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30
230화. 논외의 존재 (1)
검찰 조사가 시작된 지 어느새 반나절이 지났다. 사방이 가로막힌 밀실 같은 공간은 스킬 사용을 제한하기 위한 특수한 조치가 이뤄진 상태였다. 그로 인해 내부의 분위기가 더욱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번 조사는 검찰 측에서 기정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죄목을 나에게 덧씌우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눈앞에 앉은 검사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어 내기 위한 유도 심문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해당 사항 없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긴 시간 동안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대꾸했다. 결국 맞은편에서 한숨을 먼저 내쉬었다.
“그럼 잠시 쉬었다가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검사가 말했다. 이어서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 눈앞에 놓여 있던 조서를 한데 모아 정리한 뒤 조사실을 벗어났다.
홀로 남은 나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피로한 눈을 감는 순간 황선규와 나눴던 대화가 기억 속에서 되풀이되었다. 그는 차정주에 이어 차진명의 이름을 언급했었다. 그런 다음 이능단속‧관리본부 내에서 현재 차진명의 직위를 언급한 뒤 차정주가 훗날 그를 이능청장으로 앉히려는 속셈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수많은 이들이 현장 경험도 부족하고 나이도 어린 차진명 헌터를 청장 자리에 앉힐 수 있겠냐면서 의구심을 품고 있지만, 차 후보 쪽에서 결단을 내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상 이견은 없을 겁니다. 차 후보는 본인이 원하는 바를 반드시 이루는 사람이니까요.’
원하는 바를 반드시 이루는 사람. 지난 생의 기억을 전부 되찾은 채로 그 말을 듣고 보니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째서 제 아들인 차진명이 벌인 짓은 막지 못했던 건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차진명 헌터가 제 아비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마침 두 사람의 연배가 비슷하기도 하고.’
이어서 황선규가 건넨 말은 차진명과 나의 관계를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돌려서 전하는 것이었다. 그의 속내를 이해한 나는 누설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차진명과의 관계를 언급했다. 차진명의 수상한 행적을 뒤쫓는 과정에서 차정주의 비리를 알게 되었다고 하니 황선규 또한 순순히 이해하는 눈치였다.
차진명은 언제쯤 나타나려나.
문간 너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즈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생각을 전환했다. 시간이 제법 흘렀으니 일전의 내가 취재진의 질문에 했던 대답이 차정주 본인은 물론이고 차진명에게도 전달되었을 터였다.
시간이 지나도 문가는 기척 없이 잠잠하기만 했다. 밀실에 홀로 남은 채 차진명의 모습을 떠올리던 나는 문득 설연호와 함께 고민하던 대목을 다시 꺼내 보았다.
지난 서른 번의 생이 이어지는 동안 설연호는 매번 스킬 ‘망각의 샘물’을 사용하여 나와 그의 기억을 지웠다. 이후에는 모든 기억을 망각한 채로 삶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설연호의 말에 따르면 바로 직전의 생에서도 ‘망각의 샘물’ 스킬을 통해 모든 기억을 지웠다고 한다.
‘기억을 지우기로 한 건 나뿐만 아니라 초월자의 의지도 반영된 선택이었어. 그 선택을 했던 순간의 나는 같은 생이 또다시 반복되리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상태였고.’
뒤이어 설연호가 했던 설명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의 설명을 듣는 순간 ‘시간’에 관한 또 다른 질문이 파생되었다. 그렇다면 서른한 번째 생에서는 어째서 직전 생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회귀한 걸까.
또한 이때까지와 달리 서른한 번째 생의 시작점이 탄생의 순간이 아닌 헌터 아카데미에서의 첫 현장 실습 직전으로 선정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이것도 초월자의 의지가 반영된 선택인가.
그렇게 묻고 있으니 문득 오래된 예언에 관한 의문도 전부 풀리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동안 습득한 정보에 따르면 그 예언은 초월자의 전언을 사람이 옮겨 적으면서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계속해서 구전되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했다.
초월자의 편지에 오래된 예언에 관한 언급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덜컥―
그즈음에서 계속해서 곁가지로 뻗어 나가던 상념을 끝맺으려는 찰나, 고요하던 문가에서 소음이 일었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
고저 없이 담담하게 내뱉으며 들어선 건 차진명이었다.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그가 안쪽으로 들어서는 순간 반쯤 열려 있던 문이 완전히 닫혔다.
“놀라는 척도 않는 걸 보니 이 정도는 진작 예상했나 보군.”
교복 차림이 아닌 모습을 보는 건 이번 생에서 처음이었다. 학생일 적에 보았던 특유의 앳된 기색도 완전히 사라진 채였다. 역설적이게도 나에게는 지금 마주하는 차진명의 모습이 더욱 익숙하게 느껴졌다.
“아니면 여기 들어오기 전에 미래를 보기라도 한 건가?”
그렇게 말하는 차진명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조소를 지으면서 되묻던 차진명은 걸음을 옮겨 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전에 만남이 예견되어 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나는 쉽사리 입을 여는 대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명 밑에서도 여전히 검게 빛을 내는 차진명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지나온 무수한 기억 속 그의 모습이 차례로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해당 사항 없다고 말할 생각인 거면, 그렇게 해.”
