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4
24화. 지령 (2)
[던전 입장을 시도합니다.] [입장 인원이 확인되었습니다.] [던전 에 입장을 완료하였습니다.]일순 발밑이 서늘해지다 못해 저릿한 감각이 전신을 타고 올랐다.
본능적으로 감았던 눈을 뜨기도 전에 끔찍한 한기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힘겹게 시야를 확보한 나는 역방향으로 꽂혀 있던 백색 총에 손가락을 걸었다.
훗날 이곳은 2027년 용산 던전 브레이크 사태의 시발점이 된다.
그 사태로 인해 남산타워가 무너지고 용산구는 쑥대밭이 되어 버린다.
내가 이 사태를 명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재난이 남긴 여파 때문만이 아니다.
사라졌던 차진명은 남산타워 구조물이 전부 수거된 이듬해 겨울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몇 년 뒤, 경기 평택시에서 용산 사태와 흡사한 형태의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한다.
그때, 현장에 파견되기 전 나누었던 대화에서 그는 어딘가 수상한 기색을 보였다.
그때도 사람을 깔보는 태도는 여전했지만 분명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어.
차진명을 잘 알고 있는 나만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미묘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던전을 확인해 봐야겠다.
나 자신도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건지 정확히 대답하지 못한 채, 상념을 끊어 낸 나는 얼음장처럼 딱딱해진 총신을 부드럽게 감싸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앞에 우뚝 드리운 설산과 그것을 둘러싼 모든 풍경이 온통 희게 물들어 있었다.
수천 갈래의 바람결이 휘몰아치며 허공에 뜬 눈송이도 그 궤적을 따라 흩날렸다.
이곳을 가득 메운 냉혹한 공기는 고작 입술을 달싹이는 것도 버겁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겨우 퍼뜨린 입김이 늘어지기도 전에 부서지듯 흩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스킬 ‘증폭’이 발동됩니다.] [‣ 증폭 (D)시전자가 선택한 대상의 감정 혹은 오감 중 일부를 증폭시킬 수 있습니다.]
서 있기만 했는데도 뇌까지 얼어붙는 기분이야.
기본적인 처치부터 하고 움직여야겠어.
[시전자가 지정한 대상의 ‘수용성’을 감소시키고, ‘저항감’을 증폭시킵니다.]한껏 악문 어금니가 부득거리며 갈리는 소리가 났다.
입장한 직후보다 한결 나아졌으나 아직은 부족했다.
심호흡을 반복하며 전신을 옭아매는 불유쾌한 감각을 떨친 나는 총을 고쳐 쥐었다.
버프 전용 백색 권총을 넓게 감싼 손끝이 어느새 터질 것처럼 붉게 변한 것이 보였다.
한숨을 삼키며 방아쇠에 검지를 걸친 다음 총구를 나의 심장을 향해 겨누었다.
탕!
일순 레몬 빛 탄환이 일정한 궤적을 그리며 심부를 파고드는 감각이 느껴졌다.
온몸에 힘을 주고 꼿꼿하게 서서 버티려 했으나 두 발이 뒤로 조금씩 밀려났다.
반동에 휘청이려던 상체를 바르게 세우면서 잔상처럼 흩어진 빛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계속해서 시전하던 ‘증폭’ 스킬이 총이 가진 버프를 덧입은 채로 전신에 퍼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사용자의 ‘마력’ 스탯이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지속 시간은 총 6시간입니다.]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어서 인벤토리 창을 띄웠다.
일전에 보상으로 지급받았던 아이템 중 하나를 누르자 선택 화면이 떠올랐다.
[‘마력 상승 팔찌’ 아이템을 착용하시겠습니까?]나는 그 아래로 ‘착용’이라고 적힌 글자를 눌렀다.
[사용자가 ‘마력 상승 팔찌’ 아이템을 착용하였습니다. 현 시각을 기점으로 사용자의 마력 스탯이 ‘+30’만큼 상승합니다. 효력 발생 시간은 총 ‘6시간’입니다.*해당 아이템은 일회성 소모 아이템입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나는 주먹을 쥐었다가 펼치면서 고개를 가볍게 양옆으로 꺾었다.
총구에 열기가 남아 있는 채로 허리춤에 밀어 넣으면서 정면을 잠시 응시했다.
