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37
237화. 속죄와 단죄 사이 (4)
그로부터 일주일 뒤. 검찰 측에서 추가 소환 조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이번에는 공무집행방해죄와 더불어 던전 브레이크 수습 현장에서 변압기와 전봇대 등의 공공 기물을 고의로 파괴했다는 공익건조물파괴죄까지 더해진 상태였다.
그 소식을 접한 나는 헛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난장판인 현장에서 공공 기물이 파손된 일을 개인의 죄로 치환한다는 건 앞으로 쓸 만한 건수가 생길 때마다 나를 소환해서 조사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것과 다름없었다.
또한 조사에 소환되는 모습이 계속해서 노출되면 뭇 사람들 또한 나에게 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게 될 것이었다. 모쪼록 죄가 있으니 저렇게 불려 다니는 것이라 믿으면서 뭐라도 밝혀지기를 기다리는 사람 또한 늘어날 터였다.
그로 인한 여파는 우리 길드의 인지도 하강으로 이어졌다. 각성자 등급이 A급으로 상승한 뒤 줄지어 나타났던 투자자들이 하나둘씩 손을 떼면서 기업인들 사이의 평판 또한 떨어진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상반기 길드 순위가 발표된 이후 내실을 잘 다져 놓은 덕분에 재정적인 타격은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안심할 순 없지. 외풍은 쉽게 걷히지 않을 테니.
이능단속․관리본부 쪽에서 칼을 갈기 시작한 이상 우리는 계속해서 불어올 외풍을 대비하여 내부를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고예성을 비롯한 다수의 사무직 헌터를 소집하여 전략 회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잠시 뒤 사전에 들여다보던 회의 자료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오전에 예정된 회의를 진행하고 나면 차정주를 만나기 위해 곧바로 제주도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의 비서가 안내한 약속 장소는 차정주의 개인 사유지인 동시에 내게도 익숙한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 얽힌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보던 나는 느릿하게 손을 쥐었다가 펼쳐 보았다. 손가락을 휘감고 전신까지 퍼져 나가는 마나의 기운이 이전보다 한층 뚜렷해진 것이 느껴졌다. 내게는 실로 익숙한 감각이었다.
이런 감각은 등급이 상승하기 직전에 주로 느꼈던 것이었다. 그건 곧 비로소 고지에 다다랐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는 기억을 되찾은 뒤부터 서서히 감지되었던 것이었다. 누군가의 습격을 받고 일주일 동안 의식을 잃었던 일이 무색하도록 긍정적인 변화였다.
내가 느끼는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희미하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나를 과거로 돌려보낸 ‘시간’의 존재감 또한 점점 선명해졌다. 손으로 만질 수도, 눈으로 볼 수도 없었으나 초월적인 존재가 나를 돕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단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서른한 번 동안 이어진 항해의 끝자락을 가늠해 보고 있으니 지난 만남에서 정건후가 내게 했던 말이 귓가에 되풀이되었다.
‘네가 짐작한 대로 차진명이 성물을 통해 던전 내부에서 손을 써 두었다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맞서야 하는 건 차진명에게 그 방법을 알려 준 수호신이 될 거다. 그럼에도 여전히 차진명을 단죄할 생각이 남아 있는 거라면 어떤 수를 써야 할지 고민해 보도록 해.’
그렇게 말하던 정건후는 언제나처럼 무심해 보일 정도로 담담했다. 하지만 그가 건넨 말에 담긴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회의실로 향하기 전 매무새를 가다듬던 중 문득 차진명이 남겨 놓은 쪽지 속 활자가 떠올랐다.
나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을 처리하겠다고? 어디서 그따위 궤변을.
차진명이 남긴 경고는 그 자신에게 스스로 내리는 면죄부인 동시에 잔혹한 학살을 합리화하기 위한 얼토당토않은 핑계일 뿐이었다. 새어 나오는 조소를 삼킨 나는 과거로 회귀한 직후에 정한 목적을 상기해 보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목적 자체는 한결같았다. 바로 차진명에게 복수하는 것이었다. 그 복수에는 차진명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도 없이 생을 마감해야 했던 모든 이들을 위한 사죄가 될 터. 그러니 차진명만큼은 내 손으로 단죄해야 했다.
이윽고 주먹을 힘껏 쥐었다가 펼치면서 숨을 고른 뒤 회의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안쪽에서는 수많은 헌터들이 긴장된 기색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문간에서 기다리던 고예성에게 눈짓을 건넨 뒤, 나는 미리 마련해 둔 상석에 앉아 입을 열었다.
“그럼 바로 시작합시다.”
그 말을 기점으로 각각의 순서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맞은편에 앉은 고예성은 자신이 들고 있는 태블릿과 회의실에 모인 헌터들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현재까지의 상황을 생각하면 연초에 발표될 용산구 내 길드 순위는 대폭 하락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지만 최종 순위가 발표되기까지 대략 두 달이 남아 있으니 그 안에 부정적인 여론을 방어하고, 고정 수익까지 끌어올리면 승산이 있을 겁니다.”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그는 우리 길드와 여전히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정원 전자 측에서 새로 제안한 협업 관련 사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죠.”
