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24
224화. 반격의 시간 (5)
별장에서 대화를 마무리하고 나왔을 즈음에는 어느새 밤이 깊어져 있었다. 곧바로 사무실로 복귀하여 시간을 확인해 보니 자정을 넘어선 지 한참이었다.
“다녀왔어. 정인 선배도 같이 있었네.”
이 시간까지 회의실에 남아 고생하는 설연호에게 눈인사를 건넨 뒤 고정인을 돌아보았다. 이내 재킷을 벗어 등받이에 걸쳐 놓고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안녕. 안 그래도 지금 최성일 원장 차량이 찍힌 CCTV 영상 찾아보고 있었어. 아직 좀 남았으니까 먼저 얘기하고 있어.”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만 흔들던 고정인이 말했다. 곁에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설연호가 고개를 들고 나에게 물었다.
“현선민 헌터도 지금쯤이면 별장에 도착했겠네. 다른 분들도 다 괜찮다고 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별장에서 만났던 세 사람의 얼굴을 상기해 보았다. 그들에게 설연호를 통해서 전해 들은 상황을 전달하고 난 뒤 혹시 오늘 바로 현선민을 만나 볼 수 있냐고 먼저 물어본 건 설연리였다.
“설연리 헌터는 실험에 관한 정황을 설명했을 때부터 현선민 헌터한테 관심을 보이더라. 애초에 연합 세력에 도움을 구하고 싶다고 먼저 얘기했던 것도 현선민 헌터여서 그런지 그쪽에서도 흔쾌히 좋다고 했고.”
그 말을 듣던 설연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현선민을 만난 설연호는 내가 지시했던 대로 그녀에게 연합 세력을 결성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전했다. 그녀는 그 소식을 듣고 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지 물어봤다고 한다.
“그때 얘기해 보니까 현선민 헌터가 이끄는 게 길드가 아니라 재단이라서 그런지 이런저런 제약도 많고, 유동 자금도 서서히 줄고 있다고 들었어. 근래에 상태가 위독해지는 사람이 계속 생기면서 여러모로 걱정이 많아 보였고.”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미간을 슬며시 좁히던 설연호가 말했다. 나는 자연스레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무슨 짓을 해도 차도가 없는 환자들을 계속 살피는 게 쉽지 않았을 거야. 나중에 보육원에 있던 아이들까지 다 데려와서 수용하려면 그만큼 품이 필요할 테고.”
얕은 한숨과 함께 말문을 맺은 나는 앞서 만났던 설연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현선민이 세운 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을 듣던 그녀는 선뜻 현선민이 이끄는 재단을 돕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잠시 뒤 고정인이 고개를 들고 나와 설연호를 바라보았다.
“방금 영상 다 확보했어. 같이 보자. 시간 순서대로 쭉 볼 수 있게 합쳐 뒀어.”
그렇게 말하면서 노트북의 방향을 틀어 놓은 고정인은 기지개를 한차례 켰다. 이내 마우스에 손을 얹은 뒤 영상을 재생시켰다.
“최성일 원장이 보육원 건물을 빠져나간 게 저녁 여섯 시 사십 분이었어. 여기, 캐리어 들고 나가는 사람 보이지.”
마우스 커서로 최성일로 추정되는 남성의 모습을 가리키던 고정인이 말했다. 이어서 영상의 내용을 살펴보니 혼자서 차량에 탑승했던 최성일은 출발하지 않고 삼 분 동안 멈춰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차량에서 내린 그는 보육원 건물로 향한 뒤 네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억지로 끌고 온 듯한 아이들을 차량에 강제로 태운 그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보육원 건물을 빠져나갔다.
“선배, 잠시만 멈춰 봐.”
노트북 화면을 집중해서 들여다보던 나는 잠시 손을 들어 저지했다. 정지된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사무실로 복귀하는 동안 설연호에게 전해 들었던 설명을 곱씹어 보았다.
지금 보육원은 최성일을 비롯하여 다수의 상주 인원이 전원 부재한 상태라고 했다. 조금 더 알아보니 생활지도원과 간호사 그리고 조리사 모두 몇 주 전부터 하나둘씩 모습을 감춘 것으로 확인되었다.