이내 밑창을 얹을 때마다 발자국대로 푹 꺼지며 사각거리는 눈밭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묵묵히 걷다 보니 어느새 게이트 근처에서 한참 멀어져 있었다.
거대한 형체로 솟은 설산과 가까워진 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아득하면서도 짓누를 듯한 산맥의 위압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잠시 멈춘 지점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지나온 길목마다 남겨 둔 발자국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흩날리는 눈발이 패인 자국을 순식간에 채워 나간 듯했다.
멸절의 설산.
이곳은 ‘멸절’이라는 이름대로 그 어떤 걸음도 허락되지 않는 공간이다.
설산은 생명을 품고 스스로 거동하는 존재를 수용하지 않았다.
얼어붙은 코끝에서 긴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그마저도 끝을 모르고 날리는 눈송이 사이로 사라졌다.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틀어도 그저 새하얗게 번져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멈춰 있다가는 고립되는 것으로 모자라 저 눈송이에 묻혀 버릴지도 모른다.
[스킬 ‘천리안’이 발동됩니다.] [‣ 천리안 (S)천 리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얻게 됩니다. 시간의 궤도에 진입함으로써 천체의 흐름을 관조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순간 깊이 감긴 눈꺼풀 너머로 새로운 창이 열리듯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예민하게 발달한 오감이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흡수했다.
숨을 게우는 사이 이 던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전투 장면들이 비선형적으로 들이닥쳤다.
* * *
2030년, 여름.
이능청장 차진명의 집무실.
“오늘 오전까지 E등급으로 유지되었던 경기 평택 제13던전이 오후 1시 47분을 기점으로 마나 수치가 폭증하여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했습니다. 해당 던전에서 도보로 삼십 분이 채 되지 않는 거리에 반도체 공장 단지가 위치하고 있다는 정보를 확보하였습니다. 이능청 소속 헌터 및 부대 소속 헌터 또한 긴급 파견 요청에 응하였습니다.”
간결하고 정확한 어조로 늘여 놓는 브리핑에도 차진명은 반응이 없었다.
책상 앞에 앉아 전용 태블릿을 내려다보는 눈길은 요동 없이 잠잠했다.
제복 차림에 완전 무장을 마친 나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말아 움켰다.
어느 순간부터 차진명 이능청장과 독대하는 순간이 되면 숨통이 틀어막히는 기분이었다.
“해당 던전 브레이크는 이때까지 발생한 여타 던전 브레이크와 발생 패턴에 다소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차이’라는 단어에 차진명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틀고 나를 바라보았다.
선이 짙은 눈매와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헛숨이 쏟아졌다.
“오늘 오전까지 E등급으로 유지되었던 던전이 SS급으로 상승한 후 브레이크를 발생시키기까지 불과 15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계산된 평균 수치에 의하면 최소 27분, 최대 41분 이내에 등급 상승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머릿속에 당연하게 기억된 정보를 설파하는 것이었으나 혀끝에 주저함이 감돌았다.
혹여 그에게 잘못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거듭 고개를 들었다.
“왜 말을 멈추지?”
한참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열리더니 낮고 부드러운 미성이 회백색의 공간을 울렸다.
반듯하던 자세를 흩트리며 무릎끼리 겹쳐 얽은 차진명은 나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주 닿는 눈길에서 적지 않은 신뢰가 묻어났다. 그는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자세를 다시금 가다듬으며 설명을 마친 나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섣부른 판단일 수 있으나 해당 던전 브레이크는 2027년에 발생한 용산 던전 브레이크와 발생 패턴이 상당히 유사합니다.”
차진명이 한쪽 눈썹을 치켜뜨더니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가 보인 무의식적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말씀드렸다시피 곧바로 가정하는 것은 이른 감이 있으나 공통된 양식이 두 사태에서 연이어 발견되었다는 것은.”
다급하게 쏟아 내느라 이따금 단어와 단어 사이의 발음이 뭉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만. 거기까지만 해.”
그즈음에서 차진명은 태블릿을 내려놓은 뒤 팔목을 들어 내 말을 저지했다.
“내가 사령관에게 기대한 쓸모는 이런 게 아니었어. 네가 가진 스킬로도 브레이크는 확인이 안 되나 보지?”
그건 대답을 바라고 건넨 질문이 아니었다. 명백한 책망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사령관에게 관용을 너무 오랫동안 베풀었어.”
