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33
233화. 논외의 존재 (4)
설연호의 질문에서부터 시작된 혼란은 나를 또 다른 미궁 속으로 이끌었다. 나는 계속해서 차정주의 아내와 관련한 기억을 되짚어 보았으나 그 어떤 것도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곱씹을수록 누군가 그 기억을 일부러 도려낸 것 같다는 감상만 선명해질 뿐이었다.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답답한 이 느낌은 마치…….
“오래된 예언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려고 할 때도 지금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진 기분이었어. 단단한 벽 앞에 가로막힌 것 같기도 했고. 그러니까 선배 말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특정한 기억을 지우는 게 차정주 후보의 능력이라는 거지?”
불과 몇 시간 전, 조사실에 앉아 있던 나는 오래된 예언과 관련한 풀리지 않은 의문을 곱씹어 보았었다. 그로 인해서인지 과거의 내가 느꼈던 감각과 방금 내가 느꼈던 낯선 감각을 수월하게 대조해 볼 수 있었다.
오래된 예언을 떠올리는 순간, 그 벽 안에 아주 막강하고 절대적인 힘이 깃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힘의 여파였던 건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누구의 기억인지 분간할 수 없는 장면들도 무의식 속으로 밀려들어 왔었다.
차정주와 얽힌 기억을 상기할 때도 무언가에 의해 시야가 가로막힌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순간에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힘은 예언을 떠올렸을 때만큼 강력하지 않았다. 조금 더 상세하게 구분한다면 누군가 사용한 스킬의 효력이 광범위하게 퍼진 느낌이었다.
“차정주 후보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S급 헌터라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건가? 뭔가 좀 이상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던 나는 설연호에게 재차 되물었다. 그 역시 머릿속의 혼란이 정리되지 않은 듯 입술을 잘근거리면서 말했다.
“차정주 후보한테 뭔가 심상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건 나도 얼마 전에야 깨달았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기억을 되찾고 나서 직감이 훨씬 예민해졌거든. 신성력의 영향인 것 같아.”
그러다 문득 기억을 되찾은 설연호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눴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설연호는 자신이 맡은 역할의 이름이 ‘거룩한 조력자’라고 했었다. 그걸 생각하면 그에게 일어난 변화가 어떤 맥락에서 시작되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심상치 않은 구석이라면……. 혹시 차정주 후보한테 또 다른 성물이 있는 건가? 그게 아니고서야 그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은데.”
설연호의 설명을 곱씹어 보던 나는 떠오르는 의문을 그대로 전달했다. 이어서 설연호가 대답할 말을 고르는 사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도 선배한테 얘기할 게 하나 있었어. 성물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어느 생에서는 차진명이 게니우스의 창으로 세상을 멸망시켰고 또 다른 생에는 유스티티아의 검을 사용했었잖아. 그런 걸 보면 성물이 멸망을 촉발하게 하는 매개체인 것 같아.”
“매개체라고 생각하니 그럴듯해지네. 차진명 혼자서 세상을 멸망시킬 방법을 생각해 내진 않았을 테니까. 방법을 알려 준 존재가 있었겠지.”
설연호는 금세 수긍하면서 대답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건 아직 추측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차정주에게 비밀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으니 그에 관해서도 서둘러 답을 찾고 싶었다.
“차정주 후보에 관한 건 조만간 정건후 선생님이랑 나디아를 다시 만나기로 했으니 그때 한번 물어보자. 그 두 사람도 모른다고 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 일단 성물이라면 나디아가 알고 있을 거야.”
짧게 고민 끝에 곁에 앉은 설연호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어서 떠올린 건 지금까지 품었던 의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답을 주었던 ‘언약의 무지개’였다. 아직 그 아이템을 사용할 기회가 한 번 더 남아 있었다. 만약 나디아에게서 답을 들을 수 없다면 그 방법을 사용하면 될 듯했다.
“그건 그렇고 희찬 선배는 언제쯤 온다고 했지? 공규호 의원실 보좌관이랑 만났다는 것 보면 일에 진전이 있나 보네.”
적절한 시기를 고민하던 나는 관자놀이에 손을 짚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에게 강준희의 소식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이 답답해졌다.
“음, 우리 얘기를 듣고 나서 좀 고민하다가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대. 게다가 그 보좌관은 희찬이네 아버님이랑 관련된 사람이기도 하니 일정 잡기가 쉽지 않았나 봐. 조금만 기다리면 올 거야.”
그렇게 말하는 설연호는 말문을 맺으며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정주 후보는 단양에서 일이 터진 걸 알고 있을까. 보아하니 이번 사태는 차진명이 독자적으로 벌인 짓인 듯한데.
이내 등받이에 몸을 기댄 나는 소식 없이 잠잠한 차정주를 떠올렸다. 방금 그에 관한 새로운 진실을 알아챘으나 여전히 그의 속내가 불투명하게 느껴졌다.
* * *
한편 차정주는 자신이 속한 정당 사람들과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바깥은 낮에 단양 던전 브레이크 상태의 여파로 소란한 상태였으나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 후보님께서 이관부 승격 계획을 앞당길 생각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전에는 분명 총선을 치르고 그다음 해부터 계획을 착수하기로 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서두르실 줄은 몰랐던 터라 어떤 연유에서 마음이 바뀐 건지 여쭙고 싶군요.”
