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38
238화. 오래된 기도 (1)
차정주와 나의 사이에는 긴 시간이 놓여 있었으나 그의 모습은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말끔하게 넘긴 회백색 머리카락이며 세월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한 탄탄한 사지는 기억 속 모습과 일치했다.
또한 그는 오랜만에 마주하는 나에게 느끼는 어색함이 없는 건지 예사로운 태도로 나를 대했다. 차진명을 떠올리게 하는 선이 짙은 눈매에는 경계심이나 멸시 대신 특유의 인자함이 배어 있었다.
나를 아직도 헌터 아카데미 교장실에 앉아 있던 학생으로 보고 있나 보네.
확실히 차정주는 차진명보다 훨씬 담담하고 모든 방면에서 능숙했다. 특히 자신보다 어리고 경험도 부족한 사람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만들되, 동시에 열등감을 자극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요. 무탈하게 지낸 듯하니 다행입니다.”
이런저런 질문을 건네던 그는 방금 건넨 말을 끝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나 역시 그에게 말을 덧붙이는 대신 미지근해진 찻물에 입술을 적셨다. 독이 섞이진 않은 듯했으나 그가 모든 주도권을 갖는 이 공간에서 태평하게 차를 마시는 건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다소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동안 도해월 마스터와 헌터 아카데미에서부터 함께한 동료들의 행보는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국가 권력의 신성함이 정녕 무엇인지 재고해 봐야 하지 않냐는 발언도 흥미롭더군요.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자세한 생각을 들어 보고 싶은데.”
차정주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나는 조사 당일 취재진 앞에서 했던 말을 되짚어 보았다.
“제가 전하고 싶었던 말은 그날 취재진 앞에서 전부 표현했습니다. 추가 소환 조사 소식을 접한 지금은 생사람 잡는 짓은 그만두고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는 본질부터 마주하는 게 우선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네요.”
말문을 맺으면서 돌아본 차정주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입가에는 미미한 웃음기가 번졌다.
“생사람 잡는 짓을 그만둬라. 그래, 내가 도해월 마스터에게서 가장 높이 사는 가치가 바로 이런 것이었지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 앞에서 그런 말은 함부로 꺼내지 못했을 겁니다. 특히……. 내 아들 녀석이었다면 더더욱.”
조용히 입을 뗀 차정주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이내 그는 말끝을 흐리며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그 녀석이 연구소 이름으로 우편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렇다는 건……. 도해월 마스터가 녀석의 비밀에 관해서 알고 있다는 뜻이겠죠.”
그마저도 잠시, 그는 등받이에 편히 기대어 앉으면서 말을 이었다. 고개를 반쯤 기울인 그는 맞은편에 앉은 나를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그 일을 빌미로 나를 무너뜨릴 생각이라도 하는 거라면, 굳이 권장하고 싶진 않군요. 난 그저 그 녀석이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몸소 구원해 준 것뿐이니. 그걸 문제로 삼겠다는 가정 자체를 이해할 수 없기도 하고.”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것뿐이었으나 응접실 내부의 공기가 이전과 조금씩 달라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어서 그의 왼쪽 눈가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붉은빛이 아른거리는 듯도 했으나.
“도해월 마스터 같은 인재가 진작 내 울타리 안에 들어와 주었다면 좋았을 겁니다. 간신히 쓸모를 되찾아 주기는 했지만, 아들 녀석은 내가 바라던 만큼 성장하진 못하더군요. 한낱 D급으로 각성했던 학생이 어느새 훌쩍 자라 나와 같은 S급으로 성장한 사례가 바로 내 눈앞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수상한 기색을 감지하기도 전에 차정주가 새로운 화두를 내놓았다. 나는 순간 멈칫거리면서 그를 돌아보았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비각성자가 각성을 하지 않는 이상 각성자 등급이 상승했다는 사실을 맨눈으로 파악하는 게 쉽지 않았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주변 사람들도 A급으로 알고 있을 뿐, S급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도해월 마스터가 알아야 하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알 수 없는 기운이 손가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이토록 불쾌하고 기이한 감각은 몇 년 전, 교장실에서 그를 만났을 때는 전혀 느껴 보지 못한 것이었다.
* * *
한편 던전에서 빠져나온 설연호는 얼마 전, 정원 전자의 이성욱 부회장에게 받은 팔찌 형태의 아티팩트를 통해 개방한 아공간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가상의 공간은 심해처럼 어두운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성욱 부회장이 개발에 참여한 아티팩트는 확실히 다르네요. 그 사람이 만든 물건은 뉴욕에 있는 나디아 라인하트 헌터 손에 가장 먼저 들어간다고 하던데. 그런 물건이 우리 부길드장 손에 있는 걸 다 보네. 다들 잘 봐 두세요. 이런 기회 흔치 않습니다.”
그때 설연호의 맞은편에서 비딱하게 서 있던 안진영이 말했다. 직전까지 장총을 두르고 있던 그는 한쪽 어깨를 돌려 스트레칭하면서 주위의 호응을 유도했다.
“대강 둘러보니 1팀 인원들만 따로 모인 것 같진 않네요. 다른 팀 인원도 섞여 있는 걸 보면 뭔가 중요하게 전달할 사항이 있는 듯싶은데. 어서 말씀해 주시죠.”
근처에서 주위를 돌아보던 최보윤이 말했다. 설연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넓은 공간에 모인 이들과 차례로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언급한 대로 오늘 이 공간에 수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 건 도해월이 자신에게 내린 지시 때문이었다.
