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26
226화. 반격의 시간 (7)
긴 이야기를 정리하며 가장 먼저 언급한 건 나와 설연호가 가지고 있는 무수한 기억의 시작점이었다. 이 부분은 예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생의 마지막 날이 되어 설연호가 스킬 ‘망각의 샘물’을 사용하면 지나온 모든 기억이 휘발되며 헌터 아카데미에 재학했던 시절로 회귀했다. 그렇게 똑같은 생이 반복되다가 세상의 멸망이 다가오면 설연호가 또다시 스킬을 사용했다고 한다.
“뭔가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네.”
무어라 말을 떼지 못하고 있으니 설연호가 덧붙였다. 나는 입매를 올려 엷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지나온 삶을 정리하고 보니 안 좋은 쪽으로 상황이 뒤바뀐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인 주해나와 나의 관계는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간결하게 대꾸한 나는 기억 속의 남은 주해나의 모습을 상기했다. 그녀는 어느 생에서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이 그렇게 악착같이 사는 건 삶이 모래 언덕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매 순간 빠르게 달려가지 않으면 갑자기 발이 푹 빠지면서 그대로 고꾸라질 것 같았어. 다 무너지기 전에 정상으로 가야만 죽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건 지금도 비슷해.’
문득 주해나가 스물아홉 번째 생에서 내게 들려주었던 말이 귓가에 되풀이되었다. 그러다 보니 집무실 서랍 속에 보관된 사진들이 떠오르면서 주해나의 사진과 함께 보관된 다른 사진 속 강준희의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전과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한 또 다른 한 사람은 바로 강준희였다.
“준희를 이번 생에서 처음 만날 게 아니라 몇 번 더 만난 상태에서 다시 마주쳤다면 상황이 좀 달라졌을까?”
한참 침묵하던 나는 시선을 틀고 설연호에게 물었다. 그는 나를 따라서 강준희의 이름을 떠올렸는 듯 허공을 응시했다.
“그게 가능했다면 회귀한 지 열 번째쯤 됐을 때 차진명이 세상을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설득했을 거야.”
짧은 고민 끝에 설연호가 내놓은 답은 간결했다. 한마디로 선택은 본인의 몫이라는 뜻이었다. 그 당연한 사실이 유난히 쓸쓸하게 다가왔다. 그즈음에서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나는 펜을 쥔 채 차진명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나저나 그 선배는 왜 그런 끔찍한 짓을 벌인 걸까. 같은 삶이 서른 번이나 반복되는 동안 단 한 번도 다른 선택을 한 적이 없다는 건 그만큼 강력한 동기가 있다는 건데. 도대체 그 이유가 뭐지?”
이윽고 그의 이름을 내려다보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되짚어 보았다. 기억에 따르면 차정주는 첫 번째 생에서부터 차진명을 실험체로 삼은 듯했다. 또한 그는 차진명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 무척 노여워했다.
차정주가 슬하에 자식이 한 명밖에 없는 것도 차진명 때문이었다. 차정주는 그와 같은 아이가 또다시 태어날 것을 염려하며 다른 자녀를 두는 대신 어린 각성자를 제 입맛에 맞게 양성할 수 있는 헌터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태블릿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니 설연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예전에 차진명이 너한테 했던 말 중에 뭔가 짚이는 건 없어? 바로 직전 생이나 그 생의 전생에서는 최측근으로 지냈으니 그 안에 힌트가 있을 수도 있잖아.”
차진명의 최측근으로 지냈던 시절이라면 전생인 서른 번째 생과 스물아홉 번째 생을 가리키는 것일 터였다. 설연호의 조언대로 당시의 기억을 차근차근 돌이켜보던 나는 슬며시 미간을 좁히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한 번 그 선배가 나한테 이상한 말을 했던 적이 있었어.”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찬찬히 기억을 복기했다.
* * *
스물아홉 번째 생의 어느 날.
반듯한 제복을 차려입은 나는 조금 흐트러진 행색으로 차진명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창문을 등지고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는 그의 얼굴에 미묘한 화색이 감돌았다. 그런 그의 뒤로 펼쳐진 밤하늘의 전경마저 한없이 청명하기만 했다.
“말씀하신 대로 뒤처리까지 직접 끝냈습니다.”
차진명과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선 나는 고개를 숙이면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무채색의 바닥재 위로 정건후의 숨이 멎어 가던 순간이 그려졌다. 동시에 마지막으로 그가 지었던 표정이 다시금 선명해졌다.
불과 두 시간 전, 정건후에게 독주를 권한 건 차진명이었다. 그가 독주를 준비한 이유는 간단했다. 정건후가 차진명이 소유하고 있는 성물인 게니우스의 창을 빼앗으려 이능청을 습격했기 때문이었다.
평소와 같았다면 차진명은 정건후와 마지막으로 대치하는 자리에 혼자 다녀왔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나에게 동행을 권했고, 나는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독주를 눈앞에 둔 정건후의 눈동자는 차갑게 식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 눈이 마지막으로 담은 것은 차진명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내 모습이었다.
역시 전부 알고 있었던 거야.
정건후에게 독주를 내민 것은 차진명이었으나 그를 사지로 몰아넣은 건 나였다.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천리안’ 스킬을 사용하여 취우 길드와 마스터인 한도일의 약점을 파악한 뒤 정건후의 뒤를 밟으면서 그를 압박해 왔다.
