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35
235화. 속죄와 단죄 사이 (2)
이틀 뒤, 헌터 아카데미.
지선일은 주말의 고요한 복도를 문제혁과 함께 걷고 있었다. 왼편으로 줄지어 난 창문을 따라서 빛이 사선으로 쏟아지며 서늘하면서도 포근한 온기가 감돌았다. 이내 그녀는 인적이 드물어지면서 한층 상쾌해진 공기에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한동안 다른 사람들 눈치 보느라 마음 놓고 걷지도 못했는데.”
문제혁은 그 말을 듣고 공감한다는 듯 슬며시 웃어 보였다. 그동안 도해 길드에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면서 도해월과 친밀한 관계라는 게 알려진 두 사람 또한 예기치 못한 곤란을 연이어 겪어야 했다.
한때는 헌터 아카데미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니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고 여겨 왔지만, 사실상 그 반대였다. 모두가 도해 길드와 관련한 화두에 관해 언급할 때마다 도해월과 깊은 연관이 있는 지선일과 문제혁을 언급하거나 자극적인 질문을 건네기도 했다.
“그나마 정건후 선생님이 계셔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더 고생했을지도 몰라. 그, 누구 때문에라도.”
뒤이어 문제혁이 대답했다. 지선일은 그가 일부러 언급을 생략한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챘다. 보나 마나 전태무 이사장일 터였다. 그가 차정주를 대신하여 새롭게 부임한 지도 시간이 제법 흐른 참이었다.
“이사장 말하는 거지? 난 이제 그 인간만 생각하면 지긋지긋해. 차라리 전 이사장처럼 학교 사정에 무관심한 게 나아. 이제는 뭐 토씨 하나까지 꼬투리 잡으려 들잖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은 지선일은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곁에서 덩달아 걸음을 멈춘 문제혁도 고개를 숙였다.
“안개가 짙은 바닷가. 그리고 빈 전망대에 걸어 놓은 자물쇠.”
지선일이 읽은 건 도해월이 전날 그 두 사람에게 알려 준 문장이었다. 두 사람은 강준희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접한 뒤 암담한 심정에 사로잡혔던 차에 그 문장을 발견하고 야트막한 희망을 품게 된 터였다. 그러다 문득 지선일이 문제혁을 올려다보았다.
“선배들한테는 얘기한 적 없지만, 늘 궁금했어. 준희 선배가 왜 우리랑 멀어진 건지. 대체 어쩌다 차진명 선배 같은 사람 옆에 붙은 건지도. 차진명 선배한테 붙지만 않았어도 그냥 우리랑 성격이 잘 안 맞아서 그랬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문제혁은 얕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면서 말문을 열었다.
“난 희찬 선배가 말한 부분에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었어. 하지만 D급인 사람이 그 둘만 있는 것도 아니기도 하고, 또 그게 전부는 아닌 듯해서 뭔가 이상했고.”
지선일도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녀는 침울해진 얼굴로 시선을 떨궜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화면 속에 적힌 문장이었다.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암호 같았다.
“해월 선배 말로는 안개가 짙은 바닷가는 선배들이 현장 실습에서 들어갔던 던전이라고 했어. 언제였지? 선배 6학년 때였나?”
“응, 그때 맞아. 그리고 빈 전망대는…….”
문제혁은 화면과 정면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별관의 빈 동아리 교실이었다.
“선배가 말한 교실, 여기가 맞는 것 같아.”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은 몇 년 전부터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작년부터는 잠겨 있었기에 정건후의 도움을 받아 열쇠를 가지고 들어온 것이었다.
이윽고 시야에 담긴 건 환한 빛이 쏟아지는 말끔한 내부였다. 꽤 오랜 시간 잠겨 있었던 것이 무색하도록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이곳에 들어와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처럼.
“제혁이 너 여기 들어와 본 적 있어? 난 처음이야.”
“나도 그래. 지나다니면서 몇 번 본 게 다야.”