“처음에는 원장이 아이들 식사에 수면제를 타서 전부 재워 놓은 상태였다며. 잠도 못 깬 애들을 억지로 끌고 나온 걸 보면 혼자서 도망가려고 했다가 갑자기 계획을 바꾼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건지 파악됐어?”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묻고 있으니 고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영상을 다시 재생시킨 뒤 손으로 화면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원장이 차에 타고 나서 일 분 정도 지난 뒤에 차체가 크게 흔들리는 게 보이지. 그리고 이 분이 지나서 다시 나왔을 때는 걸음걸이가 미묘하게 달라졌어.”
그대로 화면을 확대해서 확인해 보니 그녀의 말대로 최성일의 걸음걸이가 이전보다 달라진 모습이 눈에 띄었다.
“좀 다르긴 하네. 자세히 안 봤으면 이 차이를 쉽게 느끼지 못했을 것 같기도 하고. 스킬을 사용한 건가?”
“일단 나랑 연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차에서 내려서 보육원 건물로 들어가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움직임도 상당히 자연스러워. 그런데 막상 주위에는 스킬을 사용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없더라고. 그래서 주위를 조금 더 살펴봤는데.”
고정인은 다시금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그녀는 말끝을 흐리면서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어서 떠오른 캡처 화면을 보니 보육원에서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 세워진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수상해 보이지? 이 차는 원장이 타고 나간 차가 사라지고 나서 삼십 분 정도 뒤에 아예 다른 방향으로 가 버렸어. 혹시 몰라서 차량 번호를 조회해 보니까 에덴 길드 소유더라고. 원장한테 스킬을 시전해서 행동을 조종한 것도 주해나 부길드장인 것 같아.”
화면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고정인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최성일의 걸음걸이가 미묘하게 달라진 시점부터 예상하던 부분이었다.
“그런 것 같네. 저렇게 먼 거리에서 대상을 능숙하게 조종할 수 있는 실력자는 한국을 통틀어서 손에 꼽을 만큼 적으니까.”
에덴의 소유인 것으로 추정되는 차량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내 그 안에 앉아 있을 주해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아무리 에덴이라고 해도 비각성자인 미취학 아동들을 살해하거나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진 못할 거야. 그래도 그쪽에서 최성일을 데리고 뭔 짓을 벌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데려오는 게 좋겠지. 일단 영상부터 마저 보자.”
금세 고개를 저으면서 상념을 지운 나는 고정인에게 가볍게 고갯짓했다. 고정인이 재생한 영상을 마저 보고 있으니 도시의 외곽으로 향한 차량이 국도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예성이 통해서 알아보니까 차정주 후보가 에덴 길드의 뒷배가 된 지 좀 됐다고 하더라. 또 얼마 전부터 주해나 부길드장이랑 차진명이 접촉하는 모습이 몇 번 목격된 적도 있대. 최근에 원장이랑 접촉하던 브로커가 사망했다고 하는 걸 보면 차진명이 꾸민 짓이 아닐까 싶어.”
영상을 집중해서 보고 있을 즈음 맞은편에 있던 설연호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의 짐작대로 이번 일은 차진명과 주해나가 합심하여 벌인 짓일 터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간결하게 대꾸한 나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에 잠겼다. 오늘 자로 고발장이 접수되었다고 하니 검찰청에 소환되어 수사에 응하기까지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이 남은 셈이었다. 그 시간 동안 언론은 우리 길드의 이미지를 추락시키기 위해 사활을 걸고 각자의 전략을 이행할 터였다.
고정인이 재생한 영상이 끝나갈 무렵 나는 무의식적으로 조소를 지었다. 던전 브레이크 사태 이후 상황이 얽혀 있는 모양새만 보면 빠져나갈 틈 없이 빽빽한 덫에 걸린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수십 년이 넘는 시간을 체화한 나에겐 헛웃음이 나올 만큼 조잡한 계략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나는 서른 번의 생이 반복되는 동안 수많은 사람을 계속해서 지켜보며 수천 가지가 넘는 상황을 겪어 왔다. 그러다 보니 나와 얽혀 있는 사람들이 각각 다른 상황을 겪을 때마다 어떻게 반응할지 훤히 내다보였다. 일종의 표본이 있는 셈이다.