“모두 집중해 주세요. 여러분을 이곳에 따로 모은 건 마스터가 비밀스럽게 준비하고 있는 작전에 관해 설명해 드리기 위함입니다. 작전과 관련한 모든 사항 또한 기밀로 유지되어야 하니 이 점 참고해 주세요.”
설연호가 입을 떼는 순간 저마다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헌터들이 하나둘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윽고 그는 모두와 시선을 마주치면서 입을 열었다.
“몇 년 전, 용산의 한 던전 브레이크가 폭발할 뻔했던 사건이 있었죠. 그리고 평택과 단양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연달아 발생했고요. 불규칙한 간격을 두고 벌어진 세 번의 사건을 유심히 지켜봐 왔다면 그사이에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걸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즈음에서 숨을 고른 설연호는 사람들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그러자 오른편에 서 있던 최보윤이 목소리를 냈다.
“음, 공통점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게 딱 하나밖에 없는데요. 등급이 상승하는 속도가 기이할 만큼 빨랐다는 점? 그리고 용산의 경우 고의로 던전 브레이크를 발생시키려 했다고 뉴스도 탔었죠.”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던 헌터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다른 방향에 서 있던 백이현이 자연스레 말을 이어받았다.
“그때 일은 저도 기억나요. 마스터님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 것도 당시에 나온 뉴스 덕분이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용산 사태에 대해선 의문이 제기되긴 했지만, 그게 정말 사실인지, 그 배후에 누가 있는 건지에 관한 건 아직도 오리무중인 채로 남아 있네요.”
백이현이 전한 말은 일종의 신호탄이 되었다. 뒤이어 다른 헌터들 또한 고개를 끄덕이면서 당시에 느꼈던 의문점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네, 전부 맞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을 비밀스럽게 소집한 이유도 세 번의 사태를 거치는 동안 해결되지 못했던 의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도 합니다. 새 작전의 배경에 관한 건 설명이 되었으니 지금부터는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설연호는 다시 한번 헌터들의 이목을 모았다. 그가 가장 먼저 전달한 건 그동안 한국마력연구소에서 벌어진 기행과 도해월이 그들을 추적해 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다음 이능단속‧관리본부가 우리 길드를 상대로 이토록 분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내막까지 전달할 무렵에는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얼마 뒤, 대열의 앞쪽에서 팔짱을 끼운 채 설명을 듣고 있던 안진영이 입을 열었다.
“이관부 그놈들은 왜 우리 마스터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했는데, 이런 내막이 있을 줄은 또 몰랐네요.”
이내 그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헌터들 또한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는 이제 뭘 하면 되나요? 작전 개시일은 언제쯤이죠?”
그때 말없이 한숨을 푹푹 내쉬던 백이현이 손을 들었다. 백이현은 지나온 생에서 단 한 번도 부대원으로 합류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전생을 제외한 다른 모든 생에서 그는 도해월과 모종의 이유로 관계를 맺고 그의 도움을 얻었다.
그리고 그건 백이현뿐만 아니라 이곳에 모인 이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들 모두 도해월과 긴 세월을 함께하며 어떤 식으로든 수혜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설연호가 이들에게 손을 내민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지난 생의 도해월의 잘못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이 상당수인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로 인해 무사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도해월에게 재차 일깨워 주고 싶었다.
“그럼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탈 의사를 밝힐 분이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만약 없다고 하면 모두 합류하시는 걸로 알고 작전 브리핑 시작할게요.”
말문을 맺으며 뒷짐을 진 설연호는 자신의 앞에 모인 헌터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마다 서로를 돌아보던 헌터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으면서 설연호와 눈을 마주쳤다.
* * *
차정주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이한 감각은 살갗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감각이 뒷덜미까지 전해지는 순간, 등줄기에 오한이 돋으면서 그가 나를 왜 이런 곳으로 불렀는지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날 이 먼 곳까지 부른 이유가 있었다.
내가 가진 힘이 얼마나 되는지 보려고 한 거야.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나는 차정주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이내 곁눈으로 창가를 내다보았다. 창문 너머에서는 밝은 빛을 따라 붉은 낙엽이 부드럽게 흩날리는 중이었다.
“도해월 마스터만이 정보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일 겁니다. 나 또한 무엇이 도해월 마스터의 비약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나를 따라서 창가를 돌아보던 차정주가 넌지시 말했다.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혹시 나한테 성물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공정한 판별자’ 스킬을 사용해 볼 때가 다가온 듯했다. 지금이 적기라는 판단을 내린 나는 차분하게 숨을 고르면서 시선을 떨구었다. 일전에 추측했던 대로 차정주가 성물보다 강한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면 스킬을 사용했을 때 무엇이든 감지될 터였다. 또한 방금 그가 언급이 비밀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함께 파악할 수 있을 듯했다.
[스킬 ‘공정한 판별자’가 발동됩니다. 지정한 대상이 지닌 악의를 측정합니다.]고개를 반쯤 숙인 채로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눈앞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지정 대상이 시전자에게 지닌 ‘악의’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 [지정 대상이 시전자에게 지닌 ‘악의’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 [지정 대상이 시전자에게 지닌 ‘악의’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뭐지? 이게 왜…….
의아해하는 순간 응접실 내부를 감돌던 서늘한 바람이 일제히 나를 향하기 시작했다. 이내 목덜미에서 수천 개의 바늘이 꽂힌 듯한 통증이 불거졌다.
“내 앞에서 허튼짓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도해월 마스터.”
맞은편에 앉은 차정주는 담담한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반사적으로 목덜미를 거머쥔 나는 간신히 숨을 고르면서 창가를 곁눈질했다. 환한 빛이 내리는 창문 너머로 맥없이 날리던 붉은 낙엽이 허공에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