김수호가 꺼내 놓은 언사를 기점으로 별장 내부의 분위기가 한층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저마다 생각에 잠긴 채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이때까지 나눈 대화를 종합하며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이번 생에서 내가 추구하는 방향은 지나온 삶에서 겪었던 것과 전혀 달랐다.
하지만 지난 생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시기마다 발생하는 사건과 전체적인 흐름은 달라지지 않았기에 참고할 만한 부분이 다수 존재했다.
머지않아 앞으로 진행할 계획의 밑그림을 머릿속에 전부 그려 넣은 나는 자세를 바르게 가다듬었다. 이내 둘러앉은 세 사람과 차례로 시선을 마주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때까지의 상황은 충분히 전해 들었으니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차정주 후보가 이관부를 청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물밑에서 작업 중이었다는 건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차정주의 이름을 언급한 순간 네 사람 사이로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찻잔을 들고 있던 설연리는 반사적으로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차 후보의 아들인 차진명 헌터가 본부 내에서 빠른 주기로 승진을 거듭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부 반발이 적지 않은 와중에도 결정을 강행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자연스레 말문을 연 설연리가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이어서 한도일이 미간을 슬며시 좁히며 말했다.
“그 얘기는 저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 말고도 최근에 내부 인원이 조정된 걸 보면 청으로 승격하기 전에 내부 인력을 전체적으로 물갈이할 생각인 듯한데……. 그렇게 서두르는 걸 보면 계획에 차질이 생겼거나, 아니면 계획을 수정한 게 아닌가 싶네요.”
맞은편에서 듣고 있던 김수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금 입을 열었다.
“더불어 차정주 후보는 이전부터 이관부를 본부에서 청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발판이 되어 줄 만한 사건을 찾고 있었을 겁니다. 정확히는 사람들의 인식을 서서히 뒤바꾸는 동시에 국회의원으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공고히 할 만한 사건을 물색하고 있었겠죠.”
말문을 맺으면서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문 채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설연리가 대답했다.
“음, 도해월 마스터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감이 잡히네요. 간단히 말하자면 일주일 전에 평택에서 발생한 사태가 방금 언급한 발판이 될 수도 있거나 어쩌면 이관부에선 이미 그렇게 가정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맞나요?”
담담한 어조로 이어지는 설명을 듣던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경청하며 시선을 옮기던 한도일도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가정이 사실이라면……. 이관부 쪽에서 도해 길드를 상대로 고발장을 접수한 걸로 모자라 온갖 언론사까지 동원하면서 여론을 뒤집어 놓는 일에 왜 이렇게 혈안이 되어 있는지 설명이 되는 것 같네요.”
한도일이 언급한 대로 이능단속․관리본부 측에서는 내가 깨어났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곧바로 우리 길드를 공무집행방해죄로 고발한 상태였다. 오늘 오전에는 신촌 게이트 사고 이후 모함 목적의 칼럼을 작성했던 이원석 헌터가 검찰청 건물 앞에 서서 ‘고발장’이라고 적힌 서류 봉투를 들고 기자들과 대면하는 모습이 담긴 뉴스가 연이어 리포트되었다.
“네, 정확합니다. 이번 고발을 계기로 제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지게 되었으니 앞으로 그 사안과 관련하여 공포심을 조장하는 듯한 뉴스가 쏟아질 겁니다. 지금도 오죽하면 이관부에서 고발까지 하겠냐는 여론이 불거지고 있으니 머지않은 일이겠죠.”
어느새 팔짱을 끼운 채 조소를 터뜨리던 설연리가 그 말을 듣고 덧붙였다.
“지금까지는 도해월 마스터의 능력을 활용해서 게이트 사고나 던전 브레이크 같은 불가피한 사고를 수습했지만, 언제 그 속내가 바뀔지 모른다면서 밑도 끝도 없이 몰아붙이겠네요. 안 봐도 훤해요.”
그 말을 듣던 김수호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도해 길드를 정리하고 나면 또 다른 명분을 거들먹거리면서 다른 길드를 공격하려 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정주 후보는 오래전부터 본인이 탐탁지 않게 여기거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사람은 예외 없이 처리해 버렸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김수호의 목소리에 얕은 분노가 서려 있는 것이 느껴졌다. 차정주가 현재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처리해 왔는지에 관한 건 한참 전에 만났던 정수희를 통해 한차례 전해 들은 상태였기에 그의 심정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관부에 소속된 대다수의 헌터가 자신이 국가 소속 헌터라는 사실에 굉장한 자부심을 품고 있기도 하고, 그러한 풍조가 일종의 귀족 의식으로까지 이어져 있으니 외부 길드를 타깃으로 정한다면 줄곧 말씀해 주신 대로 상황이 흘러간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죠.”
