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32
232화. 논외의 존재 (3)
그로부터 이십여 분 뒤. 잔뜩 쌓인 서류를 빠르게 헤집으며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던 서애란은 결국 테이블에서 한 걸음 물러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이마를 짚는 그녀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군데군데 가려져 있기는 해도 누가 임의로 조작한 것 같진 않아. 재단에서 보호하고 있는 환자들 동향을 토대로 만든 자료에서 봤던 내용이랑 거의 비슷해.”
간신히 입을 뗀 서애란이 남은 손에 들려 있던 서류를 내게 내밀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오늘 자로 브레이크가 발생할 예정이었던 던전에 연구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강제로 들여보냈다는 거네. 그리고 그 행렬을 이끈 게 준희였고.”
그때 한쪽에 따로 분류된 서류를 읽고 있던 설연호가 중얼거렸다. 그가 읽고 있는 건 강준희를 비롯한 다수의 실험체가 어떤 경위로 브레이크가 예견된 던전에 입장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이 담긴 서류였다.
설연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 안에 담긴 서류의 내용이 상세하게 떠오르면서 단양 던전 브레이크 사태 현장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 잔상을 애써 누르면서 숨을 고른 뒤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문제의 던전에 들어간 건 준희까지 총 서른여덟 명이야. 정확한 사안은 마저 파악해 봐야겠지만, 최근에 에덴의 손을 빌려 최성일 원장을 처리하려고 했던 걸 보면 희생자 중 다수가 하늘 보육원에서 동원된 아이들이겠지. 어쩌면 전부일 수도 있고.”
한참을 침묵하던 나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문을 열었다. 서애란이 나에게 건넨 서류에는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실험체의 생년월일이 기재되어 있었다. 성명은 가려 놓은 걸 보니 이 또한 의도된 부분인 듯했다.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 내부에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단양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한 지 벌써 반나절이나 지난 상황이었지만 언론에서는 그 던전 안에서 사망한 사람들에 관한 언급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을 터였다. 강준희를 포함한 서른여덟 명의 죽음을 증명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눈앞에 놓인 이 서류들뿐이었다.
잔뜩 쌓인 서류를 힐긋거리던 나는 손에 들린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서류의 가장 위쪽에 남겨져 있던 쪽지에 적힌 글씨는 분명 차진명이 적은 것이었다.
[다음에는 누가 널 대신하게 될까?]정갈하게 적힌 문장을 보고 있으니 다시금 화가 치밀었다. 만약 차진명이 이런 서류를 나에게 보내지 않았다면 강준희가 어떻게 사망하게 되었는지 영영 모르고 지나쳤을 테다. 어쩌면 그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영영 알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차진명이 나에게 서류를 보낸 건 그 딴에는 일종의 호의를 베푼 것이었다. 또한 수십 명이 넘는 사람을 한순간에 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동시에 더는 자신의 뒤를 밟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움직인다면 강준희가 그랬던 것처럼 날 대신해서 다른 사람들을 해칠 터였다. 그때는 사망 인원이 수십 명에서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제기랄.”
짓씹는 소리로 욕을 내뱉은 나는 들고 있던 쪽지를 힘껏 구겨 버렸다. 차진명과 조사실에서 독대하던 순간부터 강준희가 사망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남겨 놓은 것이 고작 서류 몇 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곱씹을수록 착잡해졌다.
강준희는 언젠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되리라는 걸 정녕 몰랐을까?
스스로 건넨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강준희라면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차진명을 떠나지 못하고 곁에 머물렀던 건 아마 과거의 나와 비슷한 이유였을 테다.
그렇게 죽게 될 걸 알면서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차진명을 믿고 싶었겠지.
차진명처럼 대외적으로 비치는 모습이 완벽한 사람이 자신을 택했다는 데서 오는 자부심과 긍지라면 나도 잘 알고 있는 감정이었다. 그마저도 잠시일 뿐 강준희는 죽기 직전까지 그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었다.
