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31
231화. 논외의 존재 (2)
대화를 마무리한 차진명은 한층 복잡해진 심정으로 검찰청을 빠져나왔다. 도해월을 직접 마주하면서 그가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의문을 일부분 해결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석연치 않은 감정이 더해진 채였다.
‘계획이 조금 바뀌었지만,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으니 됐어.’
도해월을 보면서 느낀 감정을 조금 더 곱씹고 싶었으나 차진명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차진명이 뒤이어 향한 곳은 한국마력연구소였다. 이어 미로처럼 복잡한 길을 가로지른 끝에 연구소 지하에 도착했다. 육중한 문이 열리면서 드러난 내부는 평소와 달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연구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브레이크가 발생한 지 삼십 분 지났습니다. 모니터링 결과 축약하여 전달해 드릴게요.”
가장 먼저 차진명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수석 연구원 중 하나가 선배 연구원에게 보고하는 모습이었다. 차진명은 태블릿을 나란히 내려다보는 두 사람에게서 금세 시선을 거두고 걸음을 옮겼다.
차진명이 드넓은 공간을 익숙하게 가로지르는 동안 연구원들은 계속해서 같은 화두를 언급했다. 그들을 이토록 분주하게 만든 건 오늘 자로 진행된 세 번째 실험일 터였다. 오늘 실험이 진행되는 장소는 단양에 위치한 불 속성의 C급 던전이었다.
사실상 이번 실험은 평택에서 감행했던 지난 던전 브레이크와 함께 계획되어 있었다. 일정상으로는 두 실험이 당일에 연달아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차진명의 변심으로 계획이 미뤄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연구소 내부에 혼란이 불거지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잠시였다.
뒤이어 어느 연구원이 한쪽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 사이로 자연스레 합류했다. 그가 걸어온 방향을 확인해 보니 이전까지 실험체를 집결시켜 둔 공간에서 급하게 이동했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이어서 그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입을 열었다.
“실험체들도 하나둘씩 반응하고 있습니다. 특히 연령이 낮은 실험체들 사이에서 반발이 거세져서 우선 진정제 투약하고 경과를 지켜보는 중입니다.”
“이상 반응이 나타나는 실험체가 생기면 그때그때 보고하세요. 당분간 탈출이나 자해 혹은 자살을 시도하는 인원이 급증할 수 있으니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겁니다.”
그의 말에 대답한 건 이곳에서 가장 오래 머무른 수석 연구원이었다. 박호재 연구소장이 부임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 온 베테랑이기도 했다.
“오셨습니까, 헌터님. 사전에 지시하신 대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차진명의 인기척을 감지한 연구원이 그를 돌아보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차진명보다 한참 연배가 높은 연구원이 공손하게 조아리는 모습은 어딘가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지난 기록부터 확인하시죠. 바로 보실 수 있게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들고 있던 파일철을 펼쳐 내밀었다. 그 안에 담긴 자료는 오늘 실험이 진행된 던전 현장에 보내진 실험체들의 개인 정보와 그들이 단양 던전 브레이크 현장에 파견된 경위를 정리해 놓은 보고서였다. 그중에는 강준희의 정보가 담긴 서류도 있었다.
“강준희 헌터를 비롯한 실험체들 전원 던전 내부 폭발 감지 직후에 신호가 끊겼습니다. 마지막으로 확인된 위치가 최종 보스가 기거하는 중심부였다고 합니다. 시신은 완전히 분해되었을 거라고 판단했고, 곧바로 후속 조치를 진행했습니다.”
차진명은 손가락으로 서류를 짚어 가며 설명하는 연구원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닿는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타인의 눈을 골똘히 응시하며 그 너머에 깊이 가라앉은 감정까지 헤아리는 건 차진명의 오랜 습관이었다. 머지않아 시선을 거둔 차진명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꾸했다.
“수고했어요. 이대로 정리해서 전달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수석 연구원은 설명을 마무리한 뒤 파일철을 접으면서 대답했다. 그런 그를 지나친 차진명은 성민주의 개인 연구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십여 분 뒤, 연구실에 놓인 소파에 앉아 있던 차진명이 감았던 눈을 뜨고 성민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책장에 꽂힌 자료를 정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거기서 죽을 걸 알고 있었나 봐. 이것저것 남겨 놓고 갔더라고.”