한번 물꼬를 틔우고 나니 대화가 수월하게 흘러갔다. 세 사람 모두 내가 예상했던 바를 정확하게 짚어 내고 있었다. 대규모 길드를 운영하는 동안 이능단속․관리본부와 다양한 이유로 대치하며 쌓아 올린 내공이 빛을 발하는 듯했다.
“일련의 사태에 반격하기 위해서 저희 쪽에서 오랫동안 준비해 둔 패가 있습니다. 저희가 가지고 있던 패를 세간에 보이고 나면 여론이 완전히 뒤집히면서 차정주 후보의 행보에 제약이 걸릴 겁니다.”
나는 그즈음에서 자연스럽게 화두를 돌렸다. 이곳에 모인 세 사람과 길드 연합 세력을 결성하는 것은 이미 잠정적으로 결정된 사안이었으나 아직 자세한 사안은 조율하지 않은 터였다. 조율 단계로 넘어가기 전, 이들에게 연합 세력 결성을 요청하는 목적에 관해 먼저 환기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세 분께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모두의 관심을 집중시킨 다음에는 재킷 안주머니에 있던 흰 약통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손바닥에 불투명한 알약을 두 개 털어놓자 그쪽으로 시선이 모였다.
“이 알약의 이름은 레드문입니다. 복용하고 나면 시야가 붉게 물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죠. 하지만 보시다시피 내용물은 검푸른색입니다. 말은 약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건 몬스터를 사냥한 뒤 얻은 마석으로 만든 불법 가공물에 불과합니다.”
설명을 이어 나가면서 손에 쥐고 있던 알약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대로 상체를 숙인 김수호가 알약을 쥐고 불빛에 비춰 보았다.
“마석을 가공해서 알약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살다 보니 별걸 다 보는군요. 그래서 이 망측한 건 대체 누가 만든 겁니까?”
알약을 천천히 기울이면서 쏟아지는 가루를 보던 김수호가 금세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이 알약은 한국마력연구소에서 제조된 겁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숨을 한차례 고른 뒤 그간 있었던 일을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불법 마석 가공물의 배후를 쫓게 되기 시작한 계기부터 그 과정에서 만난 현선민에 관한 것까지 간단하게 언급했다.
이어서 그곳에서 진행했던 인체 실험에 관한 사실까지 차근차근 짚고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차진명 또한 그 실험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런 다음에는 긴 침묵이 이어졌다.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한도일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설연리와 김수호는 한숨을 쉬거나 이마를 짚으면서 허공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한마디로 이 모든 일의 시작점엔 차정주 후보가 있다는 거네요. 마침 이 자리에 모인 세 분 모두 차정주 후보에게 앙갚음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건 설연리였다. 그녀는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말문을 맺으면서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맞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길드 연합을 결성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 건 저희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차정주 후보와 깊이 얽혀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관자놀이에 손을 얹은 채 눈을 감고 있던 한도일이 천천히 눈을 떴다.
“모두가 하나의 과녁을 겨누고 있다니. 이것 참 공교롭네요. 도해월 마스터의 말도 그렇고, 다들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차정주 후보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도해월 마스터가 준비한 패를 시작으로 각자 준비했던 패를 꺼내 놓으면 승산이 있겠죠.”
그렇게 말하는 한도일의 눈동자는 여느 때보다 선명한 빛을 품고 있었다. 팔짱을 끼운 채 고개를 끄덕이던 김수호가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사실 설연리 헌터와 한도일 마스터가 이곳에 모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긴 했습니다. 이렇고 터놓고 얘기하니 속이 시원하네요. 그럼 그 패를 언제 꺼내 놓을 건지 구체적인 시기를 정해 둔 게 있나요? 도해월 마스터의 다음 순서로 꺼내 놓을 패는 저희 사양 쪽에서 준비할까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가 언급한 패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일전에 온실에서 만났던 정수희는 자신이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계획이 있다고 말했었다. 그녀는 후일에 그 계획을 무사히 실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해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우선 상황을 조금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실험 관련 정황을 폭로할 생각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저와 함께 조사를 진행했던 현선민 헌터를 통해서 전해 듣는 게 어떨까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지잉―
지잉―
세 사람의 대답을 듣기 전, 재킷 안에 있던 휴대 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헀다. 나는 그들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 뒤 휴대 전화를 꺼내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혹시 아직도 얘기 중이야? 급하게 전할 게 있어서] [최성일 원장이 보육원 애들 몇 명을 데리고 사라졌대] [그리고 그 일에 에덴 길드가 엮여 있는 것 같아] [자세한 건 확인 중이야 파하는 대로 연락 줘]이 인간은 매번 비슷한 타이밍에 일을 터뜨리네.
설연호가 남겨 놓은 메시지를 하나씩 읽어 보고 있으니 헛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이내 고개를 저으면서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