“이런 자료에 연구소 이름까지 떡하니 달아서 보내다니. 덜미를 잡혀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이윽고 맞은편에서 나를 한참 동안 지켜보던 설연호가 말했다. 이내 곁으로 다가온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가 놓으면서 지나쳤다. 나는 그를 돌아보지 못한 채로 상념을 이어 나갔다.
머릿속에서는 던전 안에서 사망했을 강준희의 모습이 계속해서 덧그려졌다. 사방에서 거세게 치솟는 화염과 그 안에서 맥없이 스러지는 강준희와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많은 이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서 사망했을 강준희의 모습을 상상하다 보니 숨통이 조여 왔다.
압도되는 감각에 사로잡힌 건 잠시였다. 강준희의 사망 소식을 곱씹을수록 뼈가 아프지만 이대로 감상에 빠진 채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서애란을 바라보았다.
“애란이 넌 재단 쪽으로 바로 넘어가서 현선민 헌터랑 다른 사람들한테 상황부터 설명해 줘. 이 서류도 그쪽에서 보관하는 게 나을 것 같으니 갈 때 가져가.”
서애란은 본래의 담담한 기색을 되찾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은 여전히 잘게 떨리는 채였다.
“오늘 저녁에는 희찬 선배가 사무실에 온다고 했어. 얼마 전에 나랑 선배한테 맡겼던 일에 진전이 좀 생겼거든. 지금은 공규호 의원실 보좌관이랑 만나고 있을 거야. 모쪼록 자세한 건 그때 와서 들으면 될 것 같고…….”
서애란과 공희찬에게 맡긴 일이라면 한국마력연구소에서 벌어지는 등급 조작에 관한 정황을 말하는 것일 테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강준희의 이름이 적힌 서류를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그 서류는 두고 갈 테니까 준희랑 얽힌 일은 네가 선배한테 직접 얘기해. 그게 나을 것 같다.”
그렇게 말한 서애란은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챙겨 집무실을 벗어났다. 이윽고 설연호와 둘만 남은 집무실은 다시 한번 침묵이 감돌았다.
“전생에서는 오한빈 기자가 단양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려서 사망했던 걸로 기억해. 오한빈 기자뿐만 아니라 서너 사람 정도 더 있었지, 아마.”
앉은 자리에서 팔짱을 끼우고 있던 설연호가 입을 열었다. 때마침 전생에서 벌어졌던 사건과 이번 생의 흐름을 견주어 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이번 생에서는 오한빈 기자가 이 사태에 휘말리지 않게 됐지만, 오늘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가 곱절로 늘어난 걸 생각하면 어떤 상황이 더 낫다고 단정할 수도 없게 됐어. 평택 던전 브레이크도 마찬가지야. 애초에 사망자 수를 최소화하는 걸 목적으로 뛰어든 작전이지만, 우리 길드가 휘청이게 됐으니 마냥 다행이라고 말하기 어렵지.”
가만히 경청하던 설연호의 얼굴에 차츰 그늘이 드리웠다. 그는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한 듯 금세 말문을 열었다.
“그 모든 사태의 중심에 차진명이 있다는 게 비로소 확실해지기도 했고, 기억도 전부 되찾았으니 더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뿌리를 뽑아 버리자는 거지? 총선 직전에 차정주 후보랑 관련된 일도 전부 해결하고.”
설연호의 요약은 정확했다. 강준희의 최근 사진이 담긴 자료에서 시선을 거둔 나는 숨을 길게 내쉬면서 말했다.
“차진명이 이미 던전 안에 성물을 가지고 들어간 상태인 걸로 추정되니 그 던전은 어떻게 찾아낼지, 그 안에 있는 성물은 어떻게 할지도 고민해 봐야 해. 정건후 선생님이랑 나디아한테는 내가 연락할게. 그리고 또……. 차정주 후보 쪽에서 연락 온 건 아직 없지?”
나를 따라서 테이블에 놓인 자료를 힐긋거리던 설연호가 입을 열었다.
“아직 잠잠해. 음, 사실 조사 마치고 나오면 너랑 얘기하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 차정주 후보랑 관련된 거야.”
나 역시 차정주의 존재에 관해 의문을 품고 있는 터였다. 곰곰이 되짚어 보면 그는 이전 생에서부터 어딘가 모순된 구석이 있는 존재였다.
