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3
23화. 지령 (1)
공희찬에게 새로운 연락이 온 건 방학식이 끝난 날 저녁이었다.
꼭 직접 전해야 하는 소식이라며 고집을 피우는 통에 설렁거리며 거리로 나섰다.
먹구름이 낮게 내린 하늘과 습한 대기는 여름 장마를 예고하고 있었다.
살갗에 달라붙는 서늘한 기운이 썩 달갑지 않은 탓에 눈살을 찌푸리며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헌터 아카데미에서 십오 분 정도 걸어가면 다다를 수 있는 공원이었다.
오래전부터 관리가 되지 않은 탓에 기다란 잔디가 무성한 전경이 금세 눈에 들어왔다.
학교에 사람이 다 빠진 건 좋은데 여기까지 나와야 하는 건 좀 번거롭네.
무조건 빨리 나오라며 재촉하던 공희찬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 근처에 멎어선 채로 심호흡을 하니 차가운 공기가 가득 들어찼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들고 눈을 감으니 피로가 씻기는 듯했다.
현장 실습이 비로소 끝났다.
무사히 첫 단추를 채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기치 못한 사소한 사건들의 연속이었으나 수완이 나쁘지 않았다.
특히 차정주는 자칫 잘못하면 위험해질 수 있으나 그만큼 매력적인 패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공희찬이 나를 다급하게 부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차정주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차진명도 한발 앞서 움직이려는 거겠지.
인기척 없이 잠잠한 가로등 부근을 배회하고 있으니 정건후의 전언이 떠올랐다.
성물 등록을 진행한다면 방학식이 적기라고 했지만 그대로 행하지 않을 생각이다.
2014년 이후 12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성물 사냥꾼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희미하게 남은 그들은 정녕 사라진 것일까?
그럴 리가 없지. 성물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그들도 활동을 재개하지 않는 것일 테다.
그러므로 내가 성물을 소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도 안위를 지킬 수 있을 때까지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
“야, 내가 좀 늦었다. 근데 원래 이런 건 간절한 사람이 기다려야 하는 거니까. 괜찮지?”
오자마자 혼자 묻고 답하던 공희찬이 벅차게 차오른 숨을 다급하게 뱉어 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손부채질을 하던 공희찬을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기다리게 할 거였으면 전화로 얘기하든가. 무슨 일인데.”
내 말을 들은 공희찬이 나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제는 저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하게 읽혔다.
“원래 이런 일은 직접 전하는 게 원칙이란 말이야. 나라고 방학식 끝나자마자 너한테 쫓아오고 싶었겠냐? 하여튼 싸가지.”
공희찬이 원칙을 성실하게 지킬 때도 있다니. 의외네.
“아, 존나 숨 차. 아무튼, 너 내일 시간 괜찮지?”
“왜. 지령 날짜가 내일로 바뀌었대?”
“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 너 뭐 들은 거 있어? 나한테는 아무 말 없었는데. 뭐지?”
그런 게 있을 리가. 아니고서야 너랑 나랑 이 저녁에 따로 만날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지.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키면서 고개를 저었다.
“얘기할 것 있으면 빨리해. 들어가서 쉬고 싶으니까.”
“야, 너 내가 주는 정보가 그렇게 간절하지 않나 보다? 얘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계속 싸가지 없이 구네.”
공희찬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 정보가 선배한테서 시작된 건 아니잖아. 선배도 기껏해야 나한테 전달하는 역할밖에 안 되면서 왜 그렇게 과민 반응이야.”
“씨발. 근데 이 자식이 진짜!”
분을 이기지 못한 공희찬이 주먹을 힘껏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한참 전부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태연하게 어깨를 들먹였다.
“일부러 지령 날짜를 당긴 걸 보면 그쪽에서도 내가 마음에 든다는 의미 같은데. 괜히 분풀이한답시고 주먹질해 봤자 선배한테 좋을 건 없지 않나?”
한마디로 지금까지 일개 끄나풀에 불과했던 공희찬과 나는 다르다는 의미였다.
차진명이 진정 공희찬을 아꼈다면 그에게 이런 심부름 따위를 시킬 리 없었다.
그 사실은 공희찬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기에 녀석을 좀 더 떠보려 한다.
“네 새끼가 좆같이 굴 때마다 매번 참아 줬더니 이제 내가 만만한가 보다?”