그 뒤로는 고예성과 함께 주요 업무를 도맡은 헌터가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길드 연합 세력 결성 관련 세부 사항 조율은 오늘 자로 마무리되었고, 이틀 뒤에 공식 석상에서 공표할 예정입니다. 관련 여론을 분석해 보니 예상치 못한 소식에 당황스러워하는 반응이 태반이었습니다. 하지만 도해와 연합하는 세 길드가 몇 년 전부터 마스터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태블릿 화면 쪽으로 잠시 시선을 낮췄다. 그동안 이런저런 타격이 있던 것 사실이었으나 대처 또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다. 길드 연합까지 공표되고 나면 기울었던 기세 또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듯했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갈까요?”
그때 고예성이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그의 설명을 따라서 태블릿 화면 속의 자료를 넘겨 보니 용산구 내 길드 순위와 전국 길드 순위가 정리된 표가 떠올라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에덴 길드의 이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잠시 주해나의 이름을 떠올려 보던 나는 태블릿 화면을 건드려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오늘은 1팀 인원들이 우리 길드의 관할 던전 내부를 순찰하고 마석을 수집하는 날이었다.
지금쯤이면 중심부에는 도착했겠네.
뒤이어 그들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설연호와 공희찬에게 지시했던 사항을 곱씹어 보았다.
* * *
한편 이른 오전에 던전에 입장한 설연호와 1팀 소속 헌터들은 바람이 부는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구름이 닿을 것 같은 고지대로 이루어진 이 던전은 성문 길드가 관할하던 던전 중에서도 관리가 유난히 까다로운 곳이었다.
“콜록, 콜록.”
쉴 새 없이 부는 모래 폭풍을 헤집으며 잔기침하던 설연호가 정면을 내다보았다. 행렬의 앞쪽에서는 안진영을 비롯한 헌터들이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설연호의 시선이 향해 있는 건 1팀에 속해 있으나 상대적으로 주목을 많이 받지 못했던 헌터 중 한 명이었다. 설연호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일주일 전, 도해월이 자신과 공희찬에게 남긴 말을 상기해 보았다.
‘조만간 에덴 쪽에서 우리 길드 내부에 심복을 심어 놓으려고 할 거야. 주해나 부길드장이 사람을 고르는 기준은 크게 변하지 않았을 테니 의심할 법한 여지가 있는 사람은 따로 추려서 넘길게. 1팀 쪽 인원은 선배가 확인해 주고, 2팀은 희찬 선배가 맡아서 확인해 줘.’
그 말을 들은 공희찬은 곧바로 수상한 행적이 발각되면 보고하면 되는 거냐고 질문했다. 그러자 도해월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으면서 두 사람과 시선을 마주쳤다.
‘원하는 만큼 활개 칠 수 있게 내버려 둬. 선배들이 먼저 다가가서 던전에 관한 정보를 흘려도 돼. 그러다 심복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어떤 부분을 가장 관심 있게 살피는지, 던전 밖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유심히 지켜보면서 특이 사항이 생길 때마다 나한테 보고해 주고.’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공희찬이 빠져나간 뒤, 도해월과 둘만 남은 설연호는 그에게 심복을 찾아낸 뒤에도 곧바로 처리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만약 준희가 차진명이 제조한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면 차정주 후보도 가만히 있었을 거야. 하지만 한마연에서 볼모로 잡아 두고 있던 어린아이들까지 동원한 걸 알게 되면 생각이 달라지겠지.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괜한 잡음이 새어 나가는 걸 원치 않을 테니까.’
잠시 말끝을 흐린 도해월은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더니 이어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유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만간 한마연의 총책임자가 박호재 연구소장을 다시 불러들이지 않을까 싶어. 그렇게 되면 주해나가 빼내는 정보도 그쪽으로 넘어갈 거야. 주해나 부길드장한테 지령을 내린 사람이 차진명이 아니라 차정주 후보 같거든.’
이어서 도해월은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 넣은 그림을 설연호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한국마력연구소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프로젝트의 거점은 도해 길드가 관리하는 던전이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지금 이 던전 또한 그들이 줄곧 실행해 왔던 실험의 무대로 활용될지도 몰랐다. 도해월은 바로 그 지점을 이용할 생각인 듯했다.
“부길드장님, 잠시 이쪽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그때 누군가 설연호를 향해 외쳤다. 걸음을 멈춘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설연호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뛰어갔다.
* * *
몇 시간 뒤, 제주도.
저녁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제주도는 짙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차정주의 비서가 전달한 주소로 이동한 뒤에 다다른 곳은 그의 개인 사유지에 지어 놓은 낮은 건물이었다. 건물의 전경은 몇 달 전에 방문했던 정수희의 온실과 흡사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지금부터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보안 장치가 설치된 육중한 문을 넘어서 들어선 내부에서는 차정주의 비서로 보이는 남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매번 같은 사람을 비서로 기용하는 것 같네. 그만큼 믿는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이번 생에서 마주하는 건 초면이었으나 나에게는 무척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둘러본 내부는 고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잠시 기다려 주시면 후보님께 소식을 전달드리겠습니다.”
머지않아 나를 응접실로 안내한 비서는 깍듯하게 인사한 뒤 모습을 감췄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인 뒤 그가 안내한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창가 쪽에서 시선이 멈췄다. 탁 트인 창가 너머의 풍경은 환한 낮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지금은 분명 노을이 걷히고 어둠만이 완연한 시간이었으나 창문 너머에서는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붉은 낙엽이 흩날리는 중이었다.
덜컥―
일순 의아해하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니 문간에서 소음이 일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건 차정주였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의 만남인지 모르겠군요, 도해월 마스터.”
멀찍이 떨어진 그가 입을 여는 순간 응접실 내부의 공기가 단숨에 압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