정건후의 마지막 모습을 애써 지운 나는 고개를 들고 차진명을 바라보았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 취우 길드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쪽에 심은 심복을 통해 알아보니 조만간 청을 습격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저희도 어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기색을 가장하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느릿하게 고개를 든 차진명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이상하군. 오늘따라 사령관이 평소 같지 않은 듯한데.”
그 말을 들은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반쯤 숙이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내 손아귀가 뜨겁게 달아오르더니 식은땀이 흘렀다.
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난 차진명이 내 곁으로 한 걸음씩 다가왔다. 툭 떨군 시야에 보기 좋은 광택이 감도는 구둣발의 모습이 들어왔다.
“사령관은 세상이 끝나는 고통이 뭔지 생각해 본 적 있나?”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엷은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그가 거리를 좁힐수록 화한 향기가 점점 짙어져 갔다. 나는 이제 이 향기를 맡을 때면 차진명의 앞에서 죽어 가던 사람들 혹은 내가 내민 독주를 마시고 죽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 역시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난 그걸 수도 없이 겪어 왔어. 셈하는 게 무용할 정도였지.”
생각을 다 끝맺기도 전에 차진명의 음성이 귓가에 날카롭게 꽂혔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보니 그는 이때껏 본 적 없는 낯선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 보려 했으나.
“당장 주해나 마스터한테 연락해. 대책은 그쪽에 있으니.”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평소의 기색을 되찾은 그가 짤막하게 내뱉는 탓에 그대로 무용해졌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금세 돌아선 차진명은 어서 나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 * *
“해월아, 너 괜찮은 거지?”
길어지려던 상념을 깨뜨린 건 설연호의 목소리였다.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다음 머릿속으로 ‘세상이 끝나는 고통’이라는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러다보니 언젠가 현선민을 통해 보았던 사망한 비각성자의 일기장에 적힌 문장이 떠올랐다.
그래, 뭔가 익숙하다 했어.
언젠가 그것과 비슷한 말을 과거의 차진명이 했다는 것을 알고 보니 이전부터 느꼈던 기시감이 한층 선명해졌다.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은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올랐으나 그대로 묻어 두었다. 예측대로라면 머지않아 차진명과 독대할 순간이 다가올 것이었다. 그때 가서 직접 물어도 늦지 않을 터였다.
“괜찮아. 그리고 방금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같아.”
그대로 얼버무린 다음에는 현재의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계산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올린 건 황선규의 이름이었다.
“우선 여론이 더 악화되기 전에 황선규 의원을 만나야겠어. 날이 밝으면 그쪽에 연락해서 일정부터 잡아 줘.”
그 말을 들은 설연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작정하고 날뛰는 언론을 잠재우고 이후의 계획을 순차적으로 진행하려면 황선규의 도움이 필요할 터였다.
“그런 다음에는 NBS 오한빈 기자한테 연락해서 조만간 제보할 게 있으니 내부에서 취재 팀을 따로 꾸려 달라고 전해 줘. 그쪽에서 알겠다고 하면 현선민 헌터가 이때까지 모은 자료를 전부 그쪽에 넘길 생각이야.”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던 설연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면서 되물었다.
“음, 오늘 보니까 NBS 쪽에도 누가 압력을 넣은 건지 일주일 전이랑 상황이 좀 달라져 있더라. 그쪽에서도 슬슬 태도를 바꾸려는 것 같았어.”
“누군가 압력을 넣었다면 그건 차정주 후보겠지. 김수호 헌터가 말하는 걸 들어 보니 예전에 강효서 선배가 관리하던 대량의 마석 관련 리포트를 진행하지 못하게 막은 것도 차정주 후보라고 하더라고.”
곧바로 대답을 전한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인 뒤 말을 이어 나갔다.
“NBS 사장은 감이 무척 좋은 사람이야. 우리 길드의 뒤를 봐주는 게 황선규 의원이라는 건 이미 그 방송국 사람들이 전부 다 알고 있을 거고, 거기에 오한빈 기자가 저번처럼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오면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판단이 서겠지.”
효신 그룹 주가 조작 사건 리포트를 기점으로 방송국 내의 처지가 완전히 뒤바뀐 오한빈은 지금쯤 NBS 내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자 중 한 명이 되어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그는 이때까지 취득한 자료를 믿고 맡길 수 있을 만한 유일한 언론인이었다.
“아, 참고로 이건 현선민 헌터랑도 미리 합의한 부분이니까 오한빈 기자랑 연락되면 바로 재단 쪽에도 소식 전해 주고.”
“알았어. 방금 얘기한 대로 진행할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설연호는 휴대전화 액정을 재차 들여다보았다. 그런 그를 잠시 지켜보던 나는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을 고민해 보았다. 가볍게 숨을 고르는 사이 사라진 최성일과 네 명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원장이 데려간 아이들은…….”
지잉―
그때 테이블에 놓여 있던 휴대전화가 길게 진동했다. 말끝을 흐리며 확인해 보니 화면에 김미솔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어, 선배. 어떻게 됐어?”
―네 말대로 원장실 안에 뭔가 이상한 게 숨겨져 있더라. 그 안에서 금고를 하나 찾아서 열어 보니까 무슨 서류 같은 게 잔뜩 있더라고. 정확한 이름은 대조해 봐야 알겠지만, 그동안 연구소로 넘어간 아이들이랑 관련된 것들인 것 같았어.
김미솔의 설명을 듣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입매를 달싹거렸다. 이로써 앞으로의 계획에 필요한 도화선이 모두 마련되었다. 이제 불씨를 붙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