이윽고 차진명을 잠시 돌아본 성민주가 주어가 없는 말을 툭 내뱉었다. 차진명은 그녀가 지칭하는 것이 테이블 위에 놓인 커다란 상자라는 걸 알아채고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상자 안에 담긴 건 강준희가 사용하던 개인 물건이었다. 그 안에는 차진명이 그에게 선물했던 아티팩트부터 안경이나 손수건 같은 사소한 물건까지 마구잡이로 담겨 있었다.
가장 위쪽에 놓여 있던 쪽지를 열어 보니 그 물건들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대신 전달해 달라는 전언이 남겨져 있었다.
“성가시게 뭐 이런걸.”
차진명은 감흥 없는 얼굴로 강준희가 남긴 쪽지를 구겨서 상자 안에 던져 넣었다. 강준희는 몰랐겠지만, 그의 홀어머니는 며칠 전에 처리된 상태였다.
성민주는 차진명의 말에 별다른 대꾸 없이 계속해서 짐을 정리했다. 연구소 내부는 전에 없이 분주한 상태였으나 성민주는 그들과 관계없는 사람처럼 묵묵하게 움직였다.
차진명은 또한 그녀와 다른 공간에 머무는 것처럼 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내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함에서 잔을 꺼내 투명한 내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몇 시간 전, 독주 대신 잔 내부를 채웠던 푸른빛을 상기했다.
그렇게 조사실에서 마주했던 도해월의 모습을 상기하다 보니 툭 걸리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강준희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부터 도해월은 이전과 전혀 다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었다.
“강준희. 그 이름을 언급하고 나서부터 표정이 완전히 달라지더라.”
그 장면을 곱씹던 차진명이 자신도 모르게 조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를 돌아보지 않고 짐을 옮기던 성민주도 손을 멈췄다.
“그 자리에서 처리할 것도 아니었으면서 왜 굳이 거기까지 갔던 거야? 시간 아깝게.”
그제야 고개를 돌린 성민주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는 실험체를 수급하는 데 일조했던 입양 브로커가 사망한 뒤 도해월이 그동안 연구소를 뒤쫓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자신의 흔적이 남은 자료를 조금씩 처리하던 중이었다. 혹여 실험에 관한 진실이 세간에 밝혀진다면 책임은 자신이 아닌 남은 연구원들이 지게 할 속셈이었다.
“확인할 게 좀 있어서.”
차진명은 손에 들린 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조사실까지 방문한 그가 다시 보려고 했던 건 다름 아닌 도해월의 눈이었다. 정확히는 그 눈에 담긴 감정을 읽어 내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조사실에서 마주한 도해월의 눈은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도리어 몇 년 전에 헌터 아카데미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깊고 짙은 분노가 그 안에 깃들어 있었다. 차진명으로서는 아직도 납득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차진명이 도해월의 존재를 감지하고 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 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건 이 자리에 있는 성민주는 물론이고 도해월 그 자신조차도 모르는 이야기일 것이 분명했다.
‘다시 보니 확실히 알겠어. 그건 내가 알던 도해월이 아니야. 대체 언제부터 다른 사람처럼 바뀐 거지. 언제부터 나를…….’
세상의 멸망이라는 결말로 향하기 위한 특수한 조치를 끝내 놓은 지금. 차진명은 자신의 짧은 삶을 되돌아보며 짐작했던 것보다 큰 비중을 차지한 도해월에 관해 계속해서 생각했다.
차진명이 헌터 아카데미를 떠나기 전의 도해월은 자신에게 구원을 바라는 듯 보였었다. 차진명 또한 도해월에게서 남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가능성을 읽어 냈다.
그로부터 이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돌아간 학교에서 마주한 도해월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동안 도해월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이미 두 사람의 거리는 끝없이 벌어져 있었다.
‘뭐, 그건 됐고. 곧 도착할 선물을 받고 좋아하면 좋겠네.’
그대로 눈을 감은 차진명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생각했다. 이미 그 자신이 알던 도해월은 그 자리에 없었다. 물론,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 * *
검찰 조사를 마무리한 뒤 길드 사무실에 복귀할 즈음에는 안팎이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서둘러 집무실로 들어선 나는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예성과 설연호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차례로 보고받았다.