그래, 공들여 놓은 덫에 걸려서 자빠지는 게 누가 되는지 보자고.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최성일이 탑승한 차량이 향하는 길목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 또한 익숙한 전경인 걸 보니 지금쯤 그가 어디에 있을지 감이 잡혔다. 곁에서 설연호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으나 굳이 돌아보지 않고 머릿속으로 다음 계획을 빠르게 구상해 나갔다.
* * *
같은 시각, 험준한 산길을 한참 동안 헤집고 나서야 도착할 수 있는 폐공장 단지 위로 깊은 어둠이 내렸다. 이따금 날카로운 바람 소리만 울리는 내부에는 온몸이 묶인 채 의자에 앉은 최성일과 정면에 서서 그를 바라보는 주해나가 있었다.
“켁, 켁, 크흡,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니! 분명 너희 길드 사람이 정해진 시간에 움직이기만 하면 돈은 알아서……. 아악!”
말문을 채 맺지 못한 최성일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면서 온몸을 뒤틀었다. 그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낡은 의자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운 소음을 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주해나가 고개를 반쯤 기울였다. 이내 피식 웃으면서 팔짱을 끼웠다.
“주둥이만 살아서 나불대는 건 여전하네요, 원장 선생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녀가 태연하게 말을 잇는 동안에도 최성일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돈만 주면 지시 사항을 충실히 해낼 만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위험한 행각을 벌이는 건 순전히 주해나의 욕심이었다.
“꺽, 커헉, 네가,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네가 시키는 대로 이 일은 전부 다 도해월이 꾸민 거고, 큽, 켁!”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간신히 가누던 최성일이 핏덩이를 쏟아 냈다. 한참 전부터 침으로 범벅이 된 입가가 점점 지저분해지는 것을 보던 주해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잉―
흉측한 몰골에서 시선을 거둔 그녀는 주머니에서 진동하던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해 보았다. 차진명이 사전에 일러 주었던 대로 언론에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도해 길드와 마스터인 도해월을 매도하고 있었다.
‘최성일 원장이 제 쓸모를 다할 즈음이면 도해월은 검찰에 송치되겠지. 그렇게 되면 도해월은…….’
거기까지 생각한 주해나는 차진명이 자신에게 설명했던 계획을 떠올렸다. 그의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면 도해월은 수사 도중에 목숨을 잃게 될 터였다. 그 자신조차 예견하지 못했을 미래의 모습을 그리려니 기분이 묘해졌다. 그리고 그때.
“내가, 크흑, 내가 인나 너를 얼마나 아꼈는데! 어떻게, 큽,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직접 이름까지 지어 줬건만 그것까지 다 버리고서는, 켈록, 켈록.”
최성일이 발악하듯 소리치다 숨이 멎을 것처럼 기침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주해나는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님, 제 이름은 이제 주인나가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입가에 맺힌 웃음이 가시기도 전에 주해나의 눈동자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주먹을 힘껏 말아 쥔 그녀는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스킬을 시전했다. 머릿속에서는 십수 년 전, 그녀가 보육원을 떠나왔던 날의 기억이 되풀이되었다.
과거의 주해나가 도망을 결심했던 건 자신의 입양 일정이 결정된 날 밤이었다. 최성일은 어렸던 주해나와 같이 어린 각성자를 잔뜩 들인 뒤 하급 몬스터가 다수 출몰하는 F급 던전에 밀어 넣고 마석을 대량으로 수집하게 하는 불법 업자의 집으로 보내려 했었다.
그때 그 집에 가게 되었다면 주해나는 몇 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의 고기 방패로 살다가 숨을 거두었을 터였다. 섬뜩한 미래를 감지한 주해나는 오로지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보육원을 빠져나왔다.
휘익―
그때 종잇장처럼 얇은 창문이 흔들리면서 날카로운 바람이 지나갔다. 어느새 축 늘어진 최성일의 모습에서 시선을 거둔 주해나는 창문을 내다보았다.
지금처럼 깊어져 있던 과거의 어느 새벽, 보육원을 떠나가던 그녀가 그곳에서 가져온 건 단 하나뿐이었다.
그건 함께하고 싶었지만 끝내 결렬되었던 누군가의 이름 한 글자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애를 기억하고 싶었고, 또한 기억되고 싶었다.
“당사자는 영영 모를 것 같지만, 그래도.”
홀로 중얼거리던 주해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귓가에 붙이면서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