혼잣말을 하듯이 읊조리던 차진명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눈을 감았다.
약지로 눈썹 어귀를 매만지던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눈가를 미약하게 찌푸렸다.
그 무렵의 차진명은 앞에 선 나를 두고 같은 논지의 말을 되풀이하며 탄식했다.
처음 들었을 때의 나는 그의 말에 담긴 정확한 의도를 간파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돌아서서 수도 없이 그 말을 곱씹다 보니 어느 순간 의미가 피부로 와닿았다.
“고작 그것밖에 못 보다니. 생각보다 쓸모가 없는 스킬이네.”
언젠가부터는 그렇게 말하는 차진명의 목소리가 밤낮으로 내 귓가를 괴롭혔다.
그러나 ‘적당히’를 넘어서고 싶었던 나의 욕심은 끝을 모르고 자라났다.
그것은 잘라 낼수록 더욱 줄기차게 솟는 잡초처럼 질기고 끈질기게 나를 옭아맸다.
그럼에도 차진명의 앞에 선 나는 언제나.
“시정하겠습니다.”
그 모든 것을 작은 상자에 억지로 구겨 넣듯 은폐하고서 고개를 숙였다.
차진명은 그런 내 모습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이전처럼 화면에 눈동자를 고정한 채 미동하지 않는 그를 두고 집무실을 나섰다.
군용 헬기를 탑승한 나는 나란히 착석한 부대원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현장에서 각자 수행할 임무 조달을 마친 내 시선은 구석에 앉은 설연호에게 멎었다.
“설연호 중위, 귀관은 본 사령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본데.”
내내 입술을 달싹이던 설연호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비딱하게 틀고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내가 언제까지 귀관의 소극적인 태도를 용인해야 하지? 귀관의 의견이 내가 내린 명령보다 합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언제든 반기를 들라고 했을 텐데.”
“불만 없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한숨을 푹 내쉬면서 들여다본 설연호의 얼굴은 여느 날보다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나는 설연호가 움킨 주먹으로 도드라진 새파란 혈관 따위에서 시선을 금세 거두었다.
“내가 바라는 건 하나야. 수많은 인재 중에서 하필 귀관을 택했던 일을 더 이상 후회하게 만들지 마.”
반쯤 짓씹으면서 뱉은 말에 다른 부대원들이 얕게 동요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마저도 외면해 버리고 고개를 돌린 나는 전투 설계를 점검하고자 눈을 깊이 감았다.
그 순간에도 나의 직감은 용산 던전 브레이크와의 연관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던 차진명의 눈빛에도 평소와 달리 아주 미묘한 기색이 어린 채였다.
그러나 그는 나의 예측을 단번에 저지하고 경고와 함께 완전히 부정해 버렸다.
나는 그런 차진명의 반응이 정설이라 믿으며 스스로를 훈계하고 다그쳤다.
* * *
삽시에 거칠게 달뜬 호흡을 추스르지 못한 나는 설원에 주저앉고 말았다.
빠른 속도로 박동하는 심장을 움키듯 옷깃을 쥐고 허덕거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의식을 지배한 미래의 장면 중 유난히 낯설고 기이했던 대목을 다시금 떠올렸다.
한층 거세진 눈보라와 한가득 쌓인 눈더미 안쪽에 파묻혀 있던 검고 푸른 무언가.
홀로 형형하게 빛을 발하며 그 주변부까지 강력한 마나로 휘감는 그것은 분명…….
전생에서도 육안으로 확인한 것이 단 한 번뿐이었던 S급 마석이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나는 얼어붙은 손끝을 가눠 인벤토리 창을 띄웠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아이템을 착용하시겠습니까?]나는 그 아래로 ‘착용’이라고 적힌 글자를 눌렀다.
[사용자가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아이템을 착용하였습니다. 현 시각을 기점으로 사용자의 이동 속도가 상승합니다. 전투 상황에서 사용 시 빠른 속도로 이동하며 적의 시야를 벗어나 은신할 수 있습니다. 효력 발생 시간은 총 ‘2시간’입니다.*해당 아이템은 일회성 소모 아이템입니다.]
그 순간 두 발에 날개가 돋친 듯 가벼워진 것이 느껴졌다.
허공에 발목을 두어 번 휘저어 본 나는 주저하지 않고 정상을 향해 달려 나갔다.