그렇게 말하는 차진명에게서 나른한 숨이 배어 나왔다. 그 모습 또한 나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지금의 차진명은 알지 못하는 그 자신의 지난 역사가 나의 머릿속에 있었다.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할 순 없지. 오래전부터 징그럽게 얽혀 있었으니까.”
반사적으로 대꾸하는 순간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나는 이번 생에서 아주 오랜만에 보는 차진명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전생까지만 해도 감히 마주하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들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군. 뜻도 모를 혼잣말이나 듣자고 시간을 할애한 건 아니거든.”
그때 날이 선 목소리가 허공을 관통했다. 나는 그제야 차진명과 시선을 마주쳤다.
“최 원장을 거둬 갔다는 소식은 들었어. 그 작자를 헤집어 보니 웬만한 건 다 알아챈 듯하더군.”
이어서 말하던 차진명이 입매를 비틀면서 조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젠 뭘 하든 소용없을 거야. 심심찮게 걸어오던 머리싸움도 다 끝이니까.”
눈앞에 앉은 차진명은 모든 일에서 초연해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전과 확실히 다른 느낌인 걸 보니 바깥에서 무언가 손을 쓴 상태인 듯했다. 지나온 기억을 되짚어 보니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금세 감이 잡혔다. 자세한 건 여기서 나간 뒤에 설연호랑 얘기해 보는 게 좋을 듯했다.
잠시 뒤 부산스레 맴돌던 생각은 접어 두고 얕은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와서 엄포를 놓는 걸 보니 대단한 걸 준비했나 보네. 기껏 행차한 김에 뭐 하나만 묻자.”
이전과 달리 말끝이 짧아진 걸 인지한 차진명이 눈썹을 치켜떴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평택 던전 브레이크. 네가 꾸민 짓이지? 용산도 마찬가지고.”
나는 테이블 위로 한쪽 팔꿈치를 얹으면서 물었다. 자연스레 상체가 기울어지면서 손등 위로 환한 조명이 쏟아졌다.
“설마 그걸 지금 알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차진명은 비웃음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이어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내 손등이었다.
“그 반지, 테티스의 눈동자군.”
잠시 뒤 차진명이 한마디 덧붙이면서 근처에 있던 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건 차진명이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들고 있던 것이었다.
이윽고 안쪽에 들어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한 유리잔 표면에 조사실 내부의 조명이 투과되면서 고유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 위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미개방 스킬 해금을 위한 특정 분기점에 도달하였습니다.]그래, 아직 해금되지 않은 스킬이 하나 더 남아 있었지. 일명 ‘선택된 예언자.’
그보다 먼저 해금된 미개방 스킬은 ‘준비된 설계자’ 스킬이었다. 성물 사냥꾼의 습격을 받은 뒤 무의식 속에서 해금했던 그 스킬의 기능은 지나온 전생의 기억을 되찾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선택된 예언자’ 스킬에는 어떤 기능이 있는 걸까.
의문을 품던 것도 잠시, 눈앞에서 푸른 활자가 흩어지면서 테이블에 놓인 잔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잔은 나에게 무척 익숙한 물건이었다. 차진명은 곧 자신이 늘 소지하고 있는 힙 플라스크를 꺼내 독주를 따를 터였다.
“결국 날 여기서 죽이겠다는 건가? 사인은 원인 불명의 심장마비?”
아직 잔을 채우기도 전이었으나 그 안에 담길 독주의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사인을 언급하는 순간 피식거리며 웃던 차진명이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생각이 좀 바뀌었어. 좀 더 재미있는 그림을 그려 보려고.”
그런 다음 그는 유리잔의 기다란 손잡이를 쥐고 허공에 들어 올렸다. 이윽고 보울 부분을 돋보기 삼아 내가 검지에 착용하고 있던 반지를 비췄다. 가운데 박힌 보석이 내뿜는 빛이 잔 내부를 푸른빛으로 물들였다.
“강준희가 왜 네 비밀을 나한테 알렸는지 궁금하지 않아? 아니, 그 전에 왜 널 배신하고 나한테 온 건지, 내가 그 애한테 무슨 말을 해서 꼬여 냈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나는 테이블에 놓았던 손을 거두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강준희의 이름이 언급된 순간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았다.
“넌 영영 모르게 될 거야. 오늘은 강준희가 널 대신하게 됐거든.”
그때 문간 너머로 낯선 발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짓씹던 나는 차진명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심장이 점차 빠르게 박동하더니 어느새 손가락에서도 맥박이 뛰는 게 느껴졌다.
“참고로 널 대신하는 건 강준희뿐만이 아니야. 그게 누구인지는……. 여기서 바로 알려 주면 재미없겠지?”
말끝을 흐리며 피식거리던 차진명은 투명한 잔을 함에 다시 집어넣었다. 차진명이 잔을 비운 채로 돌아간다는 건 그의 말마따나 강준희가 날 대신해서 독주를 마시게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덜컥―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차진명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생전 마주한 적 없는 낯선 표정을 마주한 나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 표정 안에 담긴 건 단순히 자신의 뒤를 멋대로 밟아 온 누군가를 처리하기 위한 사무적인 태도에 비롯된 감정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농밀한 것이 얽혀 있었다.
대체 왜?
나를 대신해서 누군가를 희생시킨다는 말이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렸다. 뒤이어 맹렬한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 생의 나는 차진명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았기에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