문제혁은 지선일의 뒤를 따라 들어선 뒤 문을 단단하게 잠가 놓았다. 그 너머의 복도 또한 기척 없이 잠잠하기만 했다. 잠시 뒤 그는 이 공간이 자아내는 묘한 분위기에 사로잡힌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빈 전망대랑 이 교실이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일단 선배가 알려 준 대로 오기는 했다만. 그리고 자물쇠도 딱히 안 보이는데.”
그때 여기저기 둘러보던 지선일이 문제혁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빈 교실 내부에는 예전에 누군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캐비닛과 책상을 비롯한 기본적인 기물만 놓여 있는 상태였다.
“예전에 형이랑 준희 선배가 여기서 만났을 때, 준희 선배는 책상에 앉아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고 했었잖아. 그렇다면…….”
지선일이 닫혀 있는 캐비닛을 하나씩 여는 동안 문제혁은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지선일을 힐긋거리면서 그 앞에 놓인 창문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모든 캐비닛이 비어 있는 걸 확인한 지선일은 그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 뭐 보이는 거 있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묻던 지선일이 문제혁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직선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던 그녀는 이내 탄성을 질렀다.
“아, 이래서. 이래서 준희 선배가 전망대라고 했던 거구나.”
창문 바깥으로 헌터 아카데미 교정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층이 높지 않은 나머지 교정을 오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한눈에 담아 볼 수 있는 정도였다.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고 보면 건물 뒤쪽의 주차장으로 향하는 사람까지 확인할 수 있을 듯했다.
“아직 하나가 더 남았어. 자물쇠도 찾아야 해.”
어느새 책상 아래로 내려온 문제혁이 말했다. 지선일도 서둘러 지면에 발을 디딘 뒤 옷을 털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캐비닛은 다 비어 있었어. 책장은 애초에 비어 있고, 그 흔한 서랍 하나도 없는 걸 보면 뭘 숨기기에 적합한 공간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스킬을 사용한 건가?”
지선일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문제혁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생각만큼 어렵게 숨겨 놓지는 않았을 것 같아. 준희 선배 입장에서는 누구라도 빨리 발견해 줬으면 했을 테니까.”
이어서 그는 그대로 눈을 감고 스킬을 시전했다. 그의 발치에서부터 한기가 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교실 전체가 얇은 서리로 뒤덮였다. 급속으로 얼어붙은 나머지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불거지는 가운데.
“어, 저기.”
지선일이 캐비닛 중 유일하게 얼어붙지 않은 칸을 가리켰다. 천천히 눈을 뜬 문제혁은 지선일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다음은 내가 할게.”
그 말을 끝으로 지선일이 서리가 맺히지 않은 캐비닛 앞에서 눈을 감았다. 문제혁은 도해월이 신신당부했던 대로 수상한 기미를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같은 시각, 나는 정건후와 함께 파주의 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별장으로 도착한 뒤 자리를 잡고 앉을 즈음 재킷 안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래, 어떻게 됐어?”
이윽고 근처에 앉은 정건후에게 양해를 구한 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휴대전화에 대고 입을 열었다. 부디 내 예측이 맞아야 할 텐데.
―형이 말했던 전망대가 이 교실이 맞는 것 같아. 준희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책상에 앉아서 내다보니까 학교 전경이 한눈에 보이더라.
문제혁은 조곤조곤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의 대답을 순간 심장이 점차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가 찾아간 교실은 회귀한 뒤 처음으로 진행했던 현장 실습을 마치고 조원들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찾아간 공간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준희를 만나 상태를 확인하고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물건은 찾았어?”
오래전에 만났던 강준희의 얼굴을 떠올리며 휴대전화 너머로 되물었다. 문제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느지막하게 대답했다.
―어, 방금 뭐가 나왔어. 좀 큰 상자 하나. 따로 잠금장치 같은 게 걸려 있진 않은 것 같아. 그래도 여기서 더 안 건드리고 그대로 사무실로 가져갈게. 일단 연호 선배한테 전달하면 되지?
