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39
239화. 오래된 기도 (2)
살갗에 수천 개의 바늘이 꽂힌 듯한 감각은 이내 가시 돋친 덤불에 목이 졸리는 듯한 통증으로 변모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속박을 떨쳐 내기 위해 목을 감싸 쥐면서 차정주를 노려보았다. 피가 통하지 않는 나머지 눈가에 열감이 오르면서 관자놀이까지 욱신거렸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 정도 수모는 응당 겪게 될 거라고 예상했을 듯싶은데.”
반면 차정주는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게다가 먼저 도발한 건 도해월 마스터이지 않습니까.”
덧붙이는 말을 듣던 나는 고통으로 인해 어금니를 악물었다. 응접실 내부의 풍경 또한 고즈넉하기만 나머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 무척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크흑.”
이내 알 수 없는 힘으로 인해 숨통이 점점 조여 오는 나머지 헛숨을 토하고 말았다. 통증은 전신으로 퍼져 나가면서 점점 거세지고 있었으나 의식은 또렷했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차정주가 나를 이곳에 부른 목적을 재차 상기해 보았다.
여기서 날 죽일 거였다면 이런 식으로 실랑이를 벌이지 않았을 거다. 행동거지를 보니 아직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는 게 분명하다.
차정주는 엄청난 고단수였다. 그의 앞에서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는 그게 뭐가 됐든 전면으로 반박하며 덜미를 잡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최대한 말을 아끼면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는 게 상책.
우선 나한테 걸어 놓은 속박부터 끊어 내야 해.
“설마 내가 이곳에서 도해월 마스터를 처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 중인 건가.”
마침내 찻잔을 다 비운 차정주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관통당하는 듯한 통증이 불거졌다.
순간적으로 흐릿해진 의식을 다잡은 나는 손끝에 마나를 응집시키기 시작했다. 뒤이어 안간힘을 써서 숨통을 겨우 확보한 뒤 창가를 돌아보았다. 꽉 막혔던 숨을 몰아쉬고 있을 무렵 심장의 박동이 점차 거세졌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저 창문이 뭔가 이상했어. 바깥은 분명 한밤중일 텐데 왜 저렇게 밝은 거지.
의문을 품는 순간 예전에 방문했던 정수희의 개인 공간이 떠올랐다. 그곳 또한 던전처럼 바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마나를 통해 내부 환경을 자체적으로 설정한 곳이었다.
차정주가 헌터 아카데미의 필드를 만들 때 그곳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으니 이곳 역시 비슷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는지요. 허튼짓은 삼가라고 했을 텐데.”
휘익―
그때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알 수 없는 무언가 내 목을 옥죄었다. 이전보다 강력한 힘이 더해진 나머지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허공에 떠올랐다.
이전보다 더욱 거세진 압박감으로 인해 버둥거리고 있을 즈음 차정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흑. 큽.”
반사적으로 욕지기가 차오르는 것을 참으면서 차정주를 내려다보았다. 흉하게 일그러진 내 얼굴을 바라보던 차정주가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그의 왼쪽 눈가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왼쪽 눈에서 붉은빛이 감도는 것도 같았는데.
“솔직한 심정을 고하자면, 특별한 기대를 걸고 판을 설계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녀석에게 적당한 자극제가 필요했을 뿐이니까요. 또 언젠가는 내 밑에서 소임을 다할 수 있을지 점쳐 보고 싶기도 했고. 그 방식이 좀 독특했을 뿐.”
홀로 의아해하는 동안 차정주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주위를 거닐었다. 계속해서 강력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탓에 어느새 내 의식 또한 조금씩 흐려지는 중이었다.
“이쯤이면 결심이 섰을 듯한데.”
머지않아 차정주가 허공에 떠올라 있던 나를 돌아보았다. 그가 입을 떼는 순간 응접실을 채웠던 사물들이 환상처럼 스러져 흩날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사방을 가로막고 있던 벽까지 허물어지면서 새로운 풍경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내가 아는 도해월 마스터라면 이런 상황에서 순순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텐데요. 이대로 내 기대를 저버리려는 건 아닐 거고.”