“난 그런 적 없어. 말이 그렇다는 건데 왜 그렇게 화를 내? 나야말로 당황스럽게.”
사람의 약점은 대개 다른 사람을 말로 공격하는 모습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타인에게 악의를 가지고 쏟아 내는 말에는 자신의 열등감이 은연중에 비치고는 한다.
“야, 우리 아빠 국회의원이야. 부모도 가족도 없는 게이트 고아 주제에 나대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아?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건데. 실습도 끝나서 너한테 밑질 것도 없어, 난.”
내가 공희찬을 어떻게 쳐다봤지?
모르긴 몰라도 네가 보는 그게 내 속마음이란다.
공희찬의 열등감은 자신의 부친이 무려 국회의원인데도 차진명과 그 주변 인물들에게 은근하게 무시당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듯했다.
속내가 다 비치도록 투명하게 굴고 그 가벼운 입은 날마다 쉬지 않고 나불대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쉽게 욱하지 않고 입만 잘 다물고 있으면 꽤 괜찮게 활용할 법한데.
하긴, 차진명은 못난 놈을 고쳐 쓰는 것보다 처음부터 제 말을 잘 들을 사람을 선호했다.
“뭐가 됐든 선배의 화를 돋우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 날도 점점 찝찝해지고 있으니까 조금만 진정하고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 줘.”
그 소리에 공희찬이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을 문질렀다.
“아무튼, 이제 실습도 끝났으니까 한 번만 더 까불면 넌 내 손에 뒈지는 거야.”
“그래, 알았어. 그래서 그쪽에서는 뭐라고 하는데? 왜 갑자기 날짜를 당긴 거야?”
순순히 대꾸하니 공희찬의 노여움이 금세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혼자서 타오르고 혼자서 가라앉히고 난리가 났네.
불 속성인 애들은 원래 다 이러는 건가. 아니면 공희찬만 이러는 건가.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근데 네 말대로 그쪽에서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기는 해. 어제 만난 관리자가 계속 너에 관한 걸 물어봤거든.”
“예를 들면?”
“뭐, 네가 언제 입학했는지, 공개된 스킬은 어떤 건지 하는 것들.”
“내가 게이트 고아라는 것도 선배가 알려 줬겠네?”
내가 게이트 고아라는 건 비밀은 아니었지만 자랑스럽게 알릴 만한 것도 아니었다.
말하지 않았던 걸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겠지만 ‘관리자’를 통해 차진명에게 전한 건 공희찬이 분명할 거였다.
“그거야, 뭐. 물어보니까 대답해 줘야지. 모른다고 쌩까고 무시할 순 없잖아?”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그저 멋쩍게 웃는 공희찬을 보며 남몰래 혀를 찼다.
“내일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되는데?”
“장소는 이전에 알려 줬던 거랑 같아. 시간은 오전 열한 시. 조금이라도 늦으면 기회는 박탈된다는 말까지 전하랬어.”
기회를 박탈한다니. 나는 그게 괜히 겁주는 말인 걸 안다.
다급한 속내는 어지간히 들키기 싫은가 보네.
차정주가 움직인 이상 차진명은 어떻게든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나은 수를 내놓아야 한다.
당장 그의 곁에 데려다 놓지 않더라도 가까이서 지켜볼 구실을 마련해야 할 터였다.
“그 지령이라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정말 안 알려 줄 거야?”
“물어봐도 난 대답 못 해. 하루만 참으면 알게 될 걸 왜 자꾸 사람을 들들 볶는지 모르겠다니까.”
“그야 선배는 이미 경험이 있으니까. 알다시피 난 내세울 만한 밑천이 없어서 아무것도 몰라. 무지할수록 불안해지는 게 사람 마음이잖아.”
물론 전부 거짓말이다. 아무것도 모르기는커녕 너무 잘 아는데 장단이나 맞춰 주는 거다.
내가 겪었던 과거는 미래의 기억으로 치환되어 예지력이라는 훌륭한 밑천이 되었다.
혹시 몰라 던져 본 떡밥이 입맛에 맞았는지 공희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러더니 평소처럼 으스대며 사람 약 올리는 태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때 내가 던전에 있는 게 아니었다면 네가 뭐라고 해도 개의치 않았을 거야. 이미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이 커뮤니티는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런 것 같더라. 그럼 누가 들어갈 수 있는데? 가입 조건이 따로 있어?”