제 아들인 차진명에게 인체 실험을 감행하는 등 끔찍한 짓을 여럿 저지르기는 했으나 끝내 그를 죽이지 않았고, 매번 그의 계략에 휘말려 사망하게 된 것만 봐도 그러했다. 그것 말고도 차정주는…….
“차정주 후보 말이야. 아무래도 평범한 인간은 아닌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상념을 다 끝맺기도 전에 설연호가 말을 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우선 간단한 것부터 짚고 넘어가 볼게. 혹시 차정주 후보의 죽은 아내에 관해서 기억나는 것 있어?”
“그야…….”
곧바로 대답하려 했으나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억 속에 안개가 드리운 것처럼 희미하기만 했다. 희뿌연 기억을 헤집어 보려 애쓰는 순간 시간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 * *
같은 시각, 차정주는 자신의 앞에 놓인 체스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맞은편에 놓인 의자는 비어 있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경기에 열중했다. 잔뜩 몰입한 그의 손길이 뒤이어 향한 곳은 반대 진영에 놓인 흑색 비숍이었다.
그렇게 혼자서 두는 체스 경기는 수십 번도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덧 서른 번째에 다다른 경기를 마무리하며 한숨을 길게 내쉰 차정주는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에 들어찬 건 고전적인 분위기의 응접실 풍경이었다. 오른편으로 난 창문 너머에서는 붉은 낙엽이 바람을 타고 흩날리던 모양 그대로 멈춰 있었다.
차정주 역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전혀 개의치 않는 상태였다. 도리어 평소보다 편안해 보이는 모습으로 체스판을 재차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백색의 폰이었다. 이내 다른 기물보다 전진해 있던 폰을 들어 올렸다.
체스의 ‘폰’은 오로지 전진만 할 수 있는 기물이었다. 다른 기물처럼 대각선으로 이동하거나 공간을 뛰어넘는 것과 같은 재주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한 이유로 폰은 다른 기물에 비해 쉽게 제압당하기 일쑤였다.
그러했기에 차정주는 ‘시간’이 도해월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하지만 서른한 번째 경기를 다시 시작하려는 지금, 차정주의 생각이 이전과 사뭇 달라졌다. 기대는커녕 코웃음을 치며 외면했던 백색의 폰이 이때껏 발견하지 못했던 놀라운 변수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차정주는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렸다.
‘직접 봤다면 마음에 들어 했을지도 모르겠군.’
표정 없는 얼굴로 서른한 번째 경기를 시작한 차정주는 지나온 기억을 되짚으며 기물을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다.
흑과 백을 오가며 차례로 이어지던 행마가 끝으로 다다를 무렵, 차정주의 손길이 끄트머리에 놓여 있던 흑색의 퀸을 향했다. 퀸은 체스에서 가장 강력한 기물이었다.
차정주는 서른한 번째 경기의 끝을 보기 직전에 손을 거뒀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퀸을 체스판의 중심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머릿속에 같은 이름이 떠올랐다.
‘그동안 녀석이 벌인 수십 번의 기행을 참아 준 건 전부 당신 때문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정리할 때가 됐어. 마침 판돈도 거둬들였고.’
이름을 곱씹고 있으니 그 누군가의 형상이 머릿속에서 선명해졌다. 그녀는 언젠가 차정주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일부러 흐릿하게 만들어 놓은 존재였다. 당시의 선택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그의 최선이었다.
차진명과 꼭 빼닮은 얼굴을 가진 그녀는 차정주에게 느지막한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그건 바로 그녀가 어떤 기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쉬운가?”
자신을 향해 소리 내어 묻던 질문을 곱씹던 차정주는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그저 무감한 표정으로 창밖을 돌아볼 뿐이었다. 창문 너머에 떠올라 있던 붉은 낙엽은 가을볕을 머금은 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글쎄.”
고민 끝에 내놓은 답은 이 정도였다. 사실 그가 어떤 답을 내놓는다 한들 판을 뒤엎어 버리면 결국에는 모든 것이 무상해질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