환하고 맑은 빛이 쏟아지는 가을날의 풍경을 눈에 담아 보던 나는 잘게 떨리는 손끝에 힘을 주면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끝에 응집한 마나를 전신으로 퍼뜨리는 동안 재차 말문을 연 차정주의 왼쪽 눈에서 붉은빛이 감돌았다. 눈동자를 물들인 그 빛은 피보다 더 짙고 어둡지만 그럼에도 무척 선연한 색채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래, 바로 저거였어.
그 눈동자에 깃든 수상한 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나는 그가 나에게 걸었던 속박이 스킬로 구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힘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지잉―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로 맞서는 게 정답일 듯했다. 동시에 유스티티아의 검으로 맞서고 나면 그가 숨기고 있는 진실에 다가설 수 있을 거라는 강렬한 예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미개방 스킬 ‘선택된 예언자’의 해금 조건을 일부 달성하였습니다.]그 예감이 맞다는 걸 증명하듯 눈앞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활자가 떠올랐다.
“절 얼마나 오래 봤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행여나 전투를 기대하셨다면 그것만큼은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기어코 나에게 걸려 있던 속박을 깨뜨린 뒤 허공에 떠올라 있던 몸을 지면 위로 착지시켰다. 이내 손아귀에 들린 회백색 검을 고쳐 잡으면서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번에도 역시. 결국 바꿀 수 없는 순리였나 보군.”
내 손에 들린 검을 가만히 바라보던 차정주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시 뒤 그의 손아귀 안에서도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같은 시각, 올림픽대로.
조수석에 앉아서 정면을 바라보던 공희찬은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차려입은 정장이 영 불편했지만 구태여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대신 무릎에 내려놓은 태블릿 모서리를 손톱으로 긁어 댔다.
지잉―
그때 재킷 안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공희찬은 발신자를 확인하지 않고 귓가에 착용하고 있던 무선 이어폰을 툭 건드렸다.
“어, 어떻게 됐냐. 난 지금 가는 중.”
이어서 그는 태블릿 화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자료를 하나 화면에 띄워 놓은 채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며 오른편에 난 차창 너머를 내다보았다.
―우리 쪽도 한 삼십 분 전에 얘기 다 끝났어. 방금까지 희찬이 네가 보내 준 자료도 확인했어. 도착하려면 얼마나 남았어?
어둠을 밝히는 도로의 불빛에 시선을 빼앗겨 있던 공희찬의 귓가로 설연호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를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던 공희찬이 잠시 운전석을 돌아보았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그때 공희찬의 시선을 느낀 남자가 운전대를 고쳐 잡으면서 말했다. 그의 곁에 앉아 있는 건 얼마 전부터 그와 일종의 협업을 수행 중인 공규호 의원의 보좌관이었다.
“글쎄다. 뭐, 그래도 해 뜨기 전에는 도착하겠지. 아무튼, 아공간 들어갔던 사람들은 뭐 아는 거 없대?”
공희찬은 보좌관에게 눈짓을 전한 뒤 다시 태블릿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야에 담긴 건 오늘 오전에 설연호에게 전달한 기밀 서류였다. 서류 속에는 도해월의 지시를 받고 그동안 유심히 지켜보았던 심복에 관해 알아낸 사항이 정리되어 있었다.
―아공간에 있던 사람들은 아예 모르는 것 같았어. 그나마 안진영 헌터가 요새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어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하더라. 우선 네가 정리한 서류는 해월이가 들어오는 대로 전달할게. 고생 많았어.
“야, 고생은 무슨. 됐어. 그나저나 도해월 걔는 아직도 안 들어왔냐? 걔 거기서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차정주 그 인간이 뭔 짓을 할 줄 알고 거길 함부로 쫓아가냐고. 하여튼 사람 말 되게 안 들어, 그 고집불통 자식.”