그때 차정주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한 의원이 입을 열었다. 오늘 이들이 모인 이유는 두 달 뒤에 진행될 예비 후보자 등록을 비롯하여 그 이후에 설립할 총선 선거대책위원회와 관련한 사안을 조율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자신의 계획을 갑작스레 앞당기기로 했던 차정주의 속내를 청해 듣기 위한 것도 있었다.
“이런저런 사안을 고려해 봤을 때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하신 겁니다. 저희 쪽에서도 그에 맞춰 준비하고 있습니다. 원활하게 진행 중이니 염려 마세요.”
차정주를 대신하여 대답한 건 그 곁에 앉아 있던 이원석이었다. 이원석은 오늘 모인 이들 중 이능단속관리본부에 속해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차정주는 너스레를 떨며 대꾸하는 이원석을 힐긋 살피면서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원석은 차정주가 수십 번의 생을 지나오는 동안 여러 방면에서 한결같았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자리를 파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차정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마다 인사를 나누고 멀어지려는 찰나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이원석이 다가 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후보님께서 염려하실 일 없게 도해 길드 관련 건은 작정하고 물고 늘어질 생각입니다. 조만간 검찰에서 다시 소환할 테니 맡겨만 주십시오. 차진명 헌터도 제가 잘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차정주는 사전에 지시하지 않은 사안을 보고하는 이원석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 생에서든 그의 오지랖은 이따금 선을 넘는 듯했으나 구태여 손을 쓰지 않았다. 달리 대답하는 대신 예의상 어깨를 두드려 준 뒤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복귀하는 차량에 탑승한 차정주는 조수석에 앉은 조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자신의 비서 역시 이원석과 마찬가지로 꾸준히 곁에서 머물렀던 인재였다. 차정주의 시선을 느낀 그는 몸을 반쯤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몇 달 전부터 차진명 헌터가 감시를 따돌리고 독단적으로 움직인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횟수가 점점 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조치할까요.”
어느새 비서에게서 시선을 거둔 차정주는 느릿하게 숨을 골랐다. 이내 머릿속으로 과거의 차진명이 했던 행동을 가늠해 보았다.
‘이번에는 시기가 훨씬 앞당겨졌군. 녀석이 성물을 일찍 넘겨달라고 청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나?’
사실상 차정주에게 있어 차진명은 독 안에 든 쥐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가 자신을 따돌린다고 해도 금세 따라잡힐 것이었다. 차정주는 잠시 감았던 눈을 뜨면서 대꾸했다.
“더는 상관없으니 그대로 두게.”
그럼에도 차정주는 손을 쓰지 말 것을 지시했다. 비서는 별다른 질문 없이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을 남겼다.
차량 내부에는 다시금 침묵이 이어졌다. 한숨을 길게 내쉰 차정주는 휴대전화를 꺼내 손에 쥐었다. 이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일세. 자네에게 다시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
자연스레 말문을 연 차정주가 자신의 계획을 휴대전화 너머의 상대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계획이 예정대로 이행된다면 머지않아 한국마력연구소의 총책임자가 변경되고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될 것이었다.
“그럼 나중에 다시 통화하지.”
그 말을 끝으로 통화를 종료한 차정주는 오랫동안 연구소에 재직한 수석 연구원에게 따로 보고받은 사안을 곱씹었다. 연구원이 전한 소식에 따르면 차진명이 수십 명의 실험체를 죽음으로 떠밀었다고 했다.
‘이번 단양 던전 브레이크도 그렇고, 최근 들어 기존에 정해진 일정을 임의로 수정하는 사례가 늘었습니다. 다수의 실험체를 던전 내부에 강제로 투입한 건을 두고 내부에서 반발하는 연구원들이 하나둘씩 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처리했으니 염려하실 건 없습니다만…….’
뒤이어 연구원이 자신에게 추가로 전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차정주는 연구원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금세 이해했다. 차정주 또한 차진명이 더는 멋대로 날뛰지 못하도록 조치하려던 참이었다.
“이보게, 정 비서.”
“네, 후보님.”
조수석에 앉아 있던 비서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곧바로 돌아보았다. 차정주는 차창에서 시선을 거두면서 말했다.
“조만간 도해월 마스터를 만나야겠어. 자리를 만들어 주게.”
차정주가 살펴야 하는 건 차진명만이 아니었다. 그의 맞은편에 있는 도해월 역시 잊을 만하면 소란을 피우며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최근에 도해월이 첫 번째 검찰 조사에 응하면서 취재진에게 했던 말을 곱씹어 보던 차정주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대단한 신념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 번쯤은 들어 둬도 나쁠 건 없지. 그게 마지막 발악이 될 수도 있을 테니.’
얼마 뒤 웃음기를 거둔 차정주가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바깥 풍경이 그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 * *
한참 동안 차정주의 속내를 가늠하던 나는 끝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머지않아 공희찬이 나타날 듯했다.
덜컥―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면서 공희찬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한 그는 나와 설연호를 번갈아 살핀 뒤 성큼성큼 들어섰다.
“인사는 일단 생략하고, 나 뭐 하나만 묻자.”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한 뒤 테이블 근처로 다가와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이내 숨을 허덕이면서 입술을 잘근거렸다.
“걔 진짜 죽었어?”
공희찬이 진정하기까지 기다리려던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연호 또한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강준희 그 새끼 진짜 죽었냐고.”
힘껏 말아 쥔 공희찬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미묘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X발, 진짜 죽었나 보네. 그럼 이거나 봐.”
짓씹는 어조로 내뱉은 공희찬이 휴대전화를 꺼내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내 그는 나와 설연호를 향해 화면을 내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