“구체적인 건 딱히 없어. 근데 딱 보면 느낌 오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공희찬은 대뜸 주머니에 양손을 밀어 넣으면서 어깨를 곧게 폈다.
뭐지? 어쩌라는 거야?
“어, 알 것 같네.”
던전 공략을 진행하는 동안 잘 알지 못하면서 일단 알 것 같다고 대답부터 하던 강준희의 마음이 이해되는 것 같기도 했다.
“알겠어. 내일 정해진 시간까지 알려 준 장소로 갈게. 잘 가.”
“야, 그게 끝이야? 뭐 더 물어볼 것 없어? 아니, 생각해 보라니까?”
“물어봐도 대답 못 해 준다며. 근데 뭘 더 물어봐야 하는데?”
정곡을 찔린 건지 공희찬은 아니, 그러니까, 하는 말을 반복했다.
알려 주지도 않을 거면서 간절하게 매달리는 꼴이 보고 싶은 것 같았다.
고작 스무 살밖에 안 된 녀석의 놀부 심보를 감당해 주기에는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았다.
“관리자라는 사람한테 내 이야기를 전해 준 건 고맙게 생각해. 할 말 끝났으면 이제 가도 되지? 선배도 잘 가고 방학 즐겁게 보내.”
* * *
다음 날 오전 열한 시.
용산구 성문 길드 사무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직원의 안내를 받은 나는 손님용 응접실에 앉아 대기하는 중이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여전히 7월 말에 머물러 있는 달력을 보았다.
처음 공희찬이 건네준 쪽지에는 8월 11일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부를 수 있었는데 굳이 8월로 정한 건 일부러 뜸을 들이려 그랬던 건가.
나는 흰색 계열로 말끔하게 꾸려진 내부를 둘러보았다.
과거에도 성문 길드와 별다른 접촉을 했던 적이 없었으므로 이곳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
이윽고 성문 길드에도 출중한 인재는 있었으나 부대원으로 데려올 만한 사람은 없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나저나 무슨 지령이길래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만드는 거야.
인내심이 슬슬 닳기 시작할 즈음 문간으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중요 사항만 간단하게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간단한 소개도 없이 운을 뗀 남자는 빠른 속도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오늘 수행하실 지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희 성문 길드에서 관리 중인 던전 중 하나에 입장하셔서 공략을 진행하게 되실 예정입니다. 최종 보스를 처치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니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양복 차림의 남자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달성 조건은 간단합니다. D급 몬스터를 처치해 주시면 됩니다. 최소 5마리 이상 처치해 주신다고 생각해 주시면 되고, 그 이상으로 처치하는 것도 가능하니 편의대로 진행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몬스터를 처치하라고?
D급 몬스터를 최소 5마리 처치하고 습득할 수 있는 마석의 가격을 환산해 보았다.
이거 순 양아치 새끼들이네.
나도 모르게 다물린 입술 너머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차진명의 커뮤니티에 접근하려고 한 건 단순히 그 내부를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가진 정보가 없어도 내가 가진 미래의 기억만으로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음, 진지하게 생각해 보니 조건을 달성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아쉽지만 지령 수행은 포기하겠습니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던 남자에게 손을 내젓고 일어섰다.
남자는 응접실을 나서려던 나를 다급하게 붙들었다.
“한 마리! 딱 한 마리여도 좋습니다. 그러니 지령을 수행하시고…….”
“네? 아까는 분명 최소 5마리는 처치해야 한다면서요.”
“우선 던전에 다녀오신 다음에 다시 결정하셔도 됩니다! 가셔서 천천히 결정하셔도 되니까 섣불리 결정하지 마셨으면 해서…….”
어느새 간절해진 목소리로 애원하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차진명의 입김이 미쳤다는 걸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제가 들어가게 될 던전의 이름을 알려 주시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어딘가로 급하게 연락을 취했다.
잠시 뒤 휴대 전화를 집어넣은 남자가 나에게 말했다.
“입장하게 되실 던전은 E등급의 던전으로 이름은 멸절의 설산입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잠시 멈칫했다. 내게는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건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전 국민이 알게 될 이름이기도 했다.
2027년에 발생한 용산 던전 브레이크의 시발점이 바로 ‘멸절의 설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