나는 그제야 안도하면서 그렇게 해 달라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런 다음 휴대전화를 다시 안주머니에 넣으면서 강준희가 남긴 문장을 곱씹어 보았다.
안개가 짙은 바닷가는 역시나 처음 함께 들어갔던 던전을 말하는 것일 테다. 그때 처음 알았다는 건 그 던전에서 내가 성물을 습득했다는 걸 알아챘다는 의미하는 걸 테고.
거기까지 짚고 보니 그날 나와 대화하던 강준희에게 미묘한 기색이 감돌았던 것이 떠올랐다. 강준희는 나에게 일찌감치 의식을 잃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 숲에서 내가 성물을 가지고 나오는 걸 목격한 듯했다.
지잉―
복잡한 심정이 뒤엉킨 한숨을 내뱉는 순간, 다시 한번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곧바로 확인해 보니 이번에는 고예성이 남겨 놓은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차 후보 쪽에서 연락이 왔어 널 만나고 싶대]“하필 이 타이밍에.”
새로운 소식을 확인하던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중얼거렸다. 강준희가 남긴 게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이런 소식을 접하니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그럼에도 차정주와의 만남은 이전부터 바라던 것이었으니 머뭇거릴 건 없었다.
“표정을 보니 일이 복잡하게 꼬인 듯하군. 와서 앉지그래.”
그때 뒤에서 나를 지켜보던 정건후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그의 근처에 앉았다. 테이블에 놓인 노트북 화면 속에는 화상 통화로 연결된 나디아의 모습이 보였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오늘 만남을 통해 궁금했던 것들을 해결하면 될 듯했다.
―오랜만에 보네요, 도해월 마스터. 직접 만나서 대화하지 못하게 된 건 아쉽지만, 모쪼록 본론부터 얘기해 봅시다.
화면 너머의 나디아는 깍지를 끼운 손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나는 그녀와 정건후를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 말을 정리한 뒤 차정주에 관해 새롭게 알아낸 정황을 설명했다.
그렇게 십여 분이 지났을까. 내 말을 듣고 곰곰이 고민하던 나디아는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이것 참……. 이상한 일이네요. 차정주 헌터처럼 전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헌터에 관한 대외적인 정보는 본인이 원치 않아도 낱낱이 공개되기 마련이고, 특히 그 가족에 관한 사항은 더더욱 숨기기 어려웠을 거예요. 그런 와중에 단 하나의 정보만 말끔하게 지워져 있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군요.
다소 당황한 건지 드문드문 말을 잇던 나디아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문을 닫았다.
―음, 지금부터는 도해월 마스터가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드리죠. 제가 전사의 발자취를 통해 차정주 헌터의 모습을 보았던 건 딱 한 번뿐이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두 분도 잘 알고 계시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건후를 돌아보았다. 그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면서 나디아의 음성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였습니다. 차정주 헌터는 그 성물을 본인의 소유로 귀속시킨 게 아니라 공동의 물건으로 지정해 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소지했다면 제가 몰랐을 리가 없어요.
거기까지 들은 정건후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는 팔짱을 풀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떠오르는 게 하나 있어요. 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게이트 시대가 시작되기 한참 전에도 사람들의 기억에 관여하는 존재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특정 몇 명의 기억만 지우는 게 아니라 지금처럼 모든 사람의 기억에 관여할 만큼 강한 힘을 가졌다고 하더군요. 원한다면 해당 사례에 관해서 알아볼게요. 물론 이 이야기는 독일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처럼 떠도는 사례이다 보니 큰 성과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겠지. 누가 들어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방법을 떠올리면서 대답했다.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인 나디아는 정건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바로 다음 화두로 넘어가죠. 게니우스의 창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결정했나요?
이마를 문지르면서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고개를 들고 정건후를 바라보았다. 그는 시선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