도해월의 이름을 듣는 순간 다시금 초조해진 공희찬이 입술을 잘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차정주를 개인적으로 만나겠다고 했던 순간부터 엄습했던 두려움이 오늘에 이르러 완전히 터져 버린 상태였다.
―괜찮을 거야. 직접 가서 알아봐야 하는 게 있다고 했으니 확인하고 나면 바로 빠져나오겠지.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긴 하지만……. 뭐든 방법이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
이어폰 너머의 설연호는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했다.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던 공희찬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너희 둘은 대체 뭘 믿고 그렇게 태연한 거냐? 하여튼 너나 도해월이나 가만 보면 둘이 쌍으로 이상해. 됐으니까 끊어라.”
이윽고 설연호의 대답을 듣지 않고 이어폰을 신경질적으로 빼냈다. 운전석에 있던 보좌관은 그런 그의 행동이 익숙하다는 듯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뒤 창문을 열어젖힌 공희찬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강준희가 그렇게 떠난 지 몇 주도 채 지나지 않았으나 설연호를 비롯한 길드원들 모두가 담담하게 추스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공희찬은 날마다 강준희를 떠올렸다.
“괜찮으신 겁니까.”
결국 셔츠 단추를 풀고 옷자락을 펄럭이고 있으니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보좌관이 넌지시 물었다.
“예, 뭐.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아버지가 진짜로 날 만나겠다고 한 거죠? 그동안 우리가 연락하고 있었다는 건 모르시는 거고?”
공희찬은 창문을 올려 닫은 뒤 보좌관을 향해 채근하듯 물었다.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일전에 소개해 주신 재단 소속 헌터분들과 함께 한마연의 등급 조작에 연루된 사례를 계속 모으고 있고, 그 사안은 의원님께서도 전혀 인지하지 못하셨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대로 이십 분 정도 더 가면 도착할 겁니다.”
공규호와의 만남을 가져 보는 게 어떤지 제안한 건 바로 곁에 있는 보좌관이었다. 그런 그를 빤히 보고 있으니 공희찬은 언제가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렸다.
‘만약 도련님과 도해 길드 소속 헌터분들께서 이번 사례를 빌미로 차 후보에게 흠집을 내고 싶은 생각인 거라면 마음처럼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확실한 계기가 필요할 듯합니다. ……. 관련해서 저에게 생각이 하나 있기는 한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물론 쉽지 않겠지만, 의원님께서도 차 후보를 유심히 살피고 계셨던 만큼 소득이 아예 없진 않을 겁니다.’
뒤이어 보좌관이 언급한 건 공규호가 최근에 우연한 기회로 습득한 자료에 관한 것이었다. 공규호는 임기 초반부터 지금까지 각성자의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긴 만큼 상대편 진영에 있는 의원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왔고, 차정주 또한 예외는 아니라고 했다.
‘차정주 후보라면 그동안 연구소에서 벌인 일이 발각되었을 때 논란을 불러일으키긴 하겠지만, 어떻게든 묻어 버릴 수 있을 거야. 거기에 빼도 박도 못하는 한 방을 더할 수 있다면 우리로서는 더할 나위 없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보좌관 말대로 아버지랑 제대로 담판을 짓고 나오자고.’
어느새 차창 너머에서는 익숙한 거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앉은 자리에서 뒤척이던 공희찬은 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숨을 골랐다.
머지않아 시작될 공규호와의 협상에서 그가 이루고 싶은 목표는 간단했다. 자신의 아버지와 거래를 무사히 종료한 뒤, 그의 슬하를 벗어나 어엿하게 홀로 선 자신의 존재를 내보이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과 다른 이들의 죽음이 이대로 묻히지 않기를 바랐던 강준희의 염원까지 이뤄 주고 싶었다.
‘이미 다 죽어 버린 마당에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겠지.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던 강준희의 야윈 얼굴을 떠올리던 공희찬이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차창 너머에서는 수많은 빛이 뒤엉킨 밤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