“당장 투자부터 철회하겠다고 나선 기업이 한둘이 아니야. 해월이 네가 조사실 들어가기 전에 했던 말 때문에 여기저기 불똥이 튀었는지 이관부 소속 헌터들도 자기들을 모욕하는 거냐면서 하루 종일 난리고. 차정주 후보랑 엮인 사람들 반응은, 뭐, 굳이 설명 안 해도 알지?”
고예성의 말대로 취재진 앞에서 했던 발언이 예상하지 못한 범위까지 영향을 미친 상태였다. 반면 내가 타깃으로 삼았던 차정주는 아무런 반응 없이 잠잠한 상태라고 했다.
“그래도 열두 시간씩이나 잡혀 있던 것치고는 건강해 보이네. 그거면 됐다. 난 나가 볼 테니까 마저 얘기해.”
그 말을 끝으로 고예성이 집무실을 벗어났다. 긴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설연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런 파장을 대비해서 결성한 게 길드 연합 세력이잖아. 황선규 의원도 계속 도와주고 있고. 아니었으면 조사실에서 하루 꼬박 다 채우고 나왔을걸. 그보다 단양 쪽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아서 그게 걱정이야.”
말문을 맺은 설연호는 자신이 들여다보고 있던 태블릿을 내밀었다. 받아서 확인해 보니 내가 조사실에 있는 동안 단양에서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와 관련한 뉴스가 띄워져 있었다.
“이것도 차진명이 벌인 짓이지?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런데.”
현장 브리핑 영상을 통해 다시금 상황을 파악하던 내게 설연호가 말을 걸었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화면을 주시했다.
“맞아.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기 직전의 전조 증상도 비슷하고, 장소도 우리가 알고 있는 거랑 달라진 게 없어.”
더불어 단양 던전 브레이크는 발생지가 인구가 적고 외진 지역이라는 특성을 이용하여 차진명이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처리했던 던전이기도 했다. 전생에서 차정주의 선거 캠프와 얽힌 비리를 찾아낸 뒤 방송국 내부에서 지위가 밀려났던 오한빈 또한 이 사태에 휘말려 사망했었다.
“이번 생의 타임라인은 이때까지 우리가 겪었던 것들보다 훨씬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상태야. 지금 차정주 후보쪽으로 신경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건 알지만, 그래도 차진명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어.”
이어지는 설연호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간 전, 조사실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을 상기하며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다시 보니 이전이랑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어. 아마 이번 생에도 성물을 가지고 뭔가 손을 쓴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순간 설연호는 지난 기억을 되짚어 보는 것처럼 숨을 길게 내쉬었다. 차진명이 성물을 얻는 방식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세상을 멸망시키는 방식은 언제가 됐든 변함이 없었다.
차진명은 매번 자신이 습득한 성물을 가지고 던전에 입장한 뒤 그 안에서 무언가 조치를 해 두었다. 그런 다음 시간이 지나면 해당 던전은 막강한 힘을 품은 채 빠른 속도로 팽창하여 폭발해 버렸다.
“지금까지 차진명이 저지른 짓이 전부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시도해 보는 예행연습 같은 거였다니…….”
손으로 한쪽 얼굴을 매만지던 설연호가 말끝을 흐렸다. 그가 표현한 대로 차진명이 던전 브레이크를 연쇄적으로 발생시킨 건 오래된 예언의 첫 구절에 나오는 ‘멸망의 전조’를 그 나름의 방식대로 구현하기 위함이었다.
“그보다 선배, 조사실에서 봤던 차진명이 나한테 이상한 말을 했어. 대뜸 준희 이름을 언급하면서…….”
덜컥―
그때 누군가 집무실 문을 덜컥 열고 들어섰다. 돌아본 곳에는 서애란이 서 있었다.
“방금 우리 길드 앞으로 이상한 게 도착했어. 바로 확인해야 할 것 같아.”
한달음에 달려온 건지 거친 숨을 몰아쉬던 서애란이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두툼한 서류 봉투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우편의 발